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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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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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1-11-14 11:14:22, Hit : 37
File #1    행복을_전염하는_사람이_되자.hwp (39.0 KB)   Download : 1
Subject   행복을 전염하는 사람이 되자
/행복을 전염하는 사람이 되자/        
감정은 전염됩니다.
희망도 전염되고
절망도 전염이 됩니다.
희망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희망적인 사람이 될 수 있고
절망적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절망적인 사람이 됩니다.
고사성어에 먹을 가까이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을 가진
“근묵자흑(近墨者黑)”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물이유취(物以類聚)”
라는 말도 있고,
같은 무리끼리 서로
내왕하며 사귄다는
“유유상종(類類相從)”
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처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한패가 되어 절망하면
생각도 전염되고
기분도, 태도도
전염되게 되어 있습니다.
감기만 전염되는
것이 아니라
절망도 전염이 됩니다.
심리학 용어에 “전염현상”
이라고 말합니다.
코미디 프로를 보면
가짜 웃음을 삽입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짜 웃음을 삽입시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더 재미있게 보며
웃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스미스는 가짜
웃음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40명의 남녀 대학생들을
통해 실험해 보았답니다.
가짜 웃음이 삽입된
것을 들었던 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학생들보다
더 자주 웃고(19회:6회)
,더 오래 웃었으며(19초:5초),
코미디 내용을 더 재미있다고
(93점:75점) 평가했답니다.
수십 년 동안 웃음에 관한
연구를 해온 메릴랜드대
라버트 프라빈스 박사는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때보다는
여럿이 함께 있을 때
평균 30배 정도 더 많이
웃는다고 주장했습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은 전염된다(니컬러스
크리스태키스, 제임스
파울러 저)>에 의하면
행복도 전염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1만 2067명을
추적해서 행복의 생성,
확산 관계를 연구한 결과
'3단계 영향 법칙'을
제시하였습니다.
사람들은 3단계의 거리
안에 있는 사람,
즉 친구(1단계),
친구의 친구(2단계),
친구의 친구의 친구
(3단계)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행복할 경우,
1단계(친구)가 행복할
확률은 약 15% 더 높아지고,
2단계는 10%,
3 단계는 약 6%이고,
4단계에서는 거의
사라진다고 합니다.
1020명의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 네트워크
내에서 불행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있고,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들끼리 함께
모여 있었답니다.
'3대 33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긍정적인 소식이 3명에게
전파되는 데 반해
부정적인 소식은 33명에게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행복해 지려면 행복한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 성경은 신앙인을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 신33:29)라고 말씀합니다.
행복한 신앙인과 함께
있으면 행복해 집니다.
신앙인은 행복의
전염자가 되어야 합니다.
/병아리/    

얼마 전 교회에
병아리가 깨어나왔습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온 것입니다.
암탉이 달걀을 3 주 정도
품으면 달걀과는 전혀
다른 차원을 사는
병아리가 되어 나옵니다.
어미 닭은 달걀을 품다가
어느 날 그 안에서 어떤
소리를 듣는다고 합니다.
그때 바깥에서 어미 닭이
그 껍질을 쪼아 깨어주면
그 순간 안에서 삐약 하며
병아리가 깨어나온다고 합니다.
계란에서 막 나온 젖은 병아리는
엄마 품에서 얼마간 있으면
깃털이 말라 뽀송뽀송한
노란 병아리가 되어
'뼝뼝뼝' 자기 노래를
하며 엄마를 종종종 따라
자유롭게 다닙니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이 깸의 신비!
깨어남의 놀라움!
예수님의 지구 방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인간의 행복'
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에도 사람들은
공부하고 출근하고
경쟁하고 싸우고
심지어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어쩌면
행복하게 살려고,
행복을 쫓느라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행위만으로
인간은 행복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통찰이셨습니다.
이미 고장난 존재라는
것이지요. 곧, 존재의
변화 없이 행하는 것은
행할수록 곤고에 빠지고
그런즉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은 다시
태어나는 존재의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생각이 바뀌어 일요일에
교회가는 것?
결심을 통해 행동 몇 가지
고치는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모자 바꾸어 썼다고
새 사람 되는 것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깨어남입니다.
깨어남은 달걀이 자기
껍질을 깨고 나와
병아리가 되는 것입니다.
달걀은 갇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병아리는 자유롭습니다.
달걀은 자기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병아리는 자기
소리, 제소리를 냅니다.
달걀은 스스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병아리는 자기 스스로
오고 갈 수 있습니다.
달걀은 하늘도 못 보고
땅의 소리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달걀은 갇힌 존재입니다.
그러나 병아리는 열린 존재입니다.
깨어난 병아리는 자유요
자존이요 자립이요 자생입니다.
깬 병아리는 통일이요
독립이요 자유입니다.
깬 사람은 자기 존재가
무엇이며 혹은 무엇이
아닌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자기가 누구이며
혹은 아닌가를 압니다.
깨어난 사람은 왜
내가 네가 아니고
나일 수밖에 없으며,
이곳 저곳이 아닌 바로
여기에 있는가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아닌 자기를
살고, 그 어느 곳도 아닌
여기를 지금 삽니다.
현재와 실체, 현실을
산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바로 현실 속에
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대의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불편하다거나 근심,
걱정, 불안이 있다면
그것은 졸고 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잠자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대의 생각
속에나 있는 것이지요.
현실로 나오는 것,
자기 품에서 환상에서
깨어 나와 지금 여기를
사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거듭남입니다.
이곳 논골재에 여름이 가고
초가을이 오면 여지없이 닭들을
채가는 날짐승이 날아옵니다.
닭들이 너무 조용하고
어떤 낌새가 있어 닭장에
올라가 보면 높다란 나무
위에 솔개라는 녀석이
노리고 앉아 있고,
닭들은 쥐죽은 듯이
나무 숲에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때 기계에서 인공으로
깬 병아리들은 솔개가 떠도
잘 숨지 못하고 허둥대다
솔개의 밥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어미 닭이 품어서
깬 병아리들은 본능적으로
잽싸게 피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했는데,
한 실험 결과 부화기에
달걀을 넣어 놓고 3주 동안
꼼짝 않고 그대로 있다가
깬 병아리는 저항력과
자생력이 아주 떨어져
많이 죽게 됩니다.
그나마 기계 속에서라도
여러 번 굴리고 돌려
놓은 달걀에서 나온
병아리들은 저항력과
자생력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암탉이 달걀을 품는
모양을 눈여겨 보십시오.
달걀들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안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안으로,
좌로 우로 수없이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합니다.
이렇게 깬 병아리들은 거의
죽지를 않고 힘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저항력
과 특유의 적응력이
있어 잘 자라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손으로가
아닌 발로  사랑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믿음이야말로 고난을 고난처럼
여기지 않는 삶의 해석이요
이해요 신비입니다
. 고난은 나를 나되게
하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편안함은 사람을 즐겁게
하지만, 고난은 사람을
잠에서 깨워 줍니다.
암탉이 달걀을 깨려고
이리저리 굴리듯이,
하나님께서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이모
저모로 굴리고 계십니다.
깰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발로 굴리는 사랑을
하십니다.깨어날 때까지,
그러나 사람들은 깨어
일어나는 것보다는 예나
지금이나 꿈꾸는 게 더
좋고 잠이 더 좋은가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 품을 버리고
자꾸만 달아났습니다.
인간 스스로 더
빨리 깨치려고
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쉽게 깨어나
보려고 한 것일까요?
인간들은 하나님의 품-
무위(無爲)를 버리고
기계의 품-인위(人爲)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
된 일'을 누리지 못하고
'될 일'에 매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자기 일인 양
착각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은총이 아닌
자기 의로 살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옳음에
빠진 사람들은 아는
것에 빠져 그 아는 것으로
판단하고 분별합니다.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괜찮고 괜찮지 않고,
자기 옳음의 잣대로 재고
나누니 판단이 생기고
비교를 하고 경쟁을 하고,
그런 것에서 나온 것이
폭력, 살인, 전쟁,
공해, 생태계의 파괴,
인간 소외, 공통체 해체,
행복은 인간 스스로 옳다
함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의를 넘은 하나님과
함께함에 있습니다.
행복을 헬라어로
유다모니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남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 행복을
알아차리는 영성의 발견입니다.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심정으로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양으로 손짓하고 노을로
은밀하게 부르십니다.
봄에 나오는 푸른 초록의
새 옷으로 옷깃을 잡아당기고
지는 낙엽 소리로 돌아오라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며
기다리십니다.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심정을 아는
사람은 어른입니다.
성숙이요, 완숙입니다.
교회는 이런 '깸'의 현장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사업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권력이나 세력 형성을
위해 있는 기관도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바로 거듭남의 현장인
하늘 아버지의 품이어야
하겠습니다.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고  타락했다면 저는
이 거듭남을, 깨어남을
건너뛴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는 윤리나 도덕을
내포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종교는 삶의 신비를
느끼게 하는 그 무엇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삶이라고
하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집짓고 하는'
사업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철저히 사람이 다시
참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는 영성 공동체입니다.
저는 그런 모습으로의
회복을  요청받고 있음을
확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현재 지구인 모두가 문명의
엄청난 변화 속에서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공해의 위협, 전쟁의 공포,
인간성 소멸에 대한 아쉬움,
자원의 고갈, 이런 때에
죽임이 없는 삶을 느끼게 하고,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하늘 구원을 맛 보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살지만
그 세상에 속하지 않는
교회상을 구현한다고 할까요.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치고
고발하지만 집착하지 않습니다.
수용과 자기 고백으로
고장난 밑마음을 치유합니다.
치유의 경험을 통해 삶을 느끼고
사랑의 세계를 살게 합니다.
경쟁과 소유, 속도와 소리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하늘의 참
평안을 느끼게 하는 삶을
가르치는 교회상을 그려 봅니다.
저는 그것을 '교회의
우주화'라고 하지요.
혹시 오늘 우리 교회에서
거듭난 존재라는 자각이
없는 달걀과 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병아리의
삶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고 싶습니다
. 교회 생활이 재미없고
신앙이 짐이 되고
부담스러운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차원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달걀 시절에 가졌던 가지가지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병아리가 되어 보니,
문제가 아니고 오히려
보고 즐기는 구경거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그랬습니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이제 전처럼 들리거나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보이고 잘 들리니
이해가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겨납니다. 그
래서 바울 사도도
믿음은 들음에서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내 생각으로
듣지 않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거르고
내 지식으로 판단하여
듣지 않습니다.
다 듣고 다 봅니다.
이제는 듣고 봄을 통해
오는 그 어떤 감수성,
성령의 인도에 나를 맡깁니다.
애벌레에게는 앞에 있는
돌도 문제요 냇가도 문제요
막대기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나비에게는
그런 것들은 이제
구경거리에 불과합니다.
애벌레는 날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기원하지만
나비들은 찬양합니다.
깨어나면 문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래 문제라는
것은 없었음을 보는
눈과 귀를 갖게 됩니다.
삶은 문제를 해결하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삶이야말로 문제라는
것들을 느끼고
나누어야 하는
신비인 것입니다.
삐약삐약삐약,
노란 병아리가
노래를 합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삐약삐약삐약,
노란 병아리가
찬양을 합니다.
다 좋다고,
깨어나 보시지요.
다 좋습니다.
정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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