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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05-07-02 18:56:38, Hit :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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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감동을 주는 삶(행 9:26-31)
변화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네 가지 질문

감동을 주는 삶(행 9:26-31) 2005.07.03.


감동을 주는 사람

지난 6월19일 개장한 한강 뚝섬에 있는 서울 숲은 도심지 공해 속에서 시달리고 있는 서울시민들에게는 너무나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며칠 전 아침 이른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가보았는데 안암동에서 30분 만에 쉽게 갈 수 있어서 너무나 좋았고 30여만 평에 이르는 넓은 공간에 조경을 잘 해놓았고 야생동물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고 한강을 쉽게 걸어가서 산책할 수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잠시 자전거를 타고 넓은 공간을 둘러보는 중에 눈에 띄는 문구가 하나 있었는데, 내용인즉 자기 집 강아지를 찾아주는 분에게 200만원을 사례하겠다고 하면서 이 개는 16년생이기에 얼마 살지 못하는 수명이 거의 다 끝나가는 개이고 다친 곳을 치료해주기 위해 털을 깎은 흔적이 있는데 함께 식구처럼 지내는 개이기에 꼭 찾고 싶으니 확인이 되면 연락을 주십사 하는 애절한 마음을 담아 사진을 부착해 놓은 문구를 보고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젖게 됨을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 그 누군가를 감동시킨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감동케 한 일이 얼마나 되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으로 인해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후회하지 않을 뿌듯한 삶을 사신 것이지만 그러나 만약 지나온 한 주간, 한 달, 1년, 지나온 한 평생 동안 나로 인해 감동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재고해 보아야할 삶입니다. 감동은 커녕 짜증만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실망하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런 인생은 주님이 가룟 유다에게 한 말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생'인 것입니다.


세상이 아름답다는 것은 감동케 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입니다. 물질이 넉넉해서나 보이는 것이 다채로워서 세상이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물론 감동은 인위적이거나 작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감동이 선동과 다른 점입니다. 그러기에 타인을 감동시켜야겠다는 생각은 더러운 겁니다. 감동은 강요로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감동은 인위적인 향수처럼 풍기는 게 아니라 자연적인 향기처럼 그렇게 우러나는 겁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가슴이 열려 공감의 아름다움이 일어날 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감동이 있는 인생이 바로 복된 인생인 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가 감동한다고 하는 것, 참으로 기분 좋은 일 아닙니까? 목회의 기쁨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 속에서 감동을 주는 교우들을 만납니다. 그 기쁨, 그 즐거움을 무엇으로 맛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참 묘해서 냉수 한 그릇으로 감동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금덩어리로도 감동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정말 감동은 아무나 끼칠 수도 없고 아무나 경험할 수도 없는 하늘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 어렵고 감동을 받는 것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는 점점 감동은 없고 자극만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편리하고 화려하고 넉넉하지만 감동을 맛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좀 불편하고 수수하고 가난했던 옛 시절에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장사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가르침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심지어 예배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감동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감정이나 기력(氣力) 등을 포함한 총괄적인 용어라고 합니다. 일종의 미적‘혼합감정이 감동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쾌, 불쾌가 감동 때문이라고 합니다. 감동이 있으면 쾌감을 느낍니다. 감동이 없으면 불쾌를 느끼게 합니다. 영어의 감정이란 단어는‘emotion’입니다. 이 말은‘motion’에‘e’를 첨가한 말입니다. 로버트 모건은‘홍해의 법칙'에서 이렇게 말합니다.우리의 감정은 늘 오르락내리락 하는 마치 놀이동산의 청룡열차와 같다. 우리 감정은 고삐가 풀려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감정은 늘 일정치 못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늘 변하는 것이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동도 일정치 못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에게는 개인적인 감동의 순간이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감동은 얼마 후가 되면 다 잊혀지게 마련입니다. 감동이 있는 순간은 보고 또 봐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뻔히 그 결과를 알지만 또 봐도 감동이 살아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들은 보면 볼수록 불쾌감만 더해 갑니다.


예수님은 당시를 감동이 없는 시대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17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한탄하십니다. 아무 감동이 없이 사는 사람들, 아무 생각이 없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감동이 없기는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감동을 찾은 사람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없는 것이 저주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이 성경을 읽어도 말씀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무언가 하나님과 관계에 장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자체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괴로운 일입니다. 감동은 은총이고 축복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감동이 있고 말씀에 마음이 깨달음이 있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다면 이것이 곧 은혜입니다. 성경은 감동을 원하는 시대에 참 감동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사실 진정한 감동은 순수함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감동은 자연발생적으로 생깁니다. 진정한 감동은 잔잔함에서 우러나옵니다. 시인 박노해는“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이 나날이 새롭다는 것을 깨닫고 감동하고, 울타리에 피어난 개나리꽃에 스며든 새 봄에 감동하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한 밥상을 대하며 감동하고, 잊었던 파랑새 소리를 들으며 감동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창조력을 잃어버린 사람이요,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감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사람들이‘나를 감동시켜 달라!’ 외쳐보지만 정작 감동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창조력을 잃어버리고 영적 성장이 멈춰버린 시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동을 찾은 사람들입니다. 감동할 것을 감동할 줄 알고, 감동할 때 감동할 줄 알고, 작은 것에 감동하고, 순수한 것에 감동할 줄 압니다. 어떻게 감동이 되살아날까요? 우선 주님을 닮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는데 첫째 날 빛을 만드신 다음“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은 하나님께서 빛을 만드시고 그 빛을 보시면서 감동하셨다는 것입니다.“야! 좋다”“야! 멋지다”엿새 동안 하루에 하나씩 만드시면서 매일 감동을 연발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 인간을 만드시면서 모든 창조를 끝내시고는 더욱 크게 감동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야! 너무 좋다”“야! 너무 너무 멋지다!”하나님은 당신의 걸작품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시고 감동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감동하실 줄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일을 보고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에 감동하십니다. 우리의 정성을 다하는 봉사와 헌신에 감동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크게 감동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닮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고 감동하고, 하나님의 솜씨를 보고 감동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주의 파노라마를 보고 크게 감동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예술의 대가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에게 감동이 되살아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 감동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볼 때 “어떤 것을 보고 들어서 깊이 느껴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 구약에서“하나님의 신이 감동했다”든지 신약에서“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자극하시고 격려하셔서 그 마음이 움직이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감동이 없는 시대에 살면서도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만져주시고 자극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면 우리 마음이 움직입니다. 마음이 열립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벅찬 감동을 받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감동적인 일들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감동을 되찾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감동이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감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감동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이란 감동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뜻합니다. 감동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리고 감동의 내용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대에 흙으로 만든 사람의 모습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살아있는 영이 되었습니다. 흙에 숨을 불어넣지 않으셨다면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결,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무리 흙이지만 하나님의 숨만 있으면 감동이 있습니다. 아무리 질그릇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숨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하나님의 숨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죽었던 영도 다시 삽니다. 하나님과 호흡하면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있으면 날마다 기뻐 뛰면서 살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숨을 내쉬면 성령을 받습니다. 주님의 숨을 받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주님의 숨은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주님의 숨을 받고 주님과 함께 호흡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을 받고 감동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두부 전문 음식점 간판을 보면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어떤 집에는 '순두부’, 손두부’, 또 어떤 집에는‘숨두부’라고 써 놓았습니다. 숨두부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러나 대개 숨 쉬는 두부라는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부가 숨을 쉰다는 말은 싱싱하고 살아 있는 두부라는 뜻이겠지요. 두부가 숨을 쉬면 살아있고 싱싱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숨을 잘 쉬면 싱싱하고 살아 있는 성도가 됩니다. 나 혼자 숨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숨을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있는 숨에 맞추어 숨을 쉬어야 삽니다.


감동은 하나님의 숨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감동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의 소리에 감동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직도 세상의 유행가가 그렇게 감동이 되고 어떤 노래는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찬송가는 불러도 불러도 눈물이 안 나는데 유행가는 부르면 눈물이 난다면 문제이겠지요. 또 어떤 분은 세상의 볼거리에 감동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떤 영화는 말씀보다 더 감동이 있다고 합니다. 영화가 말씀보다 감동이 있고, 유행가가 찬송가보다 감동이 있다면 문제가 아닙니까? 말씀이나 찬송가에는 문제가 없고 단지 우리의 마음 그릇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문화나 유행에는 쉽게 감동을 받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늘의 소리에는 좀처럼 감동이 없는 이것이 현대인의 정신문화입니다. 현대인의 비뚤어진 신앙상태입니다. 여기에 영적 공허가 있습니다. 한 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 중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01가지의 짧고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감동하는 일에 굶주려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감동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감동을 주었던 성경의 한 인물을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바나바입니다. 그는 권고하고 위로하는 자였습니다. 그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감동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을까요?


감동을 준 인물 바나바

바나바는 그 이름의 의미처럼 어느 곳에서든지 어려움 당하고, 소외당한 자들의 편에 서서 위로와 격려자가 되어 주었습니다(행 9:26,27;15:39). 이런 모습은 너무도 쉽게 다른 이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비판해 버리는 경향이 팽배한 오늘날에 더욱 필요한 태도라 하겠습니다. 진정 남을 판단하기에 앞서 사랑으로 다독거리며 권면하여 공동체간의 신뢰를 도모하는 평화적 중재자가 할 것입니다. 또한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와 달란트, 자신의 생애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 주의 일에 헌신하였습니다(행 4:37;13:1-15:39). 이같이 자신의 귀한 것을 모두 드리는 전적인 헌신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꼭 필요한 모습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바울과 자신을 신으로 오해하는 자들 앞에서 옷을 찢으며 애통해 하고 자신은 다만 청지기에 불고함을 피력하였습니다(행 14:14,15). 이같이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자신은 다만 도구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태도는 오늘날 복음을 전해야할 성도들에게도 꼭 필요한 모습입니다. 또한 담대한 복음 전파자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며 권면의 은사가 뛰어났던 바나바도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문제로 시험을 받아 외식하는 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갈 2:13).


신약에서 가장 큰 영향력 미친 사람을 들라면 바울인데 이러한 바울을 쓰임 받게 하고 데뷔시킨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1차 선교 여행 시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다녔으나 2차 선교 여행 시 마가를 데리고 다니는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졌는데 그 마가를 품어준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품어주는 사람이었고 그 결과 마가는 베드로의 제자가 되었고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을 썼습니다. 바울 서신의 그림자 같은 역할을 한 사람이 바나바인데 바나바는 인물을 키우는 옥토가 되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단순하게 상대를 인정해 주는 것부터 시작하라

바나바가 바울을 추천한 것은 바울이 그만큼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과 바나바가 현재가 아닌 미래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대립되지만 이러한 논쟁은 모두 넌센스에 불과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바나바의 태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27절 말씀과 같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시기심으로 바라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장점을 크게 이야기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단점을 크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세계가 있는데 작은 그릇 속에 자신을 가두어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사실에 직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내를 아내로 보지 않으면 자신 중심으로 보게 되어 불만투성이며 비판하게 되고 자녀도 마찬가지이며, 성도에 대한 목사의 입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때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장점이 있음을 인정해 주는 바나바의 태도가 위대한 사도바울을 세웠으며 바나바는 이러한 인정해 주는 것에서 출발하였습니다.


보증이 되는 사람이 되라

26절 말씀과 같이 바울은 디딤이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였으나 바나바가 그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다리가 되고 디딤이 되었습니다. 내가 힘들고 희생이 되더라도 그 희생을 통해 어떤 사람의 길이 열린다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영향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세울 때 강해질 수 있습니다.


세운 사람을 통해 사역을 넓히라

28~29절 말씀과 같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말씀을 전했을 때 가장 당황했던 사람이 옛날 사울과 함께 믿는 자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당시 교회는 헬라파 유대인에게는 약했습니다. 그런데 헬라 말에 유창하고 지성으로 무장된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그 결과 사역이 더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 한사람을 세움을 통해 헬라인에게 전도하고 예루살렘에서 든든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동역자와 함께 일하게 될 때 라이벌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이 넓어지는 비결이 됩니다. 바나바의 사역은 동역자와 함께 하는 사역이었습니다. 동역자를 세우면 자신이 커지는 것입니다.


아낌없는 헌신과 섬김의 사람

그는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서 성장하고 있던 교회를 위해서 자기에게 있던 것을 아무 조건 없이 내어놓았습니다. 그의 아낌없는 헌신과 섬김은 교회에 커다란 격려와 용기와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형편과 환경과 조건을 넘어선 섬김과 헌신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화해자의 모습으로 위로하며 격려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울이 사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을 때, 사울의 회심을 의심하면서 불안해하던 사도들에게 사울을 소개하면서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의심하면서 거리를 두고 있을 때 자기를 변호해 주며 화해자의 역할을 감당해 주었을  때 사울은 얼마나 감동했을까요? 바나바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은 예루살렘을 출입하며 한 교인으로서 떳떳하고 담대한 교회생활을 시작했고 복음을 강력하게 증거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의심하던 사울을 바나바는 신뢰하면서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바나바의 놀라운 영적 통찰력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기독교 역사상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위대했던 바울을 우리는 잃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많은 젊은 인재들이 있습니다. 바나바와 같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그들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키워가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제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격려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옳다고 인정되는 일에 자기의 것을 손해 볼 각오로 생명을 던지십시오. 손해 볼 줄 아는 자만이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남의 성공에도 진심으로 기뻐하고 좋아하는 따뜻한 사람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을 보면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람, 바나바. 자기가 세웠던 바울이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대 저편 뒤로 겸손히 숨을 줄 알았던 사람, 바나바. 그는 언제나 아름다운 감동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바나바는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은 바나바와 같이 감동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누구나 감동을 주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남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감동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교회는 평안히 세움을 입을 것이며,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더해갈 것입니다. 나아가 주를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질 것입니다. 나에게도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내가 바로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감동이 있는 교회는 거기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과연 바나바와 같은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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