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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05-02-19 11:52:53, Hit : 1329
Subject    부활 그 이후의 만남(요20장19-25) 1999년 4월 11일
부활 그 이후의 만남(요20장19-25)  1999년 4월 11일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사건을 고백한 사람들의 터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 부활사건에 대한 신앙적 증언과 이에 따른 체험이 없이 기독교는 역사 속에서 성립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활의 증언과 체험은 오늘날 한사람 한사람의 삶의 질을 변화시키고 공동체의 삶을 변혁시키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힘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부활 그 이후에 어떤 사람들을 만나셨고 만나셨을까요? 예수 부활의 설득력 있는 증거는 구체적인 사람 하나 하나와 공동체의 변화 안에서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날 저녁에 불안과 공포에 질려 문을 닫고 집안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서 예수님의 손을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대 보았습니다. 그분은 저들의 목전에서 로마 군병들과 유대인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시고 그래서 죽으셨던 바로 그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부활 그 이후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인데 이 만남은 완전히 새로운 만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 중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 아무 의미도 없이 만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애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만남에 대한 중요성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마틴 부버인데 그는 사람의 만남에는 두 종류의 만남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첫째는 I and Thou(나와 너)입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만남이고 사랑의 만남입니다.
그러나 I and It(나와 그것)의 만남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는 만남입니다. 상대방을 사람으로, 사랑의 대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용 대상으로 만나는 만남입니다. 지금의 시대는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고 사랑하기 위해서 만나는 만남보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는 만남이 더 많은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특히 좌절과 낙망과 불안과 근심 걱정으로 앞이 캄캄할 때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문제는 더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그야말로 인생 최저의 밑바닥에서 절망과 낙망과 불안 속에 있었습니다. 하늘처럼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비참한 죄인의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한 이들은 해가 떠올라도 빛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앞이 캄캄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한 후, 이제는 그의 제자들을 추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제자들의 숨통을 계속 조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의 추격을 피하여 어느 집 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젊은이가 열어 주지도 않은 방문을 열고 제자들의 한 가운데 섰습니다.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묘에 장사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 "장로들과 제사장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살아나리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셔서 오신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이 찢기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신 그 분이 이렇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분이 정말 예수일까? 이것이 사람이냐? 영이냐? 귀신이냐?"하며 의심하고 있는 제자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손과 옆구리를 다 보여 주시며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예수라"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 만남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새로운 만남이었습니다. 기적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난 그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첫째,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 앞에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기뻐했습니다. 본문 20절에 보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을 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캄캄한 밤이 환해졌습니다. 생의 앞길이 훤하게 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활절을 지키고 축하하는 것은 바로 이 기쁨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기쁨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환난과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을 정복하는 힘입니다. 이 어려움을 정복하는 자만이 웃을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어떻게 정복하겠습니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까? 기쁨을 빼앗아 가는 도둑은 인간 마음속에 있는 죄의 문제와 관계가 있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새로운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수 있고 평강의 축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제자들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나자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유대인의 추격을 물리치고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 있는 힘을 능히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위치에 있는 분이 아니라면 제자들이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을까요? 근심과 걱정을 능히 몰아 내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오셨기 때문에 그들이 기쁨을 회복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늘 새롭게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순간부터 우리에게는 근심과 걱정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도, 질병도, 어떤 환경도,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부활하신 주님을 강하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부활하신 주님과의 새로운 만남은 영원한 소망을 줍니다
인간을 특징지울 수 있게 하는 것은 소망이 없으면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는 없습니다. 자동차 부속품 중에 하나만 고장이 나도 차를 쓰지 못합니다. 단지 부속 하나 때문에 고장이 나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것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다 할지라도 희망의 빛이 꺼지면 인생의 맛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람에게는 불굴의 희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비록 남모르는 눈물을 흘리며 온갖 고생을 한다 해도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희망이 끝까지 지속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희망과 소망을 되찾았습니다. 그 소망은 지상적 소망을 포함한 하늘 나라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계속 이 소망을 전했습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이해하는 대상이지 절대로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과의 새로운 만남에는 인생 승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승리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싸움은 사탄과의 싸움이요, 죽음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를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1) 부활의 승리는 내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6장 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고, 로마서 6장 8∼9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한 마디로 그리스도와 하나된 우리가 그 분이 죽을 때 이미 같이 죽었고 그 분이 부활하실 때 같이 부활했기 때문에 사망이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내가 언제 예수와 함께 죽었느냐는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식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예식입니다. 유대인이 할례를 받음으로 참 유대인이 됐듯이 믿음의 증표인 세례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사는 상징적인 예식인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예하게 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승리자인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고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의 승리를 내 삶에 적용하여 날마다 순간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죽음이라는 인류의 가장 큰 원수를 이긴 자는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패배할 수가 없다는 확신을 가져야 부활의 승리를 내 삶에 적용할 있습니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승리 없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실패가 없습니다. 단지 훈련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넘어져도 완전히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도 나 혼자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결코 졌다고 손을 들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해도 죽음의 세력보다는 약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새로 만나면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하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내 것이 되고 나는 항상 승리자로 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 : 37).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두려워 말라 하시고 또한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나갈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숨을 내 쉬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숨결은 창세기 2:7절에 나오는, 인간을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불어 넣으셨던 바로 그 창조의 숨결입니다. 창조의 숨결을 공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불어 넣어줌으로써 새로운 힘과 새로운 용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에 널려 있던 뼈다귀가 하나님의 바람을 받아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났듯이, 공포에 떨고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힘으로, 새로운 질서로, 새로운 공동체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새로운 바람과 새로운 성령을 주시고 나서 이제 세상을 다스리시는 모든 힘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강한 통제력을 통한 다스림이 아니라 사랑과 용서의 능력을 통한 다스림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은 나타나시어 평화와 평안, 용기와 새 힘 그리고 성령과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을 고백하는교회는 용서로 시작되고 용서로 끝나는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우리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나타나야 합니다.부활신앙은 단지 부활주일에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믿는 근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에 소망을 부활에 둬야 합니다.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므로 이후에 나도 부활한다고 하는 이 신앙고백이야말로 바로 성경의 핵심이고 우리 믿음의 핵심입니다.

먼저 부활의 확실성을 매일의 삶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내가 곧 길이요,진리요,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말씀은 매일 매일 확인해야 할 구절입니다.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주장대로 역사적으로 부활하셨습니다.그 부활하심을 근거로 나의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부활의 확실성을 확인하는 성도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부활이 있기에 이 땅에서 아둥바둥하며 지내지 않습니다.남에게 주면서 살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이 땅 저편에 더욱 중요한 삶이 약속돼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연연해하겠습니까? 부활의 확실성을 확인한 성도들은 이웃에게 그것을 담대하게 전할 수 있습니다.진리를 확인한 성도들이야말로 그 진리를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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