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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10-04-24 14:28:55, Hit : 1629
File #1    sm20100425우리의_가능성이_끝난_자리에서.hwp (48.5 KB)   Download : 146
Subject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요21:15-17)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요21:15-17)2010.04.25.

96세 된 할아버지와 92세 된 할머니가  결혼 70주년을 맞았는데 ‘결혼 70주년 기념’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인터뷰 끝에 그 할아버지한테 아나운서가 짓궂은 질문을 하기를 "만일에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 부인하고 결혼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할아버지는 가만히 있더니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요" 대답이 시원치 않아요. 그런데 할머니보고 묻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면 다시 이 남편과 결혼하겠습니까?" 했더니 대답이 전혀 다릅니다. "내가 돌보아 주어야죠." 사랑한다 안 한다, 결혼한다 안한다가 아니고 저 사람에겐 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도와줘야 되지요"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처럼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사랑이 에로스냐 아가페냐 이건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 이론입니다. 그러나 쉬운 일입니다. 에로스라는 사랑은 항상 나를 중심합니다. 나를 위해서 저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게 저가 필요하고 내가 저를 돕고 그래서 사랑의 이름으로 자식을 괴롭히게 되기도 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남편 못살게 하기도 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아내를 죽이면서 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가페라고 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 상대에게로 중심이 옮겨가고 그에게 맡깁니다. 오늘 성경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했는데 사랑하는 그것마저도 당신이 안다는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에 보면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나의 운명, 그에게 있고  내가 당하는 현실, 주님의 사랑 안에 있습니다. 그 만이 아신다' 하는 겸손한 고백이 있는데 베드로가 말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전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가 쓴 책 중에 '살아있는 신앙'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 중에 지미 카터가 한평생을 지향했던 그의 좌우명이 나옵니다. 그의 좌우명은 이렇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인데 이 좌우명을 선택하게 된 사연이 있습니다. 그가 해군장교가 되기 위하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 바로 직전에 그 유명한 해군 제독 릭오버 제독과 함께 면담할 기회를 가졌는데 제독께서 이 젊은 사관에게 전술과 전략 그리고 군인의 자세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질문을 했습니다. 이 젊은 사관은 땀을 흘리면서 벌벌 떨며 대답을 했습니다. 얼마 이야기한 후에 화제를 좀 부드럽게 바꾸면서 말씀하기를 "공부는 재미있었는가? 성적은 어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지미 카터의 성적이 괜찮았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점수와 등수를 말씀드렸더니 제독께서는 다시 묻기를 "그 성적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하고 물으니 카터는 식은 땀이 나면서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최선을 다했는가?"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대답하기를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 그때 제독은 무섭게 쏘아보며 다시 질문을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대답을 못하니 다시 물었습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묻고 있지 않느냐?" 그는 더더욱 대답할 수가 없었고 다시 생각하기를. ‘최선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최선이란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딴 생각 없이 자신이 하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았는가? 얼마나 그 하는 일을 즐겼는가? 혹이라도 불평하던가 원망하던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면 그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얼마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즐겁게 생각하고 했느냐. 또 주어지는 기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이라도 원망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다면 그것은 최선이 아닙니다. 얼마나 충만히 감사했느냐. 시간에 대하여 건강에 대하여 지식에 대하여 기회에 대하여 주어진 능력에 대하여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도 최선과는 먼 거리에 살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기에 다시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다 살고 나서 주님 앞에 서는 날, 너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주님께서 내게 물으실 것인데  그 두려운 질문이 가슴에 꽉 차게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업적이나 실적, 성적이 좋으냐? 나쁘냐? 몇 등이냐?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문제는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 하는 이것이 인생을 질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양적인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느냐?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 여러분! 주님 앞에 가서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 앞에는 실적이나 업적은 아무 상관이 없으며 문제는 주어진 현실 여건 속에서 내가 얼마나 최선을 충성을 사랑을 다했느냐, 그것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께서 질문하시는 아주 엄숙하고 중요한 질문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베드로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어주었던 반석이라고 하는 그 유명한 이름, 베드로라고 하는 그 이름이 아니고 낮추어서 원점으로 돌아가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생애를 같이하면서 깊이 생각해 보면 여러 번  말과 행동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지만 결정적인 것으로는 세 가지 실수를 하는데 그 첫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준비하려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 베드로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깨어 기도하라. 했는데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죄 가운데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지셨지만 기도 없는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은 베드로가 약하거나 상황이 잘못된 것도 아니며 기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깨어 기도하지 아니한 죄가 결정적인 죄요 실수입니다. 두 번째는 그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예수님 저 앞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 저 뒷전에 앉았다가 어린아이가 나와서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요 예수님의 제자…" 아니라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두 번째는 맹세하고 세 번째는 저주했습니다. 삼중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씻을 수 없는 실수이며 큰 죄를 졌고 큰 실수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예수님 부활하신 다음에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여러 차례 만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래도 나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도 죄송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도 무자격한 것을 알고 그는 갈릴리로 옛 생업을 따라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껏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탈감에 빠져있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저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가 본래에 받았던 사명의 길을 떠나서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것, 그 물고기 잡으러 갔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실수였습니까?  그런 가운데도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에 대해서 비판하고 원인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랬느냐, 어떻게 그 지경이 되었느냐? 라고 전혀 말씀하지 않고 딱 한마디 물으십니다.  "지금 네가 현재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 말입니다. 현재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 속에는 많은 말씀이 거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긴 원인분석적인 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야,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된 줄 아느냐? 네가 왜 이렇게 실수가 많고 이렇게 형편없이 된 줄 아느냐? 원인은 오직 하나, 사랑이 없기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같이 비참하게 되었느니라. 또한 현재 이 꼴이 우엇이냐? 3년 동안 메시아를 따라 다니고 다시 옛 직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왜 이 모양이 되었고 이런 실망이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이같은 하잘 것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 되지 않았느냐? 왜 이렇게 비겁한 인간이 되었느냐? 이고 또 하나는 네가 지금 미래를 걱정하는가 본데 예수님이 안 계시고 예수님이 안 계시는 가운데에 나는 무엇을 할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를 그냥 둘 수가 없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되나. 그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 왜 이 모양이 됐느냐. 이것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절망이나  두려움이 없고 좌절이 없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두려운 가운데 대답합니다. "아가파스메"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오이다 호티 필로세" 여기서는 "아가페?"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필로" 라고 대답합니다. "플레오" 라는 말은 프랜드쉽. 친구라는 뜻입니다. 친하다는 정도예요. '희생적 사랑을 하느냐' 하고 물을 때 '친구의 사랑정도 한다' 는 그 얘기입니다.. "아가파오세"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필로세"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 뿐이 아닙니다. 좀 더 내려가서 그 친구의 사랑마저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아신다고 하면서 주도권을 그리스도께 내드리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해진 것입니다. 감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겁니다. 저도 생각이 있기에 그러나 내가 이 지경이 되었지만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다시 주님께 위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는 말합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내 마음도 내 뜻도. 내가 지금 이 정도 입니다마는 주님은 아십니다. 내가 이 모습이요 처절하지만 주여 주께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아주 겸손합니다. 그 동안은 자기 중심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고 자기 출세를 위하여 자기 장래를 위하여 자기 영달을 위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장담을 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소리 고백했던 그 사람인데 이 시간은 그것이 아니고 이제는 아가페로 돌아갑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독선과 아집에서 떠나서 겸손과 헌신으로 돌아가며 자기를 완전히 부정하면서 주님 앞에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살아가기 위한 건강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자신의 감정을 극복해야 합니다. 현대인으로써 중요한 것이 감정 문제인데 이 감정을 방임하면 안 되고.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대부분사람들의  실수가 다  잘못된 감정을 내버려두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감정을 자기가 바로 통제할 수 있어야하고 또한 건강을 관리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절제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해야 됩니다. 무질서하게 살면서 건강을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건 미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을 잘 관리해야 될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경제를 관리해야 됩니다. 인간관계를 관리해야 됩니다. 그리고 시간을 정복해야 됩니다. 여러분 내가 시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주어진 시간을 정복한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최선으로 살고 낭비 되는 시간이 없어야 되고 꽉꽉 채워가지고 살아야 돼됩니다. "시간을 정복하는 것이 바로 인간을 정복하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시간을 무엇으로 다스리겠습니까? 사랑한 시간만이 시간이요 미워한 시간은 빼앗긴 시간이고 사랑으로 꽉 찬 시간만이 살아있는 시간입니다. 섭섭해 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면 그것은 다 낭비된 시간입니다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 주님의 일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조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제 대답하기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만이 아십니다." 아주 겸손하게도 신앙적으로 새로운 고백을 하게 될 때 주는 그에게 다시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 된다.

태양 앞에 어둠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수님의 눈앞에 어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의 권세 앞에서도 생명의 부활을 보여주신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옛날에 한 청년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여인은 사랑을 증명해 보라고 하면서 청년에게 별을 따다 달라고 하니까 청년은 별을 따다 주었고 다시 달을 따다 달라고 하자 달을 따다 주었으며 마지막으로 여인이 청년에게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달라고 하니까 청년은 고민하다가 어머니의 가슴속에서 심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여인과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며 어머니의 심장을 들고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심장이 저만치 굴러 떨어졌는데 언덕 밑에서 심장을 다시 주웠을 때 흙투성이가 된 어머니의 심장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얘야. 많이 다치지 않았니?" 이것이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마음이면서 또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인간은 참 이기적입니다. 기회만 있으면 "달라!"고 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장까지 달라고 요구해서 갈보리 십자가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여전히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어두워져도, 아무리 짙은 먹구름이 끼어도, 아무리 험난한 골짜기를 만나도 상관없습니다. 어딘가에 희망이 있다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그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절은 희망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우리의 영혼이 부활하고, 우리의 가정이 부활하고, 우리의 양심이 부활하는 날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분노가 치밀 때 성격적으로 참지 못하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인도가 있기 전에는 복된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은혜 받는 비결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성공의 제일 요소 중에 하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작은 약속입니다. 작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큰 약속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을 줍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뢰해준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자산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조그만 책임이라도 힘써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이 많이 있습니까? 누가 와서 "네가 정말 신앙인이냐?"라고 말한다면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도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하고 너무 양심적이어서 믿음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계속 만들어져 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와서 "왜 그 모양이냐!"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 다그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부족한 사람들끼리 서로 다그치면 남는 것은 갈등과 상처와 아픔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와 같은 모습으로 부족한 제자들을 다그치며 끌고 가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그 모습 그대로 용납하시고 한 단계 한 단계 제자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러한 겸손한 사랑과 용서의 기초 위에 오늘날 우리 교회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날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이 이 사랑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눈이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신비하게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또한 서로 감사의 말을 할 때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신앙인의 최고 인격이고,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삶이 없이는 행복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공동체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욕구불만과 시기와 질투를 가지면 절대 창조적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 아름다운 것이 많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겁고 영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이웃의 형편과 신앙과 사정을 살펴주는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 삶에 있어서 큰 의미의 행복과 축복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부자란? 돈이 있고, 차가 있고, 집이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남과 나눌 것이 있고, 나눌 마음이 있는 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누구일까요? 판자집에 살고, 돈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어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사실상 가난한 자일 것입니다.

물은 계속 퍼내야 샘 근원이 튼튼해지고 맑은 물이 더욱 생겨나듯이 우리도 소중한 일을 위해서 우리의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정으로 삶과 사물을 보는 변화된 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떠질 때 우리의 눈이 변화되면 이웃도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우리에게 시야의 변화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세상의 어떤 그 무엇도 우리의 행진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진은 언제나 해 뜨는 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하나님의 백성은 밤을 향하여 돌아가지 않습니다. 일이 좀 힘들고 고달프다고 해서 낙조를 향하여 엠마오로 가는 사람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식어버린 사람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이제 새벽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어둠을 뚫고 나가는 사람만이 새벽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됩니다. 신앙이란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끼면 하나님은 커지고 문제는 작아져 보입니다. 사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동안 잠들었던 마음이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분발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깨우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떨칠 수 있는 존재로 부활하시길 바랍니다.

슬픔의 터널을 잘 통과하고 나면, 이제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욕망으로 슬퍼하며 살던 존재에서 사랑으로 기뻐하며 사는 존재로 말입니다. 그렇게 거듭남, 그렇게 다시 태어남,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제 잠들었던 마음을 깨웁시다. 슬픔과 절망, 불확실한 자기의 미래와 불신앙의 터널을 통과하여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서 당당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경건의 삶을 사셨기에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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