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Connect
Member : 0 Guest : 0

help
subject/ name/
content/ comment

영암교회
위드뉴스

View Article     
Name
  서정호 2009-04-09 11:19:39, Hit : 1605
File #1    sm20090410용서가_가득한_곳.hwp (46.5 KB)   Download : 139
Subject   용서가 가득한 곳(창세기 50장15-21)
용서가 가득한 곳(창세기 50장15-21)

본문은 창세기의 마지막 장으로 요셉과 그 형제들의 화해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에게 악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미워했으며 타박했고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도 했고 극기야는 장사꾼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팔려온 요셉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유혹을 물리치다가 오히려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끝내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옛날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요셉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복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옛날에 자기가 당한 것을 생각하면 통쾌하게 복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들도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15절에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두려움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본문 20,21절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그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복수하지 않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사순절 기간을 맞아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무지한 사람들에게 악을 당하였습니다.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였으며 매질과 그리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사순절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 악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기간입니다. 철천지 원수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나에게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기인 것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 (마5:43-45)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여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사순절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삶! 그런 삶을 우리도 지금 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사죄의 은총조차도 누리지 못하며 오늘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입술로 고백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아무리 진한 주홍빛과 같다 할지라도 다 용서하신다는 말씀이 우리 앞에 분명히 던져져 있지만 우리는 그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요셉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는 요셉의 모습은 그의 생애 마지막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모습은 다름 아닌 용서의 모습! 그것입니다. 본문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이 죽자 그의 형들이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혹시 요셉이 보복하지 않을까 해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아버지가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면서 자신들을 방어하고 있습니다. 16-17절의 말씀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이 지난 날 자신들이 잘못한 일을 놓고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오늘 그 형들의 지난날의 잘못을 다 용서하고 있습니다. 용서가 있는 곳! 용서가 가득한 곳! 다. 거기야말로 천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거기야말로 정말 살 맛 나는 세상입니다. 우리 가운데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특성 중 하나가 실수!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용서!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분노! 그것은 우리 안에 없어도 됩니다. 정죄! 그것 역시 우리 안에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용서! 그것은 반드시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과연 어떤 사람이 용서의 사람이 될 수 있겠나요? 오늘 말씀은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우리에게 분명히 주고 있습니다. 먼저 19절 말씀은 두려워서 떨고 있는 형들을 향해서 요셉이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정죄는 하나님의 전유물이라는 뜻이 여기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지 않습니까? 정죄!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죄 있는 사람이 그 어떤 사람을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한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죄 없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정죄! 그것은 우리의 몫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한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롬 8:1-2 말씀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저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세상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요셉의 고백은 그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고백이라구요! 요셉의 이런 의식! 우리 안에 이런 의식만 있다면 우리도 누군가를 기꺼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구도 정죄할 수 없다고 하는 이런 의식으로 오늘 우리 안에 용서가 가득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두 번째로 2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니!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신 말씀을 말입니다. 요셉은 바로 그 말씀이 정확 무오한 말씀임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확증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아무리 열악한 상황이라도 그 모든 상황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결국은 선한 것으로, 좋은 것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오늘 요셉의 고백이 그것이지 않습니까? 자신을 일찍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까지 팔려가게 하신 분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 장래를 미리 보시고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하시기 위해서 요셉으로 하여금 먼저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재수라는 말은 믿음으로 사는 우리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그것만이 우리 안에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이런 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내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 그러면 용서가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깊고, 훨씬 높습니다. 사 55:8-9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그러기에 하나님의 섭리! 그 섭리 안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정말로 좋으신 계획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믿음! 그런 믿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에서 좇아나는 용서가 우리 안에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열려 있을 때 새로운 정보나 자극이 들어올 수 있고, 새로운 정보나 자극이 오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움직이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서서히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작은 변화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전혀 새로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나 개혁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점진적인 것입니다.

"북경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 짓을 하면 뉴욕에서 폭풍이 일어난다"는 이야기 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비 한 마리의 날개 짓이 당장 뉴욕의 폭풍우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변화이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전혀 새롭고 엉뚱한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열리고 거기에 성령이 임하시면, 여러분의 삶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기쁨이 생기고, 감사한 마음이 생겨서 가정의 변화를 이룹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에도 열심을 내게 되고 주일 빼먹기를 밥 먹듯 하던 사람이 열심히 참석을 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 두 사람 모이니까 지단체가 활발해지고 찬양대가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찬양대가 열심히 노래를 연습하여 부르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면서 듣는 회중들에게 기쁨을 선사하여 그 교회에 활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내리 덮었던 검은 구름이 걷혀지면서 교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깃들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여러 가지 전에 하지 않던 일들이 하나씩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침체했던 교회가 개혁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인의 마음이 열려서 거기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는 훨씬 더 강력하고 빠른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의 20%만 그 마음이 열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그 교회 전체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것을 20대 80의 원리라고 합니다. 어떤 성과의 80%는 20%가 이룬다는 것입니다. 팔린 매상의 80%는 20%의 상품과 20%의 고객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 의하면 교회 개혁이나 갱신의 80%는 그 교회 교인의 20%가 열린 마음을 갖고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경우 만약 20%의 교인들이 열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큰 꿈을 꾸기 시작하면 이 교회는 놀랍게 변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목회자의 사명은 바로 여러분에게 이 열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시고 여러분의 마음에 요동이 일기 시작하면서 여러분에 의해서 교회가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통해야 산다    
숨이 통해야 살고, 말이 통해야 살고, 기가 통해야 산다. 사는 것은 통하는 것이고 막히는 것은 죽는 것이다. 말이 막히고 마음이 막히면 그것은 살았다 하나 죽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막혀 목숨을 끊고, 어떤 남자는 여자에 막혀 자포자기를 하고, 어떤 여자는 남자에 막혀 삶이 괴롭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일에 막혀 죽을 지경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자기 자신과 막혀 슬프고 외롭다고 합니다. 막힌 관계를 뚫어 통하게 하자는 것이 길이요, 막힌 세계를 열어 통하게 하자는 것이 진리요, 막힌 숨을 통해 시원하게 살자는 것이 생명이지, 그 무슨 길이 있고 어떤 진리가 있으며 그 어디에 생명이 있겠습니까?.

하수도가 막혔다가 뚫릴 때의 기쁨을 아십니까? 돈줄이 막혔다가 그 어떤 손길을 통해 뚫릴 때의 시원함을 아십니까? 길이 막혔다가 길이 뚫어졌을 때 소통되는 자유함을 아십니까? 인간관계에서 막혀 옴짝달싹 못하다가 관계가 뚫려 말이 통하고 마음이 통할 때의 맛을 아십니까? 먹은 것이 체하여 답답해서 미칠 지경일 때 누군가가 손을 따주어서 체증이 내려갈 때 살맛을 아십니까? 그렇다고 통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통하는 삶을 살수는 없습니다. 친구와 통하고 싶다면 친구를 찾아가야 합니다.
선생님과 통하고 싶다면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자연과 통하고 싶다면 자연과 친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통하고 싶다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는 찾아야 한다. 찾아서 만나고, 만나서 듣고, 들어서 해보고, 해 봐서 터치고, 터쳐서 깨치고, 깨쳐서 통하고, 통하여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사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통하는 것이 십자가요, 그리스도가 나와 통하는 것이 부활입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통해서 하나 되어 산다는 것이 내가 갈 길이요, 깨칠 진리요 얻을 생명입니다. 진리를 깨칠 때 마음이 깨어나고 생명을 얻을 때 몸이 깨어납니다.

마음이 깨어 몸과 통하고, 몸이 깨어나 마음과 통하는 것, 몸과 마음이 통해서 하나로 사는 것이 건강입니다. 건강하게 산다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건(健)은 빛이요 강(强)은 힘입니다. 빛과 통하고 힘과 통하는 것이 바로 도(Logos)에 통하는 도통(道通)이 삶입니다.

막혔다는 것은 통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막힘 앞에 좌절하고 원망하고 포기하고 사는 것은 삶이 아닙니다. 사는 것은 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하는 법인 신관을 갖고, 자연과 통하는 요령인 자연관을 갖고, 사람과 통하는 기술인 인생관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계를 통하는 기술인 관(觀)을 갖고 산다면 막힐 것이 있을까요?

사랑의 기술을 갖고 사람과 통하고, 평화의 요령을 갖고 자연과 통하고, 생명의 법을 갖고 신과 통하는 것이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요, 성령의 법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진짜 나로 사는 것입니다.

왕으로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로 살라는 것이 성령의 기도입니다. 나로 살라는 것이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신이요 아버지이신 성부와 통하고, 자연이요 어머니이신 성령과 통하고, 사람이요 아들이신 성자와 통하고, 통하고 살라는 것이 가르침 중의 가르침이요, 원리 중의 원리입니다. 머리는 진리로 통하고, 가슴은 사랑으로 통하고, 배는 생명으로 통하는 삶, 이렇게 통해서 하나로 사는 삶, 삼위일체로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십자가의 용서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통하고 살게 하신 것이요, 우리 인간들끼리 서로 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용서인 것입니다.

롬 5장 6절 말씀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고 합니다. 8절 말씀에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람을 입었다고 합니다. 10절 말씀에는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바로 그 때에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입었다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용서가 가득 묻어있는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제는 용서가 필요합니다. 용서가 진하게 배어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내 삶의 모든 정황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기억하심으로 이제는 우리 가정에서도, 우리 교회 안에서도 용서가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용서가 가득한 곳! 거기가 천국입니다.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거기에 웃음꽃이 만발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이, 그리고 이 믿음의 동산이 그런 곳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클라이맥스는, 용서입니다" "용서하는 일이.. 왜, 그리도 어려울까?"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민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용서는, 인생의 클라이맥스입니다. 용서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무슨 나무인가를 열매로 알듯이, 우리의 신앙은 용서로 검증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돈 버는 일도, 공부하는 일도, 기도하는 일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용서하기 시작하면(용서가 되면) 그 현장에는 기적의 꽃이 피고, 회복의 잎이 무성해지고, 치유의 광선이 발하며, 닫힌 문들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용서를 하고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용서에는 갈등이 많고, 우리의 용서는 골라서 하는 용서 입니다. 누구는 용서를 하고, 누구는 용서를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용서는 내 중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용서는, 여름 날씨와 같습니다. 용서했다가 그 사람을 보거나 생각하면, 다시 미워하게 됩니다. 그뿐입니까? 내 맘에 들어야 용서하고, 내게 득이 되어야 용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고도, 상처가 남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용서는, 조건 없는 용서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하나님을 닮았습니다. 계산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노력하지 않는, 용서입니다. 용서한 것이 아니라, 용서가 되는 용서입니다. 용서 받을 만하기 때문에, 형들을 용서한 것도 아니며 회개했기 때문에, 용서한 것도 아니며, 사랑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에, 사랑한 것도 아닙니다. 요셉에게는 형들이 특별한 의미의 형들입니다. 자신의 청춘을 망가뜨린 장본인들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죽이고 싶은 형들입니다. 죽여도 죄없다할 형들입니다. 형들을 생각만하면, 억울하여 분하여 피가 역류하는 형들입니다. 그런 형들을 얼마든지 벌을 주고 죄 값을 물어 행한 대로 갚아도 될, 그런 능력과 권세가 있는 요셉이었으나 요셉은 형들을 통곡으로, 용서합니다. 그리고 요셉의 용서에는 갈등과 계산이 없습니다. 개운한 용서를 합니다. 우리는 요셉의 큰 용서에, 한없이 작아짐을 느낍니다. 우리의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요셉의 용서와 사랑은, 나한테 잘해주면 잘해주고 용서할 가치가 있으면, 용서하는 용서가 아닙니다.

그냥 용서하고, 그냥 사랑합니다. 요셉의 용서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타락한 우리 본성 안에는 조금도 없습니다.
그 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입니다. 우리는 사랑 받은 만큼, 사랑합니다.
용서 받은 만큼, 용서합니다. 요셉의 조건 없는 사랑과, 갈등 없는 용서의 뿌리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셉의 용서는, 잊어버리는 용서였습니다.

용서하고도 생각난다면, 그 용서의 뿌리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의'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워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그 사람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나 자신을 위하여' 그 사람을 용서하라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용서 못하는 마음은, 이미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지옥 되지 않고는, 남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마귀의 놀이터입니다.

우리가 진흙을 남의 얼굴에 바르려면, 먼저 내 손에 진흙이 묻어야 합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려면, 누구를 용서 못하면 먼저 내 영혼에 진흙이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둠으로, 질병으로, 그늘로, 상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질병 중에 상당수의 질병의 뿌리가, 용서 못한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미워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말이지요. 남을 미워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드는 일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이라는 증거겠지요. 용서 못하는 마음은, 병이 걸릴 정도로 힘든 일입니다.

큰 나무가 시름 시름 마르고 죽어 가는데, 물만 주고, 비료만 준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나무 속에서 벌레가 먹어, 썩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비료 주는 일과 물을 주는 일을 중단하고, 속히 벌레를 잡아내야 합니다. 벌레는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우리의 인생도 서서히 말라가고, 영혼은 서서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만 한다고..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만 받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갈등 없는 용서, 조건 없는 사랑만이, 말라가고 죽어가는, 우리의 심령과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특효약입니다. 인간의 질병가운데 50퍼센트는, 용서하면 낫는 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고칠 수 있는, 병이랍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묵상해야 합니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DNA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DNA를 지니고 태어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분을 닮은 DNA가, 우리의 세포 속에 내재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라는 DNA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해야 합니다. 미움은, 마귀의 DNA입니다. 주님의 심장, 하나님의 DNA를 회복하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을 용서하고 사랑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나도 내가 싫은데, 어떻게 남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음>나도, 내가 싫은 내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남도, 그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 숭고한 용서의 원천과 사랑의 뿌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남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사모함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럴 능력은 1퍼센트도 없음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바이러스나 곰팡이가, 아무데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청결치 못하고 습한 곳에 서식하듯이, 마귀도 동일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사랑하지 않는 마음에 틈을 타고, 집을 짓고, 활동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활동이 시작되는 곳에, 온갖 질병과 나쁜 일들과 평생을 그늘 속에 살게 할, 어둠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목적은, 하나님의 DNA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일은 총력을 기울여, 마귀를 무장해제 시키는 일입니다. 마귀는 용서의 백신 앞에서, 어둠의 바이러스를 가지고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농장을 허무는 것은, 맹수가 아닙니다. 작은 여우 한마리가, 허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래 묶은, 증오의 바이러스를 찾아내어
조건 없는 용서의 백신으로, 내어 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의 농장은,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용서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나를 죄인 되었을 때에..자격  없을 때에,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용서해야 합니까?

성령의 나타남으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이 나타납니까? 기도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Prev    십자가 그리고 그 다음은?(요19장30-37)
서정호
  2009/04/10 
 Next    십자가로 변화된 나
서정호
  2009/04/04 



Copyright 1999-2024 Zeroboard / skin by lifesay
홈

서정호 목사 온라인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