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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06-09-28 22:33:56, Hit : 1186
Subject   반드시 고향같은 마을이 있다

 분명히 고향 같은 마을은 있다.

정열이 없는 삶의 구가를 보라 그것은 구멍난 풍선과 같다.
이미 실패를 전제하고, 슬픔을 내포하고
허무의 쓴잔을 마셔야 하도록 마련되어 있다.
가슴 벅찬 정열을 안고 삶에 철저 하려는 값비싼 노력.
이것이 농부의 인격이다. 가장 큰 재산은 용기와 정열이다.

젊음의 새빨간 피는 태만을 용서치 않는다.
다만 우주를 향해 도전하려는 무사로서의 기백과 무장을 갖추어야하며 적과 대면하고 있는 절박한 현실의 주인공임을 자각할 것을 요구한다. 생명의 성장과 번식을 방해하는 일체의 냉혹과 무시와 경멸, 비웃음과 무관심의 추방을 위해 생명을 다할 정열과 참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분명히 고향 같은 마을은 있다.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마을. 서로를 섬기고 존중하는 마을. 서로가 그리워서 달도 눈물나는 마을 . 서로를 초대하려 해가 크게 웃는 마을.

아이들은 나이 먹는 게 자연스러워 멋진 노인 된 자기를 꿈꾸고,
서로에게 어머니 되려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
모두가 가슴깊이 그리는 마을은 있다.

그런데 현실로 그런 마을은 없단다.
그러나 현실로 그런 마을에 살고 싶다.
그러면 현실로 그런 마을을 만들어야지.
 

    

고향이 있는 자만이 참으로 현재를 살 수 있고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창문은 모두 고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심히 창문을 열지 않는다면 바로 그 창으로 고향을 볼 수 있고 고향을 들을 수 있고
고향을 냄새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은 창문 너머에만 있는 게 아니고 창문 안에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하여 고향의 일은 고향에 가서만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고향은 지나가 버린 과거로 남아 있는 게 아니고 다시 살리고 아름답게 하고 따뜻하고 밝게 가꾸어야 할 현재로 숨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이 있는 자만이 망각의 늪 속에 파묻힌 지난 날을 되찾고 기억의 한 끝에 매달린 가냘픈 사건을 살려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향이 있는 자만이 참으로
현재를 살 수 있고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옥수수와 고추가 자라고 있는 밭에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냅니다.
따사로운 한 낮 뻐꾹새 우는 소리에 귀가 멍멍할 즈음 후투티 한 마리가 날아와 듀엣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뻐꾹 뻐꾹 뻑 뻐꾹 훅훅크 훅훅크 훅크 살짝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후투티 얘는 머리를 수그리고 소리를 내고 머리를 쳐듭니다.

웃통을 벗어 알몸인데도 일을 하니 땀이 흐릅니다. 그 때 한 아름 바람이 내 몸을 흝고 지나갑니다. "아 ! 어머니가 보내주신 바람이구나" 시원한 바람 ! 고마운 바람! 나는 밭일 할 때마다 땀을 식혀주는 바람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내주신 바람이라 믿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무조건 사랑하십니다. 준 하나님이라 할까요?
어머니가 있는 곳이 고향이기에, 내 찾아갈 곳이 고향이기에, 어디에도 어머니가 안 계시기에, 내가 어머니 될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봅니다. 후투티는 날아갔지만 푸른 하늘에 흰 구름 한가로히 풍요롭습니다.

행복은 말의 영역이다.    

말로 웃지 않은 웃음은 생리적인 웃음이고
말로 울지 않은 울음은 생리적인 울음입니다.

만일 생리적으로만 웃고 운다면 사람은 얼마나 초라하게 되겠습니가.

말로 웃지 않은 웃음은 혼자서 웃는 웃음이고
말로 울지 않은 울음은 혼자서 우는 울음입니다.
만일 혼자서만 웃고 운다면 사람은 얼마나 뒤틀리게 되겠습니가.

말로 웃고 울어야 인격으로 웃고 울게 되고
말로 웃고 울어야 함께 웃고 울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말로 행복해야 합니다.
행복은 말의 영역입니다.


말은 너와 나의 약속이기에 네 말 내 말이 따로 없습니다.
친구들은 같은 말에 같이 웃고 친구들은 같은 말에 같이 웁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말로 삽니다. 성실한 사람은 성실한 말로 삽니다. 어두운 사람은 어두운 말로 삽니다. 추한 사람은 더러운 말로 삽니다. 우리가 어제의 말로 아파하는 것은 반성하는 오늘을 살기 때문이며 꿈꾸는 말에 함께 기뻐하는 것은 내일의 행복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살리는 일이 삶을 살리는 일이며
말을 빛내는 일이 삶을 빛내는 일입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분되는 중요한 기준은
사람을 위하여 정성으로 말하는 사람과
자기를 위하여 말을 수단으로 쓰는 사람으로
갈라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정의 뒤에 숨은 긍정처럼 강한 것은 없다.  

부정의 뒤에 숨은 긍정처럼 강한 것은 없다. 여기에 진실한 자의 애소가 있는 것이다. 부정을 위한 부정은 일그러진 감정을 지닌 자들의 장난과 같은 것으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긍정을 위한 긍정을 할 수 있을 만큼 평화로운 곳도 아니다. 이것이 지성인의 고민이며 진실한 자의 슬픔이다.

그래 신뢰와 사랑과 존경이 깃든 보람찬 삶을 마련하고자 몸부림치는 성실한 자들이 가야 할 남은 길은 긍정을 위한 부정이 된 것이다.

무엇을 연상해도 좋다. 너와 나라는 작은 관계에서 국가에 이르는 큰 범위까지 무엇을 연상해도 좋다.

너무도 많이 기대에 어긋났던 일들이 슬픈 경험으로 남아 있다고만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나 별로 틀리지 않게 적용되는 말이 될 것이다. 여기 숨은 소원이 이룩되는 날을 위하여 안타까운 노래는 끊이지 않고 또 끊이지 말아야 한다.

쓰레기가 쌓이고 냄새가 나쁜 동네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1)운명이라 체념하고 산다.
2)나중에 다른 동네에 가서 살 생각으로 돈을 모으며 버틴다.
3)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면서 내가 쓰레기 버리는 이유는 정당하다.
4)산소 마스크를 쓰고 예쁜 색안경을 쓰고 산다.
5)조금이라도 꾸준히 쓰레기를 치우고 꽃을 심는다.

사람이 천대받고 서로를 미워하며 사람보다 높은 것(경제, 이념, 종교...) 때문에 싸움이 끊임없는 지구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요?
1)사람은 별수 없다고 체념하며 살아간다.
2)나중에 다른 세상에 가서 살 생각으로 꿈만 꾸며 버틴다..
3)다른 사람들보고 화를 내며 나도 사람을 깔보고 미워한다.
4)내게 유리한 사람들만 골라 사기며 필요 없는 사람은 버린다.
5)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려 제3 공간을 예쁘게 꾸민다.

 "네"의 자리는 지금도 "아니오"를 배출해 내고 있는 우리네 삶의 현장이다.  

지금 우리는 "네' 보다 "아니오"가 훨씬 많은
그래 "아니오" 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도 "네"의 자리는 저 산 위도
피안도 은신처도 피난처도 아니다.

"네"의 자리는 지금도 "아니오"를 배출해 내고 있는
우리네 삶의 현장이다.
그래 외롭고 힘겹다 그래도 길은 있다.

"아니오'는 날카롭고 빠르다.
아주 작은 틈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전체를 점령한다.

무엇으로 "아니오"와 대적할 것인가.
그럴만한 것이 있을 것인가.
변명까지를 포함해서 역사는 언제나 "아니오'와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패배하여 오히려 '아니오'를 양산했다.
"아니오"와 맞설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법도 묘약도 없다.
오직 말씀만이 "아니오"와 맞설 수 있는 방패요 창이다.
말씀으로 무장하라.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세상이 어둡고 살아가기가 힘들다.
사람은 믿을 수 없고 무섭다.
이런 말이 정론처럼 떠돈다.
안다는 사람들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지혜라고 가르친다.
나이든 사람들은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이런 것을 경험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런 어둡고 힘든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지혜라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덜 속고 사람들을 잘 속이는
방법을 경험을 통해 가르친다.
이런 모든 것이 강하게 부정되어야한다.

새로운 말이 정론으로 번져 나가야 한다.
세상은 밝고 살아가기가 신난다.
사람은 그립고 아름답다.
살아가는 날들이 이 말을 세우기 위해
모든 좋은 것이 모아져야하며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가 있다는 것이
모든 속임수의 뿌리임을 가르쳐야 한다.

경제를 위한 사람.
정치를 위한 사람.
사회를 위한 사람.
교육을 위한 사람.
종교를 위한 사람에서

사람을 위한 경제.
사람을 위한 정치.
사람을 위한 사회.
사람을 위한 교육.
사람을 위한 종교로.

늙은이는 성숙한 젊은이    

문맹은 글씨를 못 보는 사람이 아니라 글씨를 안보는 사람입니다.
젊은이와 낡은 이의 구분도 잘 살펴야합니다. (늙은이는 성숙한 젊은이입니다.)

나이가 많아져서 낡아지는 게 아닙니다.
새로워지려 하지 않으니 낡아지는 것입니다.
알려고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고
보려고 하지 않으니 낡아지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끊임없이 낡아진 자기를 깨고
새로운 자기를 세우는 자입니다.
언제나 새로워지려는 자가 젊은이입니다.

80세에도 젊은이가 있고
20세에도 낡은이가 있습니다.

 

마음이 드러날 때까지 쉬임없이 되돌려야 한다. 

결과만을 가지고는 진상의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그런 결과를 일으킨 원인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모든 결과에서 원인으로 되돌아갈 때 어느 선까지 가야 합니가.
마음이 드러날 때까지 쉬임없이 되돌려야 합니다.

마음이라는 데 이르면 이제부터 되돌아가야 할 지점이
지금까지 되돌아옴보다 더 멀고 아득합니다.

그래야 참으로 문제를 바로 보게 됩니다.
그래야 참으로 사건을 바로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사고가 일어납니다.
불행히도 우리의 역사는 사건사가 아니라 사고사입니다. 참으로 역사가 가능하려면 소위 역사시대보다 훨씬 더 깊고 폭 넓은 신화시대가 있어야 합니다.

큰 사고가 또 벌어졌습니다. 모든 사고를 살펴봅시다. 사고를 저지른 자의 말을 들어봅시다. 사고를 저지르게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말을 분석합시다.

사고가 날 때마다 이유가 다르고 또 사고만큼 이유가 만은 것 같습니까? 이유를 들어보면 화가 나서, 종교가 달라서, 가난해서, 과시하고 싶어서....... 결국 자기 확대가 짙어집니다.

도처에 소가 있는데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지 않고
소의 색깔이 탐스러워 소를 잃었다든지
트럭에 소가 실리지 않게 만들 자던지 하면 되겠습니까?

사고란 무엇입니까? 사람을 괴롭히고 죽게 하는 것 아닙니까?
사고를 저지른 자나 사고를 저지르게 하는 사회는 사람됨과 사람 위함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생각이 있는 사람은 에비 범죄자이고
이런 사회는 범죄 온상지인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모든 가치의 정상에 사람됨 사람 위함을 두고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우리의 인성을 형성시켜 나간다면 사고는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너를 괴롭히기 이전에 '아 ! 너도 나와 같지 !" 하는 제동장치가 몸에 배이고 괴로운 문제로 막가고 싶을 때에도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이 버릇되어있으면 결코 사람을 해쳐서 자기의 괴로움을 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몇 푼의 이익을 위해 불량 공사 같은 것도 없을 것이고..

가해자도 남이 아니고 피해자도 남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고 또한 피해자입니다.
모두 무섭고 분노하는 하루에 머물지 말고
나부터 정확히 진단하고 치료합시다.

'서로 사랑하라 !"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 !"
평범한 생활 언어가 되도록 나를 연마하겠습니다.

 

거듭나야 합니다(2편)   (1편)에서 계속됩니다.
강아지로 태어나, 새처럼 날려고 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한번 강아지는, 영원한 강아지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겉으로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내면에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육을 가지고 영의 길을 따르려 했던 것이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있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있었으며 하나님을 위한 열정도 있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고민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늘을 날수가 없는 것이었다.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다. 거듭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야 한다. 육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열심은 무엇인가? 노력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무엇인가? 금이 되려면 금광석으로는 안된다. 용광로에서 녹아져야 하고, 제련소에서 다시 정금으로 거듭나야 한다. 우리의 열심도 ,갈망도, 의지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영으로 태어나야 한다.

한번은 걸러져야 한다. 육으로 난것은 육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가 될수 있다. 제련되지 않은 금은 사용할수 없듯이 영으로 나지 않은 육은, 언제나 벽에 부딪치곤 한다.

쉽게 한계를 만난다는 것이다. 주를 향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고 주를 향한 열정이 식은 것도 아니고 주를 향한 사랑이 변한 것도 아닌것 같은데 막상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려 하면 커튼이 가리운다.

무엇인가 가로 막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의 육을 가지고는, 결코 주님을 온전히 따를수가 없다. 우리의 육을 가지고는, 영의 일을 감당할수가 없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을 입히우기 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셨다. 할수는 있으나, 무익하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주를 위하여 규모없이 분주하다는 것은, 성령의 권능이 약하다는 증거일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베드로야 너의 육으로는 나를 위하여 죽을수 없단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을 몰랐다. 영을 모르면, 누구나 자신을 모른다. 그래서 용감한 것이다. "무슨 말씀이냐고,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펄펄 뛰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 하셨다.

"베드로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라" "네가 할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새벽닭이 울기전에 나를 배신하는 것이다"

그렇다. 육으로 할수 있는 것이 하나있다. 주를 떠나고, 배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결심하지 않아도, 우리의 육으로 할수 있는 것은 많다. 미워하고, 원수를 저주하고, 불평하고, 상처주고, 의심하고, 원망하고, 혈기부리고, 낙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심하고 노력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 주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이다. 희생하는 것이다. 한알의 썩어지는 밀알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결심과 의지와 노력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육은, 몇 걸음 못가서 발병난다. 우리는 경험한다. 예배 잘 드린 사람이 화를 벌컥 낸다든가. 기도후에 짜증으로 충만하다든가, 은혜가운데 살다가 갑짜기 어둠에 사로잡힌다든가...
이것이 우리 육의 실체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007이다. 교회에서는 영의 사람으로 온순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육의 사람으로 화평을 깬다.

더 나아가, 육의 실체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각을 통하여 말씀하시기도 하시지만, 생각에 빠지면 사단이 틈을 탄다. 우리의 거듭나지 않은(영의 터치가 없는)생각은, 하나님의 뜻을 알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육의 생각대로 결정하고 선택할 때가 많다. 생각을 깊이 하여 떠오르는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판하는 경우이다. 영의 사람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 필요없다는 뜻이 아니다. 생각을 영이 주관하게 하라는 것이다.

이러므로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육이 강할 확률이 높다. 생각이 많으면 번뇌도 많다고 전도서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영의 코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내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할수 있다.

우리는 가끔 기막힌 아이디어에 사로잡혀 흥분할 때가 있다. 그러나 갑짜기 떠오르는 생각이나, 아이디어를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수상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기도중에, 그리고 말씀 묵상을 통하여 알수 있게 된다.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수 없다고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다. 육의 생각은 언제나 불안하고, 장애물이 많게 마련이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평안이며 가능성이다. 대부분 어둠과 절망은, 생각을 통하여 침투한다. 영의 통제를 벗어난 생각은, 언제나 위험하다. 나의 영혼을 그르칠수 있기때문이다.

기도도 영으로 해야 오래하고 바르게 한다. 육으로 기도 할수는 있으나, 언제나 기복이 심하며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나 영으로 기도하면 내가 기도를 시작하지만, 성령이 기도를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된다. 육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알수 없다.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을 영으로는 알 수 있다. 직관(영적센서)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래서 육으로 기도할때와, 영으로 기도할때의 기도제목이 다르고 기도 자세가 다르다. 아무래도 육으로 기도하면, 정욕으로 마무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을 구한다. 영혼을 위하여 울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새가 될수 있나? 모든 노력과 의지와 결심을 멈추고, 은혜 앞에 항복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믿어오던 패턴을 벗어버리고, 은혜의 강가로 나아가야 한다. 나를 개선하려 힘쓰지 말고, 나의 모습 그대로를 가지고, 하나님의 주권앞에 굴복해야 한다. 다 이루어 놓으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주님이 하신 일들을, 인정하고 받아드려야 한다. 내 공로나 지금까지의 수고를 억울해 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라도 다시 태어 나야 한다. 육은 육이다. 영으로 다시 거듭나야 한다. 강아지로 있으면서 날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새(bird)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조차도 우리의 육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할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우리의 할일은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이다.

또한, 갈망하는 것뿐이다. 주님을 도우려 하지 말라. 주님이 다 이루신 일들을 깨닫고, 인정하고 항복하는 것이다. 몇년차 교회를 출석함이 영이 아니다.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림이 영도 아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통채로 달라 하신다. 오늘도 예배를 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접붙임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더 나아가 날마다 그리스도의 나무로 부터 흘러 나오는 영양분을 공급 받고 있느냐가 풍성한 삶을 위한 결정적인 요소이다.

미국 사람이 될려면,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아무리 노력을 하고, 공부를 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큰 부자가 되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사람으로 태어나면, 저절로 미국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이다.

가지의 할일은, 그냥 나무에 붙어 있으면 된다. 포도밭에 있다고, 포도 열매를 맺을수는 없다.

교회 안에 있다고, 기독교인으로 살아 간다고, 종교성이 강하다고, 포도나무 가지가 될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포도나무 되시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교회에 붙어 있으면 안된다. 목회자에게 붙어 있어도 실망한다. 사람에게 붙어 있으면 성처 투성이가 된다. 우리는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는 길이며, 주님을 따라 가는 길이며, 하늘을 나는 새의 삶이 되는 것이다.

속상해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속상해도 혹, 내가 강아지(?)로 믿어 왔는지를 냉정하게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다면, 인정하고, 오픈하고, 다시 새로 태어 나기 위하여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 오순절날 성령을 갈망했듯이 말이다.

무엇을 하려고, 너무 집착하거나 조바심 내지 마라
하나님의 일은, 성령 받는 것이다.
주님께 붙어 사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원하신다. 통채로 말이다. 그리고 나의 돈이나, 일이나,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달라 하신다. 거듭난 마음 말이다.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통채로 드려지는 마음이 있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이다. 영으로 하나님의 뜻을 쫏아 드려지는 기도가 신령한 기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재물이나 헌금이나 의로운 행위에 배부르다 하신다. 이제는 우리의 상한 마음, 진실한 마음, 정결한 심령을 달라 하신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보좌에서 왕되기를 원하신다. 나를 독점하기를 원하신다.그러나 아직도 주님은 우리의 내면 깊은 곳에서 종으로 계신다. 겉으로야 왕이시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코드는, "마음을 달라"는 것이다. 조금도 빠뜨리지 말고 통채로! -푸른 초장-


'감동의 힘'   

세상은 '힘의 감동'을 믿지만 시인은 '감동의 힘'을 믿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가슴을, 영혼을, 진실을 우리들 마음 깊은 곳의 울림을 믿고 거기에 가 닿고자 몸부림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고, 살아낸 만큼 쓰고 싶었고 쓰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싶었습니다. - 박 노 해 -

가장 큰 감동의 무기는 "진실"
주여! 오늘도 순간마다 진실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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