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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05-02-22 18:54:23, Hit : 1133
Subject   2004사순절 설교(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사_53장4-9)





더  이상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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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허물이 그를 찔렀다(사 53:4-9) 2004.03.31.







상처받은 치유자 



이태리에 살고 있던 어떤 사람이 심한 우울증에 걸려서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는데 진찰을 모두 받은 다음에 이 의사가 사람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의 이 증세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가리말디의 코미디 프로를 자주 보는 게 좋을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말합니다. "제가 바로 가리말디올시다."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습니까? 남을 웃기는 그 사람, 남에게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 그 사람이 사실은 가장 슬픈 문제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 문제없이 보이는 사람도 자세히 보면 상처투성이요, 문제투성이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존경 받고 인정을 받으며 도움을 주는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문제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치유자로서 그렇게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만나는 치유자 한 분이 계십니다. 그는 자기의 문제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잘못도 없었고 죄도 없었고 부족함도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취하시고 스스로 문제를 안으신 분입니다. 스스로 자기의 몸과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받으신 분입니다. 그는 스스로 낮은 자리까지 오셨고 가장 심각한 인간의 고통을 모두 겪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인간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을 가리켜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부릅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치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치료하기 위하여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괜히 상처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상처 받은 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목적으로 친히 상처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본 자들의 기록이 역사에 더러 남아 있기도 합니다. 어떤 의원이 주님의 그 모습을 죽 보고 남긴 기록이 있는데 거기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기록입니다.  모든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한 몸에 안으신 주님이셨기 때문에 웃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우리 주님의 나에 대해서 짐작하는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30세가 갓 넘었을 때 사람들의 눈에는 주님이 50세 이상으로 보였고 고통과 고난과 인간의 슬픔을 담당하시다보니 그의 나이가 훨씬 더 실제 나이보다 많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는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고 또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우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일생을 그저 한마디로 말한다면 상처의 연속이었습니다. 탄생부터가 상처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비참한 말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도 상처였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장남으로 태어나셨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는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그런 상처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의 공생애도 사실은 상처의 연속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자기 동족들이 주님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이 자기의 스승, 예수님을 다 배반하고 한사람은 그를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동족들이 자기를 십자가에 죽도록 배반하고 내던졌습니다. 그의 고독의 상처는 얼마나 깊은지, 그 뿐 아닙니다. 그는 손과 발과 머리와 옆구리에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육체적인 상처를 입으신 분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는 영적인 상처까지 입으신, 몸도 마음도 영혼도 온통 상처투성인 그런 분이 바로 오늘 우리가 경배하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받으신 이 상처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받는 상처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거나 어떤 환경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스스로 자신이 원하셔서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도 스스로 원하여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것도 피할 수 있었는데 스스로 상처를 받으신 것입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스스로 상처받기를 원하셨던가 하는 것은 성경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주님에게 마취제를 갖다 주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면 좀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 쓸개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주님은 그 상처를 아주 깊이 스스로 받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원하셔서 상처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온갖 상처를 입은 인간들, 온통 상처 가운데 괴로워하는 인간들을 구체적으로 치료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친히 기쁨으로 상처를 받으셨던 것입니다.  기다모리 가조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우리들의 상처를 치료하신다.'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악의 상처, 고통의 상처, 모든 쓰라림,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슬픔의 상처들을 능력으로 치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머리에도 받으시고 가슴에도 받으시고 영혼에도 받으시고 온몸에 상처를 친히 받으셔서 그 상처를 가지고 상처 받은 모든 인간들을 치료하시는 상처 받은 치유자가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는 상처받은 가슴을 가지고 우리 인간의 모든 가슴 속에 있는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버림받고 멸시받아 촛밀처럼 흘러내리는 그 상처 난 마음을 가지고 우리들의 상처 난 마음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눈물 마를 날 없었던 그 눈물을 가지고, 그 눈을 가지고 눈물 흘리고 있는 우리 슬픔의 눈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못 박히신 두 손과 발을 가지고 어찌할 수 없는 죄악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그 죄악의 상처를 치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모든 쓰라린 상처의 기억들을 주님은 아시고 친히 그 이마에 있는 상처를 가지고 우리 인간의 모든 상처를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상처를 아노라. 내가 너의 질고를 아노라. 내가 너의 고통을 아노라. 나도 너와 같이 고통을 당하고 질고를 당하고 모든 슬픔을 경험하였거늘 내가 너를 치료하노니 나의 상처로 너를 치료하노라'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주님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주님의 온몸의 상처, 그 마음의 상처, 그 귀한 상처를 가지고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다가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상처로 우리를 만지시고 치료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상처를 바라보시고 손을 바라보시고 이마에 그 가시관 쓰신 그 상처를 바라보시고 옆구리에 찔린 창을 바라보시고 이 시간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치료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모든 종류의 상처를 받으셨다고 하면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반드시 치료받아야 합니다. 본문 5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도다'  이미 우리 주님은 치료를 위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두고 우리가 치료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상처는 치료 받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치료하시기 원하지만 사실 치료받으려고 하면 용감해야 합니다. 그냥 여기 앉아서 가만히 계셔서는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치료받기를 원하는 자는 용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 몸에 병이 들면 의사를 찾아갑니다. 의사는 우리에게 별의 별것을 다 얘기합니다. 옷을 벗으라고 하고 배를 한번 걷어보라고 하고 쿡쿡 찔러봅니다. 우리는 그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노출시킵니다.  '돌아앉아라, 뒤로 누워라, 바로앉아라' 온갖 진찰을 다 한 다음에는 아주 굵직한 주사기를 들지 않습니까? 주사도 맞으셔야 합니다. 때로는 의사 손에 날카로운 메스가 들려져서 우리의 상처 난 부분을 찢을 때 용감하게 그 아픔을 참을 수 있는 자는 치료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치료를 받기 원하는 자도 용감해야 합니다. 그냥 교회에 나와서 가만히 앉아 있고, 문제를 다 덮어두고 가만히 있다고 치료받을 수는 없습니다. 만병의 의사 되신 주님께 자신을 노출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아픈 말씀의 주사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찌르십니다. 가슴이 뜨끔해지는 그런 아픔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이 때로는 메스를 들고 잘라내시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르실 때, 내 몸을 맡기고 주님이 자르라고 하는 것을 과감하게 자를 수 있고 주님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그 모든 치료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상처는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치료하지 않고 그냥 두면 이 상처는 곪아 터지고 결국은 다른 장기까지에도 문제를 일으킵니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 모든 질병들은 전이될 수가 있습니다. 치료받지 않으면 가슴 속에 남아서 이것이 자꾸만 예민한 반응을 일으킵니다. 마치 도적이 골목을 가다가 좀도둑을 보았을 때 다른 사람보다 더 크게 '도적이야' 하고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늘 마음속 한 켠에 자기가 받은 그 상처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괴로울 뿐 아니라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또한 상처를 주기도 하는 일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죄악의 상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고백하지 못한 죄, 이것은 상처가 되어서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불안하게 만들고 결국 인간관계까지도 망쳐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인간관계의 상처도 있을 수 있습니다. 회복되지 않은 인간관계가 내 인생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낫지 않는 상처가 될 것입니다. 덮어두지 마십시오.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과감하게 먼저 손 내밀어 그와 더불어 함께 화해하고 용서하시며 그와 더불어 함께 손을 잡는 용기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치료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혹은 우리 마음 속에 미움의 상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솔직히 미워하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라도 그 미움은 내 인생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치유되지 않은 상처인 것입니다.







주님이 겪으신 엄청난 고통의 경험은 바로 우리의 삶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기억 속에 얼마나 상처 난 기억이 많았습니까? 사람이 되신 그 기억, 매를 맞으신 그 기억, 배반당하신 그 기억, 또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그 기억, 그 모든 기억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한 그런 상처였다는 것을 기억하고 감사함으로 모든 기억의 상처에서 치유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 주님은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상처 받으신 치료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치료만 받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치료자가 되어서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을 향해서 치료하는 자가 되어서 우리의 몸을 굽히고 자존심을 굽히고 모든 교만을 굽히십시다. 내 형제와 이웃을 향하여 우리의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굽히십시다. 내가 나를 죽이고 굽히면 우리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치료를 받을 것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음은 송명희 시인이 최근에 지은 시입니다. “너 약해졌으나 내가 강하게 하리라 너 넘어졌으나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리라 내가 너를 낮추었으나 내가 너를 더 높이리라 너 잃은 것이 많이 있으나 내가 모든 것으로 채우리라 너 울고 있으나 내가 큰 상급으로 위로하리라”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지나고 있습니다. 온 우주의 모든 관심이 바로 골고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도 저 음부의 마귀와 사탄도 숨을 죽인 채 이 골고다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전 인류의 운명을 바뀌어 놓는 최대 의 사건인 사순절을 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순절에 우리는 영적 싸움에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훈련을 받는 귀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원래 사순절은 부활절에 세례 받을 지원자들을 준비시키는 기간이었습니다. 사순절은 우리가 영적으로 훈련받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훈련받는 기간이 바로 사순절입니다. 준비되지 못하고 훈련되지 못한 성도는 십자가의 은총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영적인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훈련된 당신의 참된 제자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 싸움에 흔들리지 아니할 하나님의 일꾼을 찾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을 통해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신 분은 이 사순절 기간에 철저히 신앙생활 하시고 성수주일을 못했으면 이번 기회에 성수주일을 철저히 하고, 말씀 읽는 데에 게을리 했으면 이번 사순절에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시고 지금까지 물질생활에 헌신하지 못했다면 이번 사순절에 변화되시고 전도를 그동안 못했으면 전도를 열심히 한다든가, 봉사를 열심히 한다든가, 이 사순절은 훈련받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동안 나태한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게으름의 신앙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영적으로 준비하는 사순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서로간의 반목질시하면서 용서하지 못했던 모든 일들을 다 용서하고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위한 우리의 기도로 승리하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허물과 죄를 인한 대리적 고난이 십자가 사건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희생적인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우리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체험하는 복된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기간에 그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그의 사랑,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준 그 사랑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겸손과 그의 낮아지심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의 섬김의 삶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는 이 땅에 아주 비천하게 오셨습니다.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도리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부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그는 약하게 살았던 것 같았으나 끝까지 비굴하지 않으셨으며, 진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몸소 나타내 보이신 가장 강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었고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



잘못은 우리가 저질렀는데 매 맞고 고난의 쓴잔을 마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고난이 십자가는 2000년 전 예루살렘 근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을 조롱하고 그의 말씀을 무시할 때, 애통하는 형제의 아픔을 외면할 때, 십자가의 승리를 믿음으로 받지 못하고 좌절하며 낙심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로 인해 한 번 더 못 박히십니다. 무죄한 자로 고난을 당하시면서도 자기를 못 박는 자를 위해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비신 주님을 감상적으로 생각하며 눈물만 흘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한 우리들은 이 사순절에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용서하고 화해하는 기간으로 삼읍시다. 형제의 아픔을 자매의 아픔을 함께 격려하고 북돋아주는 귀한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고난의 십자가 위에서 주님은 목말라 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곁에서 생수를 약속하신 전능자의 거룩과 위대함이 치욕을 당하는 모순된 순간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존엄성을 포기하시고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역사 속에 오신 주님의 거룩함과 신성이 진정으로 계시된 순간입니다. 다른 사람 위에 서서 군림하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우리도 주님처럼 다른 사람 대신 욕먹기를 각오할 때 빛 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강한 자로서 약한 자에게 당하는 아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매를 맞아 죽은 것이나 그의 방법은 악한 무리들을 동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으로서 악한 자에게 당하신 고난이었고, 강자로서 약자에게 당하신 고난이었습니다. 여기에 최대의 순종의 표본이 되셨고 인내의 본이 되셨습니다. 힘이 있으면서도 약한 자에게 맞으면서 끝까지 견딘다고 하는 것은 갑절의 인내심이 필요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순복 하는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안들을 말을 한마디만 들어도 억울하다고 펄쩍 뛰는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최고의 형벌을 받아 주셨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위하여 일보도 양보할 줄 모르고 한발자국도 옮기기를 아까워하나 예수님께서는 죄 많은 우리들을 대신하여 지옥의 형벌까지 받아주셨으니 그 고통과 그 아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상에서 내 힘만 못한 사람을 억누르고 나보다 강한 사람에게는 아부하는 세대에 예수님께서는 강자로서 약자에게 굴욕을 참아 주셨으며, 창조주로서 피조물에게 고난을 참아주셨으니 이 고난의 위력이 우리를 죄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줄 수가 있습니다, 조그마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고 말을 만들고 말을 돌리고 그래서 결국에는 그 영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모습은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행동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아니해도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말없이 묵묵하게 헌신하시는 그 모습, 교회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도 자신을 감추는 모습들, 교회건축을 하고 나서 교회가 혹시나 어렵지는 않은가 없는 물질을 모아서 드리시는 성도님들의 그 아름다움이 우리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모습입니다. 말없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섬기려고 하시는 많은 분들의 모습이 얼마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모습에서의 나 자신들을 돌아보는 귀한 사순절이 되십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사순절은 자신이 먼저 죽는 것을 배우는 때입니다. 우리는 기뻐하기 전에 통곡해야 합니다. 살기 전에 죽어야 하고 높아지기 전에 낮아져야 하고 예수님의 겸손과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을 배우는 때가 바로 사순절인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양이 성전에 들어 올 때는 살아서 들어오지만 제단에 올라 갈 때는 죽어서 올라갑니다. 아직도 섬김에 있어서 내가 살아서 마치 교회를 내가 부흥이라도 시키고,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우리의 교만이 다시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함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사랑이 단지 교회성장의 이론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화 된다면 그것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자기의 권리만 주장하고 지도자가 권면 하는 말에 이유를 달고 순종치 못한 우리의 모습들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분의 모습을 이 사순절에 보면서 나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것을 허락하셨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고난을 당해도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지만 의로운 자의 고난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죄인에게 주시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성경을 보면 의로운 피가 철철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었을 때,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리어 주시기 위해서 무죄한 짐승을 잡아 피 흘리심으로 그 가죽으로 옷을 해 입혀 주신 이후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방법으로 흠 없는 양과 소를 잡아 피 흘리는 제사를 명령하셨습니다. 죄는 우리 인간이 짓고 죽기는 죄 없는 짐승들이 죽은 것입니다.(창3:21)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흠 없으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실 것과 그로 인한 구원의 역사를 예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그 죄 값으로 피 흘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죄 없으신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죄 없으신 흠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분, 단지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의 그분을 우리는 감상적이 아닌 진정한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승화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내 죄 값은 사망인데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정죄를 받으신 속죄 양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죄 값을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절망에 빠져만 있는 것은 십자가의 효험을 진정으로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날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너희 날 빛이라 부르면서도 우러르지 않고



너희 날 길이라 부르면서도 걷지 않고



너희 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너희 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너희 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너희 날 부하다 하면서도 구하지 않고



너희 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너희 날 어질다 부르면서도 오지 않고



너희 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너희 날 강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너희 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 않느니



그런즉 너희들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독일 튀백 교회의 어느 낡은 돌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도제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처로 괴로워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마음의 고통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죄로 인하여 갈기갈기 찢겨진 그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가 얼마나 깊고 큰지는 몰라도 주님께서 대신 채찍을 맞아주시고, 대신 보혈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이미 그 모든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어진 줄로 믿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지니고 있는 과거의 아픈 기억들, 마음에 맺혀있는 한(恨), 영혼의 상처들이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이 나음을 입어 날마다 심령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구원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져주신 사랑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받아야할 징계를 대신 받아주심으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해주신 평화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가 맞아야할 채찍을 대신 맞아주심으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해주신 치유의 주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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