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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09-08-29 14:19:54, Hit : 1632
File #1    sm20090830나의_삶의_방향과_속도는.hwp (50.0 KB)   Download : 146
Subject   나의 삶의 방향과 속도는?
나의 삶의 방향과 속도는? (약1:19-25) 2009.08.30.

방향전환과 속도조절

고속버스 터미널에 부산으로 가는 고속버스와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가 나란히 서있었습니다. 두 운전수가 나란히 탔습니다. 손님들은 모두 피곤한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자고 있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기사가 말했습니다. <광주에 다 왔습니다.>
손님들은 기절할 뻔 하였습니다. “우리는 부산 가는 버스를 탔는데요” 광주 까지 간 기사도 자고 있는 손님들에게 말했습니다. ‘부산 까지 다 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사가 바뀐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송건식 씨의 <지상에 별로 온 손님>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이 쪽은 날씨가 그 쪽보다 훨씬 냉해서인지 코스모스가 칠월부터 피기 시작하더니, 요즈음에는 아카시아 꽃이 다시 피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모두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지요?”

이런 현상을 굳이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비유하고 싶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때와 방향을 잃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서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상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그대로 있으면서 변화하는 세상을 탓하거나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으면서 안일한 태도를 취합니다. 제 정신이 아닌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자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힘든 환경을 만들어 가면서 다른 사람으로 자신이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본래부터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드는 정말 힘겨운 세상입니다. 때와 방향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다면 함께하는 사람들이 더욱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줄 수 있을 텐데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거부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방해꾼입니다.  

방향은 능력과 지혜입니다. 가다가 길이 막혀 있다고 할지라도 갈 방향이 정하여져 있으면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가야만 하는 길이기에 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그렇기에 방향이 정하여져 있는 사람은 지혜로워집니다. 장애물을 돌파하려고 하는 몸부림 속에 지혜는 탄생되게 되어 있습니다.

배고픈 쥐가 달걀을 보았습니다. 쥐는 어떻게 하든지 달걀을 가지고 가고 싶었습니다. 쥐도 지혜를 생각하여 내게 됩니다. 친구 쥐를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가 달걀을 안고 발랑 눕습니다. 그러면 다른 쥐가 꼬리를 물고 쥐구멍까지 갑니다. 그리고 깨드려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달걀 파티를 즐깁니다. 쥐도 다급하면 지혜가 생깁니다.

까마귀도 호도를 까먹습니다. 호도를 먹고 싶은 방향이 있습니다. 사람도 까먹고 쉽지 않은 호도입니다. 쥐는 호도를 물고 하늘 높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바위위에 떨어 뜨립니다. 그래도 깨지지 않으면 깨질 때까지 반복합니다. 드디어 호도가 깨지면 맛있게 호도를 먹습니다.

독일 베르린 막스 프랑클 연구소가 15년 동안 1,000명을 대상으로 지혜와 나이와의 관계를 연구하였는데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습니다.
1. 큰 역경을 극복할수록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다.
2. 가난한 환경에 자라서 아픔을 일찍 가졌던 이들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다.
3. 어려서부터 창조적인 생각을 한  두 가지 내놓았던 사람들이 늙으면 더 지혜로워졌다.
4.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정하여 놓고 인생을 고민하고 사는 이들이 더 지혜로웠다.
5. 고집이 세고 괴팍한 사람들은 늙을수록 지혜와 신용을 잃으며 살았다.
이런 결과 보고를 하였습니다.

방향이 분명하면 지혜가 생깁니다.방향이 분명하면 지혜가 생깁니다. 방향이 분명하면 속도는 관계없습니다. 방향은 점검이기 때문입니다. 방향이 분명하면 내가 어디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는 데 어디 쯤 와 있는 지를 점검하게 됩니다. 가면서도 어디 쯤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 지 수시로 알 수가 있습니다.

탈무드 이야기입니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는 데 마차를 만났습니다. 너무나 다리가 아파서 태워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마부는 기꺼이 타라고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나그네가 물었습니다. “내가 예루살렘 까지 가는 데 예루살렘까지 여기에서 얼마나 되나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이 정도 속도라면 30분 정도 걸리지요.” 나그네는 고맙다고 하면서 조금 푹 자고 일어나 보니 30분 정도 지났습니다.<예루살렘에 다 왔지요?>

마부가 말했습니다. “여기서는 한 시간 거리요.” “아니 30분 걸린다는 데 30분 오셨지 않아요?”마부가 말했습니다. “이 마차는 반대로 가는 마차입니다.” 방향이 잘못 되어 거꾸로 가는 나그네 이야기입니다. 방향이 분명하면 나의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방향을 정해놓지 않은 사람은 기회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방향을 정해 놓은 사람은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방향이 분명하면 속도는 관계없습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존슨대통령 재직 시에 국방정책을 총지휘하고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결정했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1994년 '회상,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이라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베트남전쟁에 대한 자신의 소견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서술했습니다. "베트남전쟁은 잘못되어도 매우 잘못된 전쟁이었으며 미국이 개입한 것, 역시 잘못된 결정이었다."

한 나라의 정책 방향을 어떤 성향의 사람이 결정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이 잘못된 결정 때문에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트남의 밀림에서 쓰러져가고 있었지만 머뭇거리는 동안에 방향전환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는 뼈아픈 탄식의 고백이었습니다.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있어서도 인생의 방향전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가 있습니다. 카톨릭 신문에 '알콜 탈출기'를 연재했던 허근이라는 신부가 있습니다. 그는 사제로 부름받기 전에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지만 사목활동을 하면서 교우들과 교제하면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술은 그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알콜 중독이 된 그는 사제의 직무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이를 보다 못한 선배사제의 "하늘의 주(主)를 택하든지, 땅의 주(酒)를 택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는 권면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다시 돌이키기 위한 수년 동안의 피 눈물 나는 술과의 전쟁을 벌여서 마침내 그는 술에서 자유를 얻고 이제는 알콜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그는 "술은 이슬비가 몸을 적시듯 서서히 나의 몸을 파괴했고 나의 영혼까지 파괴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술에서 자유를 얻은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술을 끊으니 꽃이 피는 봄이 보이고, 푸르름이 가득한 여름이 보이고, 오색 단풍의 가을을 느낄 수 있네"

여러분, 여러분은 인생의 방향을 올바로 잡고 걸어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방향을 올바로 선택하면 성공적인 삶을 살지만 잘못 선택하면 그 삶은 파괴되고 맙니다. 인생의 축복은 인생의 정 방향을 잡는데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지 않고 육체의 본능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 깊숙한 마음의 뿌리가 무엇에 맞닿아 있는지 주의 말씀으로 점검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삶의 깊은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어떤 유혹과 핍박의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도록 내 인생과 믿음의 깊은 뿌리를 반석 되신 주님께 내리십시오. 역사이래로 예수그리스도께 목적을 둔 사람들 중 잘못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이 행동하는데 있어서 빨리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고 더디 할수록 좋은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빠른 것과 느린 것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자동차가 빨리 달리는 것이 나쁠 때도 있으나 느리게 가는 것이 위험할 때도 있습니다.

이는 속도를 적절히 조절해야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적당히 조절할 줄 알아야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더디 해야 할 일과 빨리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마음속에 상고함으로서 겸허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자합니다.

본문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귀는 얼굴 양편에 두 개를 만들어 주셨지만 말하는 입은 하나밖에 만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만드셨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제 나름대로 이유를 찾았습니다.

첫째, 듣는 것은 많이 하도록 하기 위하여 두 개를 주셨고 말 하는 것은 적게 하라고 하나의 입을 주셨습니다. 둘째, 말을 들을 때는 한 쪽 귀로 한 말만 듣지 말고 양쪽 귀로 양쪽 편을 다 들을 수 있는 지혜를 가지도록 하기 위하여 양옆에 두 개의 귀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말은 오직 한 입으로 같은 말만 하도록 한 입을 주셔서 이런 저런 변덕부리지 않도록 한 입을 주신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남의 말을 건성으로 듣거나 한 쪽의 말만 듣고 속단하거나 자기만 혼자서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실수하고 맙니다. 그래서 잠언 17장에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다' 고 했으며 반면에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일수록 듣는 것을 많이 하고 말을 신중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말수를 줄이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 믿는 사라들을 가리켜서 "말이 많다"고 평합니다. 좋은 의미에서 그러한 말을 한 것이 아닌 줄 압니다.

말에는 언제나 사랑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남을 격려해 주고 축복해 주며 붙들어 주고 섬기는 말이 많아야 합니다. 특별히 남에게 충고할 때는 사랑의 충동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라야 비로소 그 사람의 마음을 감화를 일으키고 그 사람의 마음을 변화 시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랑이 동반되지 않는 충고는 그 사람에게 오해를 일으키고 헐뜯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충고 할 때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사랑의 충동이 느끼지 않을 때는 충고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감정만 상하게 됩니다. 남에게 충고 할 때는 그를 사랑하는 사랑의 충동이 자신으로 하여금 그를 충고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라야 충고가 바로 먹혀 들어가는 것입니다. 벧전 3:9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 19절과 20절에도 말씀합니다."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성을 내고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다가 자기의 마음에 ㅁ지 않는다고 해서 화부터 내면 결국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감정만 상하게 됩니다. 방울뱀은 화가 나서 약이 오르면 자기의 몸을 물어  뜯는다고 합니다. 화를 내면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뿐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만들게 됩니다. 자기가 더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화부터 먼저 내므로 말미암아 잘 될 수 있던 일도 그르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노를 자제할 때 변화가 있고 소망이 있고 새로운 삶을 영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잠14:29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오늘 말씀의21절에 권면하기를 "마음에 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온유란 말은 부드러운 마음이고 포용하는 마음이며 섬기는 마음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질 때 지혜롭게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성품을 가리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성내기를 더디 하며 온유한자가 지혜롭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빨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빨리 해야 할 일입니다. 22절에"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선한 일은 속히 결단하고 빨리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데스다못가에 38년 된 병자를 만났을 때 즉시 그를 고쳐 주셨습니다. 행3:베드로와 요한 나면서 앉은뱅이 그의 가슴에 예 수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즉시 그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실천했습니다. 아무리 빨리 가면 뭐합니까? 방향이 틀렸는데, 자 무덤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지, 천국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지,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방향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속도를 매일매일 조절하시기 바랍니다. 말하는 것 성내는 것 과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딜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데는 망설이지 말고 빨리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혹 선한일이 떠오르면 결단하여 실천에 옮겨 후회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선한 열매가 매일 매일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작품인 인생

어떤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그 공동묘지 관리인에게 여러 해 동안 한 주일도 거르지 않고 한 여인으로부터 편지와 돈이 부쳐왔습니다. 죽은 자기 아들의 무덤에 신선한 꽃다발을 갖다 놓아 달라는 부탁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병색이 완연한 부인이 커다란 꽃다발을 안고 와서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직접 아들의 무덤에 꽃다발을 놓아 주려고 왔어요. 아무래도 제가 오래 살지 못 할 것 같아서요.” 관리인은 말없이 그 여인을 쳐다보다가 드디어 결심한 듯 말했습니다. “부인, 저는 무덤에 꽃을 놓아 달라는 부인의 편지를 받으며 늘 유감이었습니다.” “유감이라니요” “유감이지요. 이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꽃을 보거나 향내를 맡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병원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꽃을 좋아합니다. 그들은 꽃을 볼 수도 있고, 향내를 맡을 수도 있습니다.”

몇 달이 지난 뒤 그 부인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당신 말이 맞았어요. 나는 직접 꽃다발을 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주었어요. 그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몹시 기뻐했어요. 그리고 저도 기뻤고요. 의사는 어떻게 해서 내가 이렇게 다시 건강해졌는지 그 이유를 몰라요. 하지만 저는 분명히 알고 있지요. 저는 지금 삶의 목표를 다시 찾았습니다.” 부인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사랑하던 마음을, 살아 있는 가여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그 일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되었습니다. 첫째 병원에 있는 환자들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아마도 환자들의 병세가 호전되는 데도 적잖은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둘째 부인에게 기쁨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부인의 건강이 아주 좋아졌다고 합니다. 셋째 공동묘지 관리인에게도 기쁨을 안겨주었을 겁니다. 부인의 변화는 관리인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니 관리인도 흐뭇하였을 겁니다. 넷째 죽은 아들의 영혼도 기뻤을 겁니다. 혹시 자기 엄마가 자신에게는 꽃다발을 주지 않고 엉뚱한 환자들에게 꽃다발을 준다고 서운해 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염려 마십시오. 하늘나라에 올라간 영혼은 더 이상 그런 이기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 영혼은 환자들과 자기 엄마와 관리인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여깁니다. 또한 특별히 관리인에게 매우 고마움을 느낄 겁니다. 다섯째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부인 주변의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었을 겁니다. 부인의 달라진 기운이 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부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도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니 부인이 마음을 바꾼 일은 모든 사람에게 유익이 된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부인이 마음을 바꿀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공동묘지 관리인이었습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1등공신입니다. 그는 죽은 아들의 무덤에 매주 꽃다발을 보내는 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을 겁니다. 과거의 아픔에 빠져 사는 사람이라고 말이죠. 병색이 완연하고 삶의 활기란 찾아볼 수 없는 부인을 만났을 때 그 사실을 확인하였을 겁니다. 그리고 그는 지적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인에게 천사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관리인은 매우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관리인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인이 관리인의 말을 듣고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관리인이 없었다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불가능했겠지만, 부인이 관리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역시 이 이야기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부인과 관리인의 합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인과 관리인만 있다면 이 이야기가 가능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습니다. 곧 죽은 아들의 존재, 부인의 편지와 돈을 한 주일도 거르지 않고 관리인에게 전해 준 우편배달부, 병원의 환자들, 환자들에게 꽃을 주도록 연결해 준 병원 직원 등이 필요했습니다. 더 나아가 공동묘지와 병원을 운영하는 사람들, 꽃을 재배하는 사람 등도 필요했습니다. 이런 사람뿐만 아니라 공동묘지, 병원, 꽃다발 등과 같은 사물도 필요했습니다. 더 필요한 것들을 끝도 없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부인과 관리인뿐만 아니라 수없이 많은 것들이 함께 필요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제대로 작동했기 때문이 이 이야기가 가능했습니다.

여기서 이 모든 것들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배후에서 작용한 어떤 존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봅니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은 사람이나 사물 등 주로 형상을 가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형상을 갖지 않은 어떤 작용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부인이 직접 꽃다발을 들고 공동묘지를 방문했다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전날 부인이 큰 병에 걸렸다면 공동묘지 방문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게 됩니다. 또는 부인이 공동묘지를 방문한 날, 마침 관리인이 심한 독감에 걸려 공동묘지에 출근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랬다면 부인은 그 관리인을 만나지 못하고 꽃다발만 아들의 무덤에 놓고 돌아갔을 겁니다. 그랬다면 역시 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변수들도 제대로 작동한 것입니다. 그런 변수들도 제대로 작동하도록 배후에서 작용한 어떤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 존재를 바울은 “만유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엡4:6)이라고 고백합니다.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주인공 배우와 조연 배우들, 그리고 수많은 엑스트라 배우들이 필요합니다. 스턴트맨도 필요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필요한 게 아니라 음향, 소품 등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관리하고 집행하는 감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영화의 감독과 같은 분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부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좁게 보면 부인과 관리인의 공동작품이라 하겠지만, 아주 넓게 보면 하나님의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부인이 천사와 같은 관리인을 만난 것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곧 하나님의 뜻이 없었다면 부인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불가능했다고 하겠습니다. 여러분, 부인과 같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그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써 달라고 청하십시오. 그리하여 나에게 필요한 천사를 보내 주시고, 주변의 수많은 여건들이 알맞게 작동하게 해 주시고, 그 결과로 내 마음을 바꿔 주시라고 말입니다.

내가 지금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니다. 그 때 내 마음이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 좋음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게 바뀌기를 원할 것입니다. 원하는 마음이 아주 강하면 스스로 노력하여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 좀 더 쉽게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 자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바꿀 수 없다고 보는 것이 기독교인의 세계관입니다. 부인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부인이 스스로 마음을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관리인의 도움이나 그 밖의 여러 조건들이 함께 맞물려 부인이 마음을 바꾸게 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관리인을 포함한 모든 외부 조건들이 알맞게 작동하도록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작용하는 존재가 있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 존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이 바뀌었을 때 내 의지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바꿔 주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저는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사랑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이 감독의 지휘 아래 펼쳐지는 것처럼, 우리네 삶의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진행됨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있는 어둡고 부정적인 마음을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꿔 달라고 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이제 살아 있는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 달라고 간절히 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은 가장 알맞은 때에 천사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고, 또한 수많은 여건들이 온전히 작동하도록 해 주실 것입니다. 마침내 여러분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게 해 주시고 여러분에게 기쁨과 행복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더 나아가 공동묘지 관리인처럼 다른 사람이 마음을 바꾸게 촉매제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천사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청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모습을 보며 보람의 기쁨을 누리게 될 터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살아갈 때 세상의 지혜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였다고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재자이심을 알고, 그분의 경륜을 신뢰하며, 그분의 도움에 힘입어 살았다는 뜻입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은 근심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그저 만족과 감사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의 삶은 넉넉합니다. 복되고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이 그런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은혜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의 신앙은 맛을 내게 됩니다. 기쁨과 감격이 넘치고 평강이 밀려오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은혜가 메마른 시대입니다. 긍휼이 없는 무관심, 무자비한 시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살고, 우리의 가정이 살아나고, 황무한 이 민족을 살릴 수 있는 비결은 은혜의 강물 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며 목마른 사슴처럼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우리 가운데 아침 이슬처럼 내리는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기대와 소원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회 다니는 자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생명을 얻고, 풍성함의 은혜를 누리며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안에 기쁨과 감격과 평안함이 없다면 은혜가 고갈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삶이 방향이 잘 되었는지, 삶의 속도는 적절하게 맞추어 있는지 점검하기고 다시 한 번 무릎을 꿇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강물이 나를 잠기게 하고, 우리의 가정이, 일터가, 사업장이 은혜의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놀라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죽은 것이 살아나고, 병든 자가 일어나고, 슬픔과 근심이 변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닌 예수님의  생명을 전하며, 베풀고 나누는 섬김의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의 행진이 이루어지며 주 은혜의 강물 속에서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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