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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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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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2-05-01 07:04:08, Hit : 3
File #1    가정생활을_위한_계명모음.hwp (112.5 KB)   Download : 0
Subject    가정생활을 위한 계명모음
/ 가정생활을 위한 계명모음/

1. 부부 십계
1,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자.
2, 두 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말자.
3. 집이 불이 났을 때
외에는 고함을 지르지 말자.
4. 눈이 있어도 흉을 보지
말고 입이 있어도
상대의 실수를 말하지 말자.
5. 아내나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자.
6. 아픈 곳을 긁지 말자.
7. 화를 간직한 채 잠자리에 들지말자.
8. 처음 사랑을 잃지 말자.
9. 결코 단념하지 말자.
10. 서로 숨기지 말자.
2. 행복한 부부 십계명
1. 결혼 전과 신혼 초에 보였던 관심과
사랑이 계속 변치 않도록 노력하라.
2. 결혼기념일과 아내의 생일을 잊지 말라.
3. 평소 아내의 옷차림과 외모에 관심을 보여라.
남편은 아내의 사랑스러움을
가꾸는 정원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4. 아내가 만든 음식에 대해 말이나
행동으로 아내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라.
5. 모든 일을 아내와 의논하고
결정하는 습관을 길러라.
결혼의 행복이란 부부간의 사랑보다는
평소에 부부가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는가에 달려 있다.
6.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농담이나 행동을 삼가라.
7. 가정에 불화가 있을 때,
남편은 한 걸음 아내에게 양보하라.
아내의 매력이 사랑스러움이라면
남편의 매력은 너그러움이다.
8. 가정경제는 아내에게
일임하여 아내가 보람을 갖게 하라.
9. 아내의 개성과 취미를
존중해 주고 키워주도록 하라.
10. 하루에 두 번 이상 아내의 좋은 점을
발견하여 즉시 일러줌으로써
아내에게 기쁨을 주는 습관을 길러라.

1. 자기 자신과 가정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아는 재치와 근면성을 길러라.
2. 음식준비에 정성을 기울이고
남편의 식성에 유의하라. 식
탁은 가정의 화목을 도모하고
대화를 나누는 친교의 광장이며,
하루의 피로를 풀고 내일을
꿈꾸는 희망의 산실이다.
3. 혼자만 말하지 말라.
남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아
부부가 충돌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4. 남들 앞에서 남편의 결점을
늘어놓거나. 지나친 자랑을 하지 말라.
5. 남편에게 따져야 할 말이 있을
때는 그의 기분 상태를 참착하라.
6. 남편에게는 혼자만의
정신적 휴식식간을갖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음을 잊지 말라.
7. 중요한 집안일을 결정할
때는 남편의 뜻에 따르라.
8. 남편의 수입에 맞춰 절도
있는 살림을 꾸려 나가도록 하라.
9. 모든 일에 참을성을 가져라.
10. 하루에 두 번 이상
남편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지적해 줌으로써 남편의
기쁨과 긍지를 갖도록 하라.
3. 새로운 부부 십계명
1. 진실한 사랑의 의미를 배우십시오.
2. '완전한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행복한 결혼'을 위해 노력하십시오.
3. 남편의 독특한 성격과 필요한 점을
발견하여 만족시키도록 하십시오.
4. 부모님에 대한 의존과
친척들의 비평을 상관하지 마십시오.
5. 무엇을 요구하는 대신
칭찬과 이해를 해 주십시오.
6. 소유욕과 질투심을 버리십시오.
7. 불평이나 요구보다,
사랑으로 남편을 맞아들이십시오.
8. 비판이나 공격으로 남편을
바꾸어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9. 공주와 같이 되려는
꿈을 버리고 성장하십시오.
10.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1. 아내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대하십시오.
2. 많은 찬사와 확신을 주십시오.
3. 책임의 범위를 정하십시오.
4. 비판을 하지 마십시오.
5. '작은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6. 아내가 늘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인정하십시오.
7. 아내에게 안정감을 주십시오.
8. 아내의 기분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주십시오.
9. 생활을 향상시키려는
아내의 노력에 협조하십시오.
10. 아내의 독특한 욕망을 발견하여
그것을 충족시키도록 노력하십시오.
4. 아내의 십계명  
제1계명 : 청결한 아내가 되라.
청결은 성결의 사촌이란 말이 있다.
겉옷보다 속옷을, 속옷보다 몸을,
몸보다 피를, 피보다
영혼을 깨끗이 하라.
남편은 청결한 아내를 사랑한다.
제2계명 : 기다릴
줄 아는 아내가 되라.
임이 오시던 날/버선발로
달려가 맞았으련만/
굳이 문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기다리다 지쳤음이오리까/
그도 저도 아니오이다/
그저 자꾸만 눈물이 나/
문 닫고 죽죽 울었습니다.
노천명의 '임이 오시던
날'은 남편을기다릴 줄
아는 아내의 진실한 모습이다.
제3계명 : 남편으로부터 큰 것을
기대하고 작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
남편은 밖에서 가족을 위해 일하다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돌아온다.
그것으로 족하다, 편안히 쉬게 하라.
집안 청소해 달라는 등
시장에 같이 가자는 등
명령식의 이런 작은
일에 기대하지 말라.
이런 일 해준다 해서
훌륭한 남편일 수 없고,
안 해 준다 해서
부족한 남편일 수 없다.
오히려 작은 남편 만들기 쉽다.
남편이 자원할 때 그런
일은 아름다운 것이다.
제4계명 : 남편 앞에서
아프다는 말을 하지 말라.
옛글 뜻풀이에서 아내를
'안해'라 불렀다.
집안의 해는 흐려서는 안된다.
세상 모든 남편이 집에 들어와
가장 듣기 싫은 소리는
아내가 "여보, 나 아파요"소리다.
바가지보다 더 나쁜 것은
무관심이요,무관심보다
더 나쁜 것은 아프다는 소리다.
남편은 80에도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아내는 50이면 경수가 끊어진다.
남편은 아내가 항상 건강하게
남편을 맞아주길 바란다.
동정 받으려 말고 사랑을 받으라.
제5계명 : 바가지는 긁으라.
그러나 웃으면서 긁으라.
남편이 성자이길 기대하지도
말고 성자가 되려고도 말라.
부부가 함께 성자인 사람,
세상에서 본 적이 없다,
어느 가정에 부부싸움이 크게 있었다.
화가 난 남편이 "이렇게
싸우고 살기보다
서로 이혼을 하자"했다.
아내가 화를 내며 말하길
"이혼하려면 왜 싸워요.
살려니까 싸우지요"
했다 한다. 지혜로운 아내이다.
제6계명 : 경건한 아내가 되라.
아침에 남편이 눈을 떴을 때 아내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나,
성서를 펴들고 독경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퇴근길에 혹 아내가 부르는
찬송소리를 들었을 때
남편은 아내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된다.
제7계명 : 순종하는 아내가 되라.
간디의 아내가, 기자들의 간디에 대한
질문에 대해"나는 남편을 따르는 것을
아내의 존엄성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얼마나 위대한 아내의 고백인가,
제8계명 : 남편의 짐을
함께 나누는 아내가 되라.
담배를 끊지 못한 남편을 위해
가족과 함께 금연식을 가졌단다.
1. 개회사 : 지금부터 아버지의
금연식을 시작하겠습니다.(아들)
2. 금연선서 : "나는 하나님과 가족 앞에서
금년만은 반드시 금연하기로 서약합니다"(아빠)
3. 구호제창 : "금녕에는 금연을!"
"금년에는 금연을!"(다같이)
4. 화형식 : 담배와 성냥을 화형시키다(어머니).
5, 공약 : "아내된 나는 금연한 남편을 위해
가장 좋은 영양식을 만들겠다".
"자녀된 우리는 아버지 구두닦는 것과,
세면 후 수건을 챙겨 드리겠습니다".
6. 내빈격려사 :"오빠의 금연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 결심 금년에는 변치 말길 바랍니다."(고모)
7. 축가 : 생일 축하곡에
맞춰 "금연 축하합니다..."(온가족)
8. 감사기도 : 통성으로 9. 폐회사 :
"이상으로 우리 아빠 금연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딸).
10. 피로연 : 한 달분 담배값
정도의 액수로 피로연을 가진다(온 가족)

남편의 소감은 벌써 금연식이 여러 번인데
올해만은 금연해야 되겠다는 결심이었다 한다.
남편의 짐을 함께 지며 인내하는 아내의
지혜속으로 한 가정의 행복을 엿볼 수 있다.

제9계명 : 모든 일에 감사하는 아내가 되라.
하나님은 우주를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찬양하고 감사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불평하고 짜증내면 마귀에게 영광이 된다.

제10계명 : 남편에게 의로운 선지자가 되라.
남편은 밖에서 불신앙과 접하게 된다.
남편의 신앙이 식어질 때 이끌어주고,
낙심되고 실망할 때 위로자가 되라.
함께 신앙이 식어지면
누가 우리 가정을 일으키겠는가

5. 남편의 십계명
제1계명 : 교회 앞에 충성하는 아내를 탓하지 말라.
아내를 나라는 것은 핍박이 되고, 핍박은 곧 하나님께 한 것이 된다. 하나님을 질투 대상으로 삼지 말라. 아내는 그대가 충성 못한 몫가지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월이 지난 후, 아내의 충성은 자녀에게 귀한 신앙의 유산이 되고, 그대 가정에 축복이 있으리라.
제2계명 :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라.
병든 아내가 불쌍한 것이 아니다. 신앙으로 이기면 된다. 가난한 아내가 불쌍한 것이 아니다. 마음만 넓으면 이긴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내가 불쌍하다. 일평생 한 여자빡에 모르는 남자는 행복한 것이다. 경제권을 아내에게 주라, 아내는 보람을 갖고 일하리라.
제3계명 : 모든 일은 아내의 동의를 구하라.
전선이 끊어지면 동력은 소용 없어진다. 소금은(NaCl)염산과 나트륨이라는 독극성 물질이 합쳐졌을 때 맛을 낸다. 부부도 서로 다른 사람이 하나가 될 때 행복의 맛을 낸다.
제4계명 : 아내의 모든 일에 칭찬과 감사의 말을 잊지 말라.
타미펠이필드 여사가 금혼식을 맞아 부부생활을 회고한 내용이다. 남편은 50년 동안 여전히 옷장 문 닫는 법없고, 아내 또한 냉장고 청소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들이 나쁜 버릇을 서로 못 고치고 살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내는 남편에게 잘못한 것 있으면 반드시 용서를 빌었다. 남편 대답은 "용서할 것 없어. 이미 다 잊어버렸는 걸."항상 남편은 부인에게 식사 후"오늘 식사는 정말 훌륭했어." 아내는 언제나 남편에게 "당신은 정말 신사예요"이들을 금혼식까지 행복하게 살게 한 것은 이 40마디 정도의 칭찬과 감사의 말이었다고 한다.
제5계명 : 신앙의 족장이 되라.
가정의 왕이나 폭군이 되려 말라. 집안의 왕은 주님이시다. 신앙의 족장이 되라. 가정 제단에서 예배를 집례하는 그대는 가정에 행복을, 그대에게는 남편의 존엄성을 축복받게 된다.
제6계명 : 아내에게도 휴가를 주라.
일 년에 한두 주간씩 기도원에나, 친정에나, 친구 집에나, 계절학교에 보내라. 보고 배우는 것이 많고, 쌓였던 스트레스도 해소되고, 아내는 집이 그리워 아내가 정한 날짜보다 서둘러 돌아올 것이다. 그대는 신혼 때처럼 아내를 맞게 될 것이다.
제7계명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아내임을 잊지 말라.
큰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빠가 집에 있음에도 "엄마 어디 갔어?"한다.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또 "엄마 어디 있어?"한다. 어머니가 밖에 갔다 오시면 "애기 어디 갔냐?"하신다. 필자도 밖에서 돌아오면 "너희 어머니 어디 갔나?"하고 찾는다. 잠시 동안이라도 아내가 안 보이면 아이들과 온 식구가 울상이다. 이렇게 귀한 아내가 없다고 생각해 보라. 세월은 기다리지 않는다. 지금 아껴주라.
제8계명 : 아내 앞에 겸손하라.
아내가 나와 만나지 않고 나보다 훌륭한 사람과 만났다면 지금쯤 이보다 더 행복한 부인이 됐을 것이란 것을 잊지말라. 중세 성자 마카리우스가 나무를 해가 지고 내려오는데 사단이 낫을 들고 성자 앞에 굴복하며 "나는 너를 넘어뜨리려고 네가 하는 모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한 가지 못하고 간다"하기에 무엇인가 물으니 "그것은 겸손이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제9계명 : 처가집에도 똑같은 사랑을 드려야 한다.
아내는 정에 약하다. 처가쪽 식구들에게까지 도움과 사랑의 배려가 있을 때 눈물나도록 아내는 감사해 한다. 모든 것은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10계명 : 아내에게 의로운 선지자가 되라.
아담을 망친 것은 하와의 불신앙이었음을 잊지 말라. 아내가 영적으로 낙심할 때 남편이 신앙으로 이끌어주고, 신앙이 실망 속에 빠질 때 위로자가 되라. 두사람이 함께 신앙이 식어지면 누가 그대 가정을 일으키겠는가.
부질없는 소망 같으나 자기 목숨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 속이고 평안했던 남편 아브라함에게 그래도'주'라 하며 순종하고 따랐던 사라 같은 아내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아내를 보고"그대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과 같도다"하며 입술로 범죄 앉았던 욥과 같은 남편이 만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또한 얼마나 재미 없을까 생각해 본다. 행복은 평온 속에서보다 고난 속에서 승리한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이다.
/가정 교육론/    
가정은 인간 형성이 이루어지는
최초의 중요한 교육의 장으로
기독교적 신앙 인격의 형성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서의 가정 교육관 :
가정은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
훨씬 전부터 형성된 가장 작은 단위의
신앙 공동체로 특히 구약시대의 가정은
종교 교육의 가장 중요한 장이었다.  
히브리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의 특징은
비형식적이고 통제적인 그리고 구전,
종교 의식 등을 통한 교육으로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 형성 전까지의 가정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신앙을 훈련하는 장이
되어 왔으며 초대 교회에 이르러서는
예배 외 성도의 교제를 위한 모임의 현장,
그리고 신앙적 양육의 책임이
주어진 곳으로 인식되었다.
즉 성서에서의 가정은 종교적
훈련의 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 가정의 교육적 의의 : 출산,
경제, 휴식, 교육이라는
4대 본래적인 기능을 가진
가정에서 교육적 기능은
개개인의 인격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는 기능을 말한다.
또 개인이 속한 사회나 사회적 집단의
관행을 배우는 것을 사회화라 한다면
가정은 최초이면서 가장
중요한 사회화 기관이다.
가정교육은 가족 구성원간의 사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 성립되는 것이며
가정에서 배우는 것이 곧
생활화되고 습관화되므로
전인 교육의 현장이 바로
가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교육이 진정으로 가능한
현장은 가정일 수밖에 없다(H. 브쉬넬).  

* 가정교육의 방법 : 가정이 살아 있는
교육의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교육 내용과
교육 방법을 동시에 숙고해야 한다.
김정환 교수의 [전인 교육론]에서는
가정교육의 방법상의 특색을 가정 구성원의
사랑과 신뢰가 바탕이 되는 교육,
지정육의 조화로운 성장을 도모하는 교육,
아동의 잠재적 가능성을 키워주는 개성 교육,
부성과 모성 상보의 교육, 효과가 지속적이고
후에 나타나는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브쉬넬은 기독교 가정의 가장 중요한 교육 방법
을 부모들의 신앙의 생활화와 아동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한 신앙체험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신체적 양육, 처벌, 놀이, 성경 해석,
대화, 기도를 들고 있다.  

* 현재 기독교 가정교육의 문제 :
급속한 변화가 내재된 산업화 사회는
전통적인 가정관과 가정구조의 붕괴를 가져왔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가정 내의 교육의
포기와 더불어 교육 전문 기관에의
전적인 의뢰라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교육전문기관인 학교가
가정교육 기능 중 자녀들의 사회화
그리고 성인들의 정서적인 안정화 기능을
대신할 수는 없으며 가정교육에 있어서
부모 어느 한편에로의 전적인 의존은
교육의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다.
또한 대중 매체는 가족 간의 대화와
상호 이해를 단절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가정교육의 부재현상은
기독교 가정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현상이다.
가정 예배의 상실 그리고
현대적인 자녀 교육의 이론은
이러한 기독교 가정교육의 내용과
본질을 약화 분열해 나가고 있다.
자녀의 신앙 인격의 형성은 부모들이
가정에서 종교적인 의식을 생활화하고,
뚜렷한 신앙적인 목표를 두고 의도적,
무의도적으로 자녀를 향해 부단히
간섭해 들어갈 때 가능한 것이다.  

* 기독교 가정교육의 과제 :
기독교 가정에서의 자녀 교육은
부모들의 책임이요 하나님의 명령이다.
현대 가정이 지니는 조건들 안에서 보다
이상적으로 올바르게 교육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는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기독교 가정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부모와 교회의 새로운 인식이다.
가정을 신앙 인격 형성에 중요한
그리고 집중적 행위가 행해질 교육의
장으로 인식할 때 바른
신앙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둘째는 부모들의 투철한 기독교적 자녀관이,
즉 주 안에서 자녀들을 가르치고 훈련하고
훈계하는 자로서 부모들 스스로의
자리를 매기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세째는 교회가 가정교육을 적극 지원하여
교회 교육과 가정교육의 깊은
유대
를 형성해야 한다.

성서 부부학  

다윗
을 유혹했던
밧세바

영어이름이 Bathsheba로 표기된다.
그 이름에 적당히 띄어쓰기를 하면
Bath she ba가 될 수 있다.
[(
다윗
이) 그녀가 목욕하는 것을 봐] 가 된다.
이래서 이름을 잘 지어야 되는건지 모른다.
언젠가 시내에 나갔다가
[에바다 산부인가]란 간판을 본일이 있다.
가만보니 그 이름이 재미있다.
반복해서 발음을 해보라
[애(아이) 받아]가 되지 않는가 말이다.
그런데 실제 성경에서의 에바다는
[이는 열리리라(
마가복음 7:34
)]는 뜻이다.
열려야 탄생될 수 있는 생명을 염두에 두고
이른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한동안 재미있게 웃은 일이 있다.
이런 따위를 영어에서는 word play 라 한다.  

교회의 기초는 가정
그 가운데는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아내거나
이해를 돕고 기억을 쉽게 해주기 위한 것도 많다.  
예를 들면 R C Miller란 학자는 성경의 수평적 이해를
다섯개의 C즉 창조(Creation) 언약(Cobenant)
예수 (Christ) 교회 (Church)완성 (Consummation)으로 말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천국
이 4개의 H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첫번째의 H 는 마음(Heart) 두번째 H 는 가정 (Home)
세번째 H는 교회 (House of God)
그리고 마지막 H 는
천국(Heaven)이라 할 수 있다.
여덟 쌍 중 한 쌍 이혼

하지만 우리는 이 H 가운데 세번째와 네번째의 H는 많이 강조하면서 첫째와 둘째의 H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해 왔다.  또한 마지막 H 가 첫째의 H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도 쉽게 간과해 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한
천국
은 심령가난의 마음부터 시작되엄아다.  그리고 두번째 H (가정) 가 온전하지 않고는 세번째의 H(교회)는 흔들리고 만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초는 가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네개의 H가 균형 잡혔을 때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두 번째 H(가정)에 대해서는 지나칠 만큼 무신경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도 결혼한 독신녀와 결혼한 독신자들이 많다. 심지어 합법적인 매춘행위가 행해시조 있다는 경고의 소리도 그다지 지나친 소리만은 아니다.  
최근 들어 결혼한 부부들의 여덟 쌍에 한 쌍 꼴로 이혼율이 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고아수출 세계1위라는 오명을 못 벗어 던지고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한마디로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이다. 어찌 보면 성경은 가정으로 시작해서 가정으로 끝나는 책이라 해도 옳다.  
창세기
첫 부분은 가정의 시작으로
요한계시록
마지막은 최종적인 가정이 이루어지기 위한 혼인예식과 가정에 대한 묘사로 끝나고 있다.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묘사로 구약시대를 마감한다.  그리고 신약의 첫번째 책이
마태복음
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출생의 이야기로 신약시대를 열고 있다. 뿐만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번째
이적

가나
의 혼인잔치에서였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가정적인 용어로 채색시켜 놓았다.  

/제 기능 회복 노력을/
결국 성경으로 돌아갈 때 4H는 더 이상 불구로 남지 않게 된다.  동시에 가정회복의 출발점은 언어를 고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무심히 쓰는 말이 [우리 집에 놀러오실래요?] 이지 [ 저희 가정에 들러주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House는 있는데 Home 은 없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입술에 [집] 보다는 [가정]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러워질 때부터 가정은 회복되기 시작할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와 자녀 상담/  
상담이란 심리학적 기술이나 사람의 마음을 약간 아는 어떠한 지식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셨고 우리를 받아 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감격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람들 사이에 나타나게 될 때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상담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느냐 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말에서 사람이라는 말 속에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란 [살]이란 말과 [암]이라는 말이 합쳐서 된 복합명사입니다. [살]이란 우리의 육체, 살덩어리를 말합니다. 어렸을 땐 보드랍고 젊을 때는 팽팽하며 늙으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살입니다.  

2년 전에 미국의 어떤 사람이 사람의 살덩어리를 값으로 따진다면 얼마나 되겠는지 계산해 보았습니다. 어머니가 낳으시느라 수고하신 것, 키우시면서 사랑 주신 것, 교육을 위해 쓴 물질적인 것,옷 입히고 먹인 것등 18세 까지 모두 합해서 통계를 내보니 우리나라 돈으로 자그만치 1,500만원이라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시골에서 황소 한 마리에 50만원이라니까 황소 20마리에 해당되는 엄청난 값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의 살덩어리만도 이렇게 비쌉니다. 그러니 집에서 아이들 듣는데 돈 없다고 하지 마십시요. 아이 한 명이 1,500만원이니까 자녀를 가진 부모는 모두 부자입니다. 나는 아이들이 넷이니 항상 6,000만원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늘 아이들에게 [너는 돈으로 따져도 1,500만원이나 가는 굉장한 사람이야. 그뿐인가 생각할 수 있는 마음과 영적 은사 그리고 믿음 등을 따지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단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람의 재산은 놓으면 놓은 대로 가만히 있고 땅은 땅대로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딸의 재산은 자꾸 크고 배우고 깨달으며 나중에는 하나님을 그 마음에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굉장한 사실입니다.  

[암]이란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기하고 똑같은 후손을 번식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짐승을 말합니다. 소나 닭을 보고 여자 소, 남자

하지 않고 암소, 숫소 또는 암탉, 수탉이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쓰이면 [어머니]란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머니들에게 자녀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암'이란 말이 어머니가 아기를 낳아서 젖을 못 주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1938년 일제치하에서 자랐는데 그때만 해도 아기에게 젖을 줄 수 없어 걱정하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시골에서 목회를 할 때였습니다. 아내가 첫 아기를 낳았는데 건강한데도 젖이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교회 집사님이 나무를 하나 가져 오셨는데 그 나무는 논에다 물을 댈 때 물이 흘러가도록 통나무에 흠을 파서 도랑처럼 만든 것으로 이것을 도끼로 쪼개어 불을 피워서 미역국을 끓여 먹으면 젖일 잘 난다고제 아내에게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젖이 안나는 어머니들은 쌀을 잘 씻고 쇠붙이에 닿지 않게 나무 방망이로 찧어서 깨끗하게 씻어 죽을 정성스럽게 쑤어서 여기에 설탕을 넣어 젖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아기에게 주었는데 그것을 '암죽'이라 불렀습니다. 암죽은 [어머니의 죽]이란 뜻입니다. 이렇듯 우리나라 말에서 사람이란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그 어머니로부터 태어나셨고 그 어머니는 또 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셨듯이 이렇게 자꾸자꾸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간의 근원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살덩어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형제나 친족을 살붙이라고도 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사람과 관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가장 좋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맺은 좋은 관계로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과 잘못된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될 수 없고, 하나님과는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는데 사람들과 나쁜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성립될 때 사람들과도 바람직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이 바로 진실한 크리스챤의 생활이며 상담의 목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상담을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이라 생각하면 인간관계 중에서 우선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부터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이란 말을 하나로 줄이면 삶이 되는데,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우리가 바로 사는 것이 신앙이고 올바른 삶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상담의 목표이며 원리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과 상담의 목표는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나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는데 이 말은 나와 다른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 그것부터 생각하려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은 자기와 자기와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가라]하면 가고 [먹자]하면 먹는데 왜 나와 나와의 관계가 잘 안되는지 이상합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이것이 잘 나와 있는데
로마서 7장 21절이하에 사도 바울은 고민하고 걱정하기를 [내 속에는 두개의 법이 있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마음이 있는 반면 또 하나의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우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결심해도 살다가 보면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수가 있습니다. 몹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괴롭다.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을 내가 어떻게 고칠 수 있겠는가?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따라가고 진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있는데 이것을 못하게 하는 마음이 다른 한편에 있습니다. 기도하고 결심을 해도 무엇인지 반대로 끌고 가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죄의 힘입니다. 이 죄의 힘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의 믿음입니다. 내 결심으로, 내 힘으로 안 되며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통해서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담이란 이렇게 갈라지려는 마음과 역행하려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고 하나님 뜻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 바로 상담이 다루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나와 나와의 관계가 잘 안될까요?  

창세기에 보면 아담과 이브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먹고, 쓰고, 사용하라 하셨는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이브에게 다가와서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함께 먹었기 때문에 둘 다 죄인이며 둘 다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혹의 내용입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무엇이든지 하실 수가 있는데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의 이름이나 짓고 먹으면 먹고 쓰라면 쓰는 것이 고작이니 하나님처럼 만들어 보고 하나님처럼 전능해지고 싶었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같이 되고 싶었습니다. 따먹고 나니 눈이 밝아지긴 했는 진리를 찾는 눈, 하나님의 뜻을 밝히 보려는 눈이 밝아진 것이 아니라 자기의 벗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는 것 밖에는 더 나아진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만이 그러한 유혹을 받고 그들만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합니까? 성경의 역사를 보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처럼 돼보겠다는 것을 비롯하여 이런 유혹이 종종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대 과학자들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아기를 만드는 것까지 하려고 하는 무서운 세상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혹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하고 있지 않은지 또는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하고 있는지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아침에 세수할 때, 거울 앞에 가서 제 모습을 비쳐봅니다. 여러분도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자세히 보십시오. 우선 제일 위에 있는 머리칼을 보고 머리결은 보드라운지 또한 색깔은 마음에 드십니까? 이마를 볼 때 좁으면 어떻고, 넓으면 어떻고 이렇듯 말이 많은데 적당한 멋이 있습니까? 눈썹도 올라간 사람, 처진 사람 등 여러 가지입니다. 저는 눈썹이 올라갔는데 어렸을 때도 눈썹이 반달같이 생겼으면 하고 바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썹 모양을 마음에 들게 하려고 화장을 하기도 합니다. 또한 눈을 보면 시력이 좋은 사람, 안경을 껴야 하는 사람, 눈이 작은 사람, 눈썹 사이가 너무 넓은 사람, 좁은 사람 등 가지각색입니다. 코를 보아도 콧구멍이 너무 들리면 들창코, 코 끝이 너무 뾰죽하면 매부리코 등등 말이 많습니다. 입술이나 귀, 목에 대해서도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 내 얼굴이고 내 모습이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고치고 싶은 것이 더 많습니다. 나쁜 아니라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다 좋은 것 같아도 살다보면 약점, 결점, 부족한 것 등 모두 고치고 싶은 것 투성이입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고쳐야 하고 저 사람은 저것을 고쳤으면 좋겠고, 고치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얼굴을 보며 자기 스스로 못마땅해 하고 남편도, 아내도, 자녀도 모두 못 마땅한 것 투성이입니다. 자기 얼굴을 볼 때 하나님께서 세계의 40억 인구 중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얼굴로 주신 것을 감사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하라고 짝지어 주신 내 남편,내 아내를 감사하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자녀들의 잘 하는 것 보다는 못하는 것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들 중 밤잠도 자지 않고 공부를 하는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젖혀놓고 공부만 하기 때문에 공부를 잘 하지만 노래는 형편없이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한 가지 재능만 주셨기 때문에 저는 그 잘하는 것만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얼굴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녀, 내가 사는 집 등 나의 모든 조건을 있는 그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변화가 오며 자신이 생기게 됩니다. 비록 돈이 없어도, 못 났어도 자신이 생기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장점이나 단점을 다 받아들일 때 남의 결점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심리학자들은 [수용]이라 부르는데 이는 [얼굴을 받아 들인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자기 얼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선을 볼때, 상대방이 마음에 들어 사랑하고픈 마음이 생기게 되면 다 좋게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이것저것 들추어내며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생각하고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다고 할 때도 큰 사람에 비하니까 작은 것이지 그 사람에게는 알맞은 키이며 그 사람은 최선을 다해 큰 것입니다. 사람의 생긴 그대로 다 받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며 내 마음이 잘못된 것입니다.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내가 나 자신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타인과의 관계도 올바로 맺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몇년 전 제가 아주 시골의 탄광 근처에서 목회를 할 때 조그만 단칸방에서 등잔불을 켜고 살았습니다. 한숨만 크게 쉬어도 꺼지는 등잔불 밑에서 설교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허름한 집일망정 불평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만족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세 가지 마음을 주셨는데 그 첫째는 어버이의 마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소꼽놀이하는 것이나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면 자기도 어린 아이면서 엄마, 아빠의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다 자기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그 마음이 자라서 진짜 엄마, 아빠가 되어 고통을 무릅쓰고 아기를 낳고 희생적으로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버이의 마음은 부모들이 자녀를 어떻게 양육하였는가에 따라 그대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화가 나면 밥을 안 먹거나 자기 머리를 벽에 부딛치기도 하며 심지어는 옷을 찢는 경우도 있는데 어린이들은 부모들의 이런 것을 그대로 닮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자녀들의 행동에 미치는 부모의 영향은 이처럼 큰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의 신앙생활을 자녀들이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의 잘못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가 지는 것입니다.

어버지의 마음에는 비판하려는 마음과 양육하려는 마음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비판하려는 마음이란 좋다. 나쁘다, 된다, 안된다 등을 판단하는 마음인데 화가나면 이 마음이 자꾸 나옵니다.  

국민학교 아이들의 학부모의 경우를 볼 때 수,우,미,양 가로 매겨진 성적표를 받아보고 성적이 나쁜 경우에는 마구 야단을 칩니다. [이 바보야, 이것을 공부라고 했니!...] 한참을 야단하고 난 다음에는 이상하게도 자기 신세 한탄을 합니다. [아이구,내가 저 녀석을 위해서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입고 뒷바라지를 해 주었더니...]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고 나면 현장에 없는 아버지를 끌어 들입니다. [네 아비를 꼭 닮았으니 네가 무슨 공부를 잘 하겠니....] 이러한 야담을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몇천 번을 듣게 됩니다. [그래,나는 아버지를 꼭 닮아서 공부를 못하는데 왜 나보고 공부 잘하라는 거야?] 하면 화를 내고 반항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저주하고 폭언하고 비판하는 말은 곧 잊어버릴 것 같아도 머리 속에 나쁜 말은 나쁜 말대로, 좋은 사람은 좋은 말대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시험볼 때 잘 생각하고 심각하게 풀어야 할 문제가 생기면 머리 속에 녹음된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나면서 [에이, 내가 공부는 해서 뭘해] 하는 마음이 생겨 그냥 되는대로 하고 맙니다. 기쁘고 즐거웠던 소리, 은혜 받은 말도 평생 잊지 못하지만 가슴을 쑤시고 상처를 주고 저주하던 목소리도 항상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게 됩니다.  

정신 분열증에 걸리면 귀에서 왕왕거리는 소리 때문에 자꾸 떠든다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이것을 [마녀의 소리]라고 합니다. 마녀의 소리로 자녀의 머리 속에 기억될만한 말을 하지 마십시오. 비판할 때도 아이에게 자꾸 손가락질을 하게 됩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또는 선생님이 아이를 내려다보면서 야단치는 것을 보면 사랑이 없는 것처럼 느낍니다. 또 화가 나면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그 말이 아무리 자비롭고 잘 되라는 말이라도 아이들은 큰 소리로 야단치는 어버이를 싫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자꾸 깎여 나가고 조금 있던 믿음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양육하는 마음은 떠받들어 주고 싶고, 일으켜 주고 싶고, 뭔가 자꾸 채워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양육하는 마음은 잘 한다.못한다고 하지 않으며 아이의 입장을 변호 해주면서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도와주어야 하는지, 어떻게 해주면 더 잘할 수 있는지 아이에게 물어봅니다. 그 아이의 키에 맞게 허리를 구부려 시선을 마주치게 하면서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부모나 양육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평등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이들은 부모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속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키우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를 낳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똑같이 닮은 모습, 복잡한 형상이며 그 자라나는 과정 또한 신비롭기만 합니다. 자녀들의 올바른 성장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육하는 마음, 어버이의 마음으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어른의 마음이 있습니다. 어른의 마음이란 양심이 명하는 그대로 결정하고 따라가는 마음, 생각하는 마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혈연, 지연 관계로 인해 아는 사람에게 표를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뽑는 마음이 어른의 마음입니다. 상담에 있어 심리학적 지식이 없어도, 어려운 책을 읽지 않았어도 괜찮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어버이로서, 형제 자매로서 내 사랑하는 이웃,내 피를 나눈 형제에게 말하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말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풍향계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듯이 말에도 방향이 있습니다. 강아지나 고양이가 예쁠 때 머리에서 꼬리를 쓰다듬아 주면 털에 윤이 나고 기분 좋아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쓰다듬어 주면 털이 부스스 일어나며 기분 나빠합니다. 털을 쓰다듬는데도 방향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쓰다듬어 줄때도 이마로부터 정수리로 쓰다듬어 줍니다. 이처럼 무엇이든지 방향이 있듯이 사람의 말도 방향을 잘 타지 못하면 말이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가 독소가 되어 상처가 되고 해를 끼치는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려는 마음이 다 사라지고 복음을 받아들인 마음도 일그러집니다. 말의 방향은 참 중요합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사람은 복음을 증거해야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말을 많이 하므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잠언10;11).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15:22
)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이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15:28)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언25:11
) 고 했습니다. 이처럼 말은 해야 할 것이 있고 안해야 할 것이 있으며 방향에 있어서도 해야 할 사람과 들어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 산에 기도하러 가실 때 세 제자에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가셨는데 내려와 보니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려 했으나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이든 것을 아시고 비판적 마음으로 야단치시지 않으셨으므로 제자들은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잘못한 아이에게[할래, 안할래?] 라는 식으로 묻는다면 야단맞는 아이의 대답은 뻔한 것입니다. 그것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서 하는 대답에 불과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깨달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셨기에 위대한 것입니다. 만일 제자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것은 핑계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들어야 할 말이며 예수님이 하실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지도자가 할 말을 백성이 하고 백성이 할 말은 지도자가 하면 선생님이 할 말을 제자가 하고 목사가 할 말을 평신도가 하기 때문에 혼란이 일어나고 질서가 파괴되며 감정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말은 신앙적으로 성숙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했던 말들을 한 번 기억해 보십시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가 난다고 어떤 말을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한마디 때문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까지 예수를 위해 살았습니다. 그 깨닫게 하는 말씀 한 마디 한마디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로써 의견을 나타내는 것은 누구나 잘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보다 말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말은 말씀이 되어야 하고 그 말속에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속에는 감정이 있어 기분이 나타납니다.  

어느  교회의 교인 한 사람이 잘 나오지 않아 제 아내보고 가서 권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목사님께서 자매님이 교회를 잘 안나오셔서 걱정하세요. 목사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데 왜 안 나오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저요? 이젠 기분 나빠서 안 나갈래요.전요 기분 나쁘면 천당도 안가요. 저를 기분 나쁘게 한 사람 천당가면 전 안가겠어요]이렇게 말하면 서로에게 상처가 됩니다.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기분 나빠서 천당에도 가지 않겠다고 말하면 그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기분 내키는대로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 미문 앞에 앉은뱅이 거지가 앉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돈이나 던져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단 한번만이라도 일어나 보았으면 하는 한 맺힌 소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일 년이 가고, 십년이 흘러 포기하면서도 어떻게 한 번 일어나 볼 수 없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돈 던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제3의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제3의 거듭난 입으로 말하며 제3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그 가슴 속에 있는 근본적인 소원임을 알았습니다.
베드로
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손을 내밀었더니 그가 벌떡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혀가 말을 해서 소리를 내게 되니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이 되었습니다. 몸이 일어나니 그 마음도 변화되고 새 사람이 되어 새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침을 받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상담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증거하는 힘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상담입니다. 멀리 가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전에 내 슬하에 있는 자녀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십시오. 이 말씀이 자녀들의 공부 문제, 절망, 갈등 등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게 됩니다. 믿음을 심어주며 하나님을 역력히 볼 수 있는 지혜도 줍니다. 비판적 어버이의 마음은 되도록 억제하고 양육하는 어버이의 마음을 가지도록 노력하십시오. 자녀하고 말할 때도 허리를 숙여서 자비와 사랑이 담긴 마음으로, 가슴을 활짝 열고 뭔가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대하도록 하십시오. 적절한 말 한마디가 사랑을 불러 일으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말하나 우리가 생각하는 식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일상으로 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부르짖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동력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상담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노력할 때,여러분의 자녀들은 새로이 변모할 것입니다. 가정문제도 해결되고 사회문제도 세상의 모든 문제도 모두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상담은 내 말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하는
말씀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절이란 무엇인가?    
예절에서 실질적인 것을 간단하게 몇 가지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예절의 규정은 1) 몸을 닦고, 2) 사람과 사귀고,3)사회에 처하고,4) 神과 富를 섬김에 있어서 이치에 합당하게 하는 것 이것이 예절의 근본 理가 됩니다. 즉 이것은 지나칠까 조심하고, 모자랄까 근심하며, 힘써 중정(中正)에 합치도록 하는 노력의 행동화를 의미합니다.  
서구적 예절의 뜻은, 전통적인 제어와 관습 안에서 사람과의 접촉을 교절한 것,그래서 동양의 예절은 혼자 있을 때에도 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지 못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사생활이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이때는 사람 앞에서 하는 것 같이 행동이나 말조심, 몸조심을 안해도 좋으므로 개방사회, 개방시간을 가질 수 있고 신을 생각지 않는 것이 서양 예절의 범위입니다. 이러한 대개의 뜻이 동양과 서양 예절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혼자 있어도 삼가한다는 것이, 혼자 있을 때는 그냥 내버려 둬도 좋다는 서양과는 다르다는 이점을 우리가 지적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절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으로는
(1) 마음가짐 (2) 말씨 (3) 몸가짐이 있는데
이것에 대해 잠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1.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할까?
우리 신변의 어려운 사람 앞에서, 모셔야 될 어른 앞에서, 체면을 지켜야 할 사람 앞에서, 제일 먼저는 손위 어른,아버님,어머님,시아버님,시어머님,할머님,할아버지,시할머님,이러한 분들 앞에서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되느냐? 첫째로, 희로애락을 억누르는 일입니다. 이것이 동양 예절의 근본사상입니다. 그래서 동료 간끼리는 앉아서 무슨 기쁜 일이 있을 때는 화기롭게 [하하하]하고 큰 소리로 웃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른 앞에서나 체모를 차려야 할 바깥사람이 계실 때에는 그렇게 웃지를 못합니다. 이 말은 웃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의 적극적인 표출을 삼가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기쁠 때 기뻐하고 노여울 때 노여워하고 슬플 때 슬퍼하면서도 일면 억누르는 태도, 이것이 교양이요.이 자체가 바로 예절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단적인 것을 몇 가지 더 표현해 드리면, 어른 앞에서 내외가 서로 부르질 못합니다. 결혼한 여자의 경우, 시아버님,시어머님,시할머님,시할아버님이 계신 앞에서  
[여보, 당신은 오늘 바쁘세요?]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옛날의 우리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부르긴 불러야 되므로 남편 곁으로 슬며시 가서 작은 소리로 [저좀 보세요]그럽니다. 그렇다해도 시아버님,시어머님이 다 압니다. 그렇지만 [여보!]하고 큰 소리로 부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데 - 부엌이나 마루나 건넌방으로 건너간다든지 해서 거기서 마음 놓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음놓고 얘기하는 것은 시할아버님, 시할머님, 시부모님께서 눈치를 채도 좋습니다. 다만 그 앞에서 희로애락의 적극적인 표출을 삼가는 것뿐이지 내가 기쁠 때 기뻐하지 않는 목석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은 아니지요. 또 하나,좋은 실례가 되는 것으로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무릎이 벗겨졌을 때입니다. 마루 위에서는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손자가 귀엽게 노는 것을 보고 계신데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시다가 보니 아이가 넘어져 무 릎에서 피가 납니다. 그러면 그 며느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예절에 맞는 행동인가?얼른 가서 부둥켜 안도
[아유 가엾어라 우리 강아지! 여길 이렇게 다쳤으니 이걸 어떻게 허나 어유 피까지 나오고...]  
이렇게 하지를 말고 부엌에서 작은 소리로 [일어나! 일어나! 이리 와, 이리 와]
하면서 손짓을 합니다. 그러면 시할아버님, 시할머님이 [아, 어서 가 일으켜 주어라] 말씀합니다. 그때는 일으켜 줘도 괜찮은 허락이 내린 것이니 벌떡 일으켜 안아가지고 부엌으로 들어옵니다. 부엌에 들어와서는 [어유 가엾어라 얼마나 아팠니?]
엄살을 떨어도 좋은데 시부모 앞에서는 그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시부모가 예절 차리고 교양 있는 시부모 같으면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아가! 그 뭘 하고 있느냐? 애기가 넘어졌구나, 어서 가 일으켜 주어라] 그러시는 분이 시아버님, 시어머님이십니다. 또 어떤 시아버님, 시어머님은 얼른 뛰어 내려 와서 손자를 손수 일으켜 데리고 가셔서 닦아주고 약 발라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럴 적에는 며느리 되는 사람은 모른 척 해버립니다. 소위 이러한 방법이 희로애락의 표출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신신공부를 하셨고 또 여기 계신 대부분의 자모님도 고등교육을 받으신 분들만 계신 것을 잘 압니다만 불행하게도 여러분의 시부모님은 옛날의 유교사상,불교사상이 약간 있습니다. 또 우리나라 교육가들의 얘기를 들으면 우리나라 사람의 지금 기본 사상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20% 정도의 유교영향, 15% 정도의 불교영향,7-8%정도의 기독교 영향을 받은 것이 한국 사람의 현재 사회적인 의식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한국
사람이 美를 보는 것, 생활양식 하는 것, 몸가짐을 하는 것,걸음을 걷는 것. 물건 하나 장식을 하는 것. 등이 그러한 사상이 지배를 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두 기독교계에 계시지만, 아무래도 이 사회가, 우리의 사회 전체가 옳다고 하는 기준은 유교의 영향이 들어가 있고,불교의 영향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구식사상을 가진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앉아계신대 그 앞에서 요새, 신식으로 교회를 다니고 ,대학을 나오고 고등교육을 받고 학교 선생 노릇을 하고 하는 며느님의 태도가 왜 그런지 마음에 안듭니다. 그래서 찌뿌드둥하게 보고 있고 그저 뭐 말은 못하고 밖에 나가서 선전은 못하지만 내외분이 혼자 있으면  [거 며느리가 사람은 성격이 착한데 도무지 어른 모실줄 몰라...] 한탄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마음을 가지신 듯 하시면 여러분이 물론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은 다 하셔야 되지만 그 시부모님의 뜻을 맞춰드리는데 약간 마음만 쓰면, 사람의 감정이란 간사한 것이어서 곧 부함이 돼서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나를 귀한 며느리로 위해주는 때가 곧 오고야 만다하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외끼리도 얘기를 할 때, 큰 소리로 얘기 하지 않습니다. 가령 둘이서 자기 자녀에 대한 어떤 못마땅한 점에 대해 얘기를 할 경우,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계신데 며느리가 큰소리로. [내버려 둬요.여보! 왜 그리 자꾸 그래요! 그러면 애가 자꾸 버릇이 나빠져요] 이렇게 큰 소리를 어른 앞에서 하는 것은 어른 대접이 근본적으로 아니다 라고 어른의 감정은 거기에 숨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시아버님, 시어머님이 계시므로 조용조용하게 [내버려 두세요.괜찮아요 뭐 어떨라구요. 너무 그렇게 걱정마세요]
이정도로 부부가 얘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부를 때도 크게 못 부르고, 말도 크게 못하고, 웃는 것도 크게 못 웃고 그러나 웃을 때는 웃어야 되고 기쁠 때는 기뻐해야 되고 슬플 때는 슬퍼해야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 슬픔과 그 기쁨이 표출해서 적극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그것이 곧 교양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령, 무슨 잡수실 것, 고기, 혹은 별미,진미가 생겼다 했을 때 우선 시아버님,시어머님께 갖다 바치고 남편, 자녀 생각은 안하는 그런 태도로 상에 놓아 시부모님께 드립니다. [이웃에서 잔치가 있다고 뭘좀 가져왔군요] 그러면 원래 교양이 있는 부모-교양이 없는 부모 같으면 자식의 예절주의를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교양이 있는 부모는 [아 그것 두었다 애비 주고, 애들 주거라. 아 우리 늙은이가 뭘 그걸 먹겠니] 그러면서 하나, 둘 정도 접어들고 내 놓는 게 교양 있는 부모입니다.
그러니까 교양 있는 부모 노릇하기도 어렵지만 교양 있는 며느리, 아들 노릇하기는 한층 더 어렵습니다. 아랫사람의 위치가 언제나 어려운 걸로 돼 있습니다. 그런 데에도 마음을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2. 바른 말씨 사용에 대한 예(例)/
요새 와서 사귀는 젊은 남녀,결혼을 했거나 아니했거나 상관이 없습니다만 가령 대학생 남녀가 어쩌다 데이트를 몇 번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이분이 장래의 내 배필감'이라 정하고 말도 함부로 하게 되어 [어디가? 오늘 바빠?]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장래의 배필로 생각지 않게 되면 이름을 부릅니다. 가령 [복희씨][철수씨]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심지어 더 서먹할 때는 붙여 [김철수씨][이복희씨]이런 식으로 서로 부르다가 ' 이사람은 내 배필감이다' 정하여 남 안보는 데서 은밀한 애정표시도 가한 사이아 되었을 때면 남의 앞에서 하는 말이 대개 이렇습니다.  
[자기 오늘 바빠?] 이 [자기]라고 하는 말은 벌서 16-17년에 새로 생긴 말이 됩니다. [자기]라는 이 말의 출처는 원래 [이몸]이라고 하는데서 파생이 되었습니다. 가령,[김철수]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3자인 그[김철수]가 지금 이 자리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정희]라는 사람하고 [김철수]에 대해 얘기를 합니다.
[김철수씨 그분 인품이 참 좋더군요. 재산 모두를 자기 자녀들이 아닌 불우이웃 돕기에 써달라고 기탁했대요] 이럴 적에 제3자를 [김철수]로 부르고, 다시 되짚어서 내가 그를 호칭할 때 [자기]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우리말의 바른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남녀가 서로 상대를 보고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어법상 크게 틀린 일이므로 사용을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허물없는 젊은 남녀의 경우,상대방 호칭을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우리 조상은 이럴 때 처소격 대명사인 [거기-You),[여기 = I]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거기, 오늘 바쁘지 않아?] [응 나? 오늘 바쁘지 않아]
[여기도 오늘 바쁘진 않은데...] 이래서 [거기][여기]로 통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허물없는 남녀의 대화로서 [거기][여기]가 통하는 것이지 옛날의 귀한 양반집 자제들은 깍듯한 말씨로 [도령께서] [낭자께서]라는 존칭어를 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반드시 이성을 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만 해도 반드시 이성간의 호칭은 [000씨]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때는 또 아주 친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남자끼리도 서로 [하오]로 통했고 여자끼리도 그랬습니다. 그러던 것이 어떻게 해서 요새 이토록 많이 변했는지 요즘에는 남녀가 대개 반말 아니면 [해라]로 통합니다. 강의를 들으시는 여기 어머님들께서도 아드님, 따님이 계시거든 [거기][여기]가 우리 조산이 줄곧 수천 년 동안 쓰던 말이니 국어사전에도 없는 [자기]라는 틀린 말을 쓰지 말도록 바르게 일러주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시조부모님 앞에서 시부모를 칭하는 말입니다. 나보다 더 높은 직계존속 앞에 덜 높은 직계존속 즉 나의 시아버님, 시어머님을 시할아버님, 시할머님 앞에서 어떻게 말을 하느냐? 예를 들어 시할아버님, 시할머님이 손자며느리에게 이렇게 물어올 경우, [응접실에 애비 있니?] 이 말은 응접실에 너의 시아버지가 있는지 알아보아라 하는 말입니다. 또 그쪽에서 며느리를 부를 때는 자녀가 있거나 없어도 [아가]로 부르나 나이가 40-50이 지나면 [아가]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어미야]하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었어도 소생이 없었으면 늙었어도[아가]로 부르다가 환갑이 지나면 [며늘아]이렇게 부릅니다. 이 호칭은 달리 붙일 호칭이 마땅치 않을 때에 붙이는 마지막 호칭이며 보편적으로는 [어미야]라고 부릅니다.  [어미야! 응접실에 가서 애비 있나 보아라] 여기서 [어미야!] 라고 부른 것은 손자에 대한 [어미]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자칫 착각과 혼동이 올 수가 있습니다.(시아버님을 애비라고 부르시면서 손자며느리인 나를 어미라고 부르면 혹 항렬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나에게 대해선 손자를 생각해서 [어미야!]부르는 것입니다.  [아비, 응접실에 있나 보아라] 물으셨으므로 [네]하고 대답한 후 시아버님을 찾아 보고나서 시할아버님, 시할머님께 이렇게 보고를 드립니다. [애비는 지금 응접실에 없어요]그럽니다. 자기 시아버님을 보고 [애비]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절입니다. [그러면, 부엌에 가서 에미 있나 보아라] 여기서의 에미는 물론 시어머님입니다. [네,에미는 부엌에 있어요. 조금 아까 보았어요] 그럽니다. [그럼 가 오너라 해라]그러면 가서 [어머님, 할아버님께서 부르세요]이렇게 말을 합니다. 설령 자기 시아버님이 듣고 있어도 시할아버님이 앞에 놓인 어떤 것을 보고 [이것 어디서 났니?] 물으면 [애비가 주었어요]애비라고 합니다. 시아버님이 아무리 옆에 있어도 시아버님을 시할아버님 앞에선 [애비]라고 해야 됩니다. 이것은 참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령 어느날,가족회의에서 [말을 제대로 쓰는 법에 대한 강연을 들으니까 우리 집안의 호칭이 안된 것 같다. 우리 집안의 호칭을 앞으로 고치자] 하는 가족회의를 한번 거치시면 어려워도 될 줄 믿습니다.  

3. 바른 몸가짐에 대해서/
어른 앞에서의 몸가짐, 특별히 체면차려야 할 분 앞에서의 예절 갖춤에는 구용(九容)이라 해서 다음과 같은 아홉 가지가 있습니다.  
(1)口容止/ 입은 다물어야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벌써 3,000년 전,
중국주나라 때 세워진 예절입니다만 오늘날에까지 동양이나 서양에서 똑같이 통합니다. 5.16혁명 전,정치가(장면)씨의 정치고문으로 있던 서양인 [웨디카]씨가 동.서양 예절을 상호 비교하는 저술작업을 한바 있는데 이 아홉가지 구용을 번역하면서 감탄한 것이 있습니다. 동양과 서양의 예절이 너무나도 잘 부합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외구에서도 예절을 가르칠 때, 여기 구용에 있는 내용과 똑같이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2) 目容端/
눈이 흰 동자만 나오게 되는 경우를 삼가라는 뜻입니다. 가령 누가 [00씨]하고 뒤에서 불렀을 때, 자칫 머리만 젖혀 힐끗 쳐다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태도는 실례가 되며 반드시 뒤로 돌아서서 정면으로 쳐다보고 아는 척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응접실에 훌륭한 그림이나 글씨가 걸려 있으면 그것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간혹 여성들은 얌전한척 하느라고 다소곳하게 제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보고 싶은 그림을 슬쩍슬쩍 곁눈으로 잠깐씩 훔쳐봅니다. 이렇게 비스듬히 사물을 보게 되는 경우, 눈의 흰동자가 보이게 되어 종종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하게 되는 일이 있습니다.  
(3)手容恭/
어른 앞에서 손의 자세를 공손히 가지라는 뜻입니다. 바람직한 자세는 즉 왼손으로 오른손의 마디를 잡고 오른손 엄지 손가락이 배꼽 아랫전에 닿도록 하면 팔은 약간 구부러지는 정도가 되는데 이것이 어른과 대면할 때의 자세입니다. 어른께서 말씀을 하실 경우에는 혹은 옷고름 맨 곳에 두고 다소곳이 고개 숙여 있되 어른이 새로 말씀을 시작하실 때,잠깐 쳐다보고 내가 말씀드릴 때 잠간 쳐다보는 정도로 하여야 되며 너무 빤히 쳐다보거나 전혀 고개를 수그리고 있거나 하는 태도는 예절에 어긋납니다.  
(4) 頭容直/
다소곳한 곳은 좋아도 그밖에 아무 각도로도 구부러지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어른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말씀을 드리거나 머리를 갸웃거리는 태도를 삼가라는 것입니다.  
(5)聾容/
어른 앞에서 목청을 돋구지 마라. 큰소리로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6) 氣容熱 /
군자는 숨소리, 기침소리, 재채기, 한숨쉬는 소리도 삼가한다는 뜻입니다.  
(7) 立容德/
어느 다리든지 한 다리에 체중을 싣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어른 보는 앞에서라면 잠깐 서 있는다 해도 꽂꽂이 두 다리로 서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바지를 입었을 때는 괜찮지만 스커트를 입었을 때에는 발 뒷굼치 길이가 땅에서 15cm 이상 떨어지지 말도록 가르친다고 합니다.  
(8) 色容粧/
얼굴빛을 온화하게 가지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항상 그 낯빛을 부드럽게 가지면 집에서 기르는 짐승조차도 그것을 알아보고 반응이 벌써 다릅니다. 인간관계에서는 하물며 더 말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9) 足容重/
발의 모습은 무겁게 가져야 된다는 뜻입니다. 어른 앞에서 발을 까불거나 건들건들하는 버릇,괜히 길 가면서도 돌뿌리를 톡톡차는 일 등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인데 이런 행동은 전혀 경박해 보이므로 삼가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상의 내용이 어른 앞에서 갖춰야할 [아홉가지의 몸가짐]즉 구용이라 해서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예절입니다.

/행복한 가정의 7가지 열쇠/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기 위해선 무엇인 필요할까. 점점 파괴되어가는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 기독교가정에서 지켜야 할 것들은 무엇일까.  
지난(94년) 4월 27일 한국교회평신도지도자협회 주최로 열린 제10회 평신도지도자 주최로 열린 제10회 평신도지도자 초청 세미나에서 양은순교수( 명지대)는 [신자의 성경적 가정생활} 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한 7가지 열쇠를 제시 눈길을 끌었다.  
양교수가 첫번째로 제시한 열쇠는 '성숙',남편과 아내과 육적으로는 성숙했으나 영적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많은 문제가 생긴다. 성경적으로 볼 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는 것이
아담
의 고백이었으나 죄때문에
아담이 하와를 원망하게 된것처럼
오늘날도 부부간에 서로에게 죄를 전가함으로써 부부사이에 금이 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미숙한 사람이 성숙해지기 위해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분리된 자는 죽은 자다.  
두번째 열쇠는 '복종' 양교수는 "피차 복종하라"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하나님의 명령이나 부부사이엔 아니가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를 사랑했을 때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복종은 남편이 꼭 잘나서가 아니라 남편이기 때문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못할 때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세번째 열쇠는 '사랑' 하나님께서 남성을 흙으로 여성을 남성의 갈비뼈로 창조한 것은 남성이 여성을 소중한 존재로 여기도록 한 것이라 양교수는 지적했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할 의무가 있고 이 사랑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닌 실천적인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의 사랑은 가장 사랑스럽지 못할 때, 지겹게 느껴질 때 사랑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애기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베드로전서 3장 7절
에 나와있듯이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 *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기 때문
* 하나님의 부탁
* 여성이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네번째 열쇠는 '대화'
양교수는 최근 이혼 사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대화의 부족임을 지적하면서
대화는 혈액순환 이라고 강조했다.
혈액순환이 안 되면 신체의
기능이 마비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화는 기술이 필요한데
먼저 듣는 기술이 필요하다
상대방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우선돼야 한다.
양교수는 부부간의 대화를 아름답게
이끌어갈 천국방언 4가지를 소개했다.

* 미안해야 * 괜찮아요 * 고마워요 *
사랑해요. 괜찮아요 라는 말속엔
용서의 뜻이 포함돼 있다.

우리나라 부부들은 " 사랑해요"라는 말에 매우 인색한편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게 사랑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다 아내는 작은 것에 감동하기 때문에 "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부부간의 대화를 촉진시키는데 큰 촉매제가 된다는 것이다.  다섯번째 열쇠는 '기도' 기도가 없는 가정은 지붕이 없는 집이라고 양교수는 말했다. 기도는 겸손의 표현이며 축복의 통로,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가 하나되어 기도하는 가정을 찾고 계시기에 기도는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끌어가는 귀중한 부분이다.  여섯번째 열쇠는 '말씀' 우리가 매일 가정에서 육의 양식을 섭취하듯 영의 양식인 성경말씀도 가정에서 섭취해야 한다.  일곱번째, 열쇠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없으면 가정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가정이라는 배를 성공적으로 운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가정의 배를 운행할
수 있도록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생활의
근본적이면서
마지막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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