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언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고 욕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을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고 그들의 아픈 곳을 치료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어떻게 언어생활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요?어떤 특별한 수도원에서 많은 수도승들이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수도원에서 한 가지 엄격히 지켜지는 것은 침묵이었습니다. 모든 수도승이 하루 24시간 동안 반드시 침묵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누구라도 절대로 입을 열어선 안 되었습니다. 단,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수도원장 앞에서 두 마디의 말만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이 수도회에 새로운 수도승이 들어왔습니다. 그 해의 마지막 날이 되자 수도원장이 그 신참 수도승에게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수도승이 한 두 마디의 단어는 이것이었습니다. "침대가 딱딱해요" 수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 수도승을 계속 침묵 수행에 들게 했습니다. 이듬해 마지막 날이 됐을 때 수도원장은 다시 그 수도승에게 할 말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수도승은 말했습니다. "음식이 나빠요." 수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그 수도승을 수행에 정진토록 했습니다. 삼 년이 되는 해의 마지막 날, 신참 수도승은 수도원장을 찾아와 다시 두 마디의 말을 했습니다. "전 그만두겠어요." 그 말에 수도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오. 당신이 지금까지 한 말이라곤 온통 불평, 불평 불평뿐이었소."
부정적인 언어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창조적이고 은혜스런 언어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님의 책에 이런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데이란 사람이 쓴 <세 황금문>이란 글을 보면, 언어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충고의 말이 나옵니다. "말하기 전에 세 황금 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들이다. 첫째 문은 '그것은 참말이냐?'그리고 둘째 문은 '그것은 필요한 말이냐?' 네 마음속에서 참된 대답을 하라. 마지막이고도 가장 좁은 문은 '그것은 친절한 말이냐?' 그 세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 될 것인가 염려 말고 크게 외쳐라."
옛날 우리네 선조들은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을 말까 하노라"하면서 입을 다물어버리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알아왔습니다. 반드시 말을 하여야 할 경우에는 "일언전십사(一言前十思)", 즉 "한마디의 말을 하기 전에 열 번 생각하라"고 충고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귀는 둘씩이나 주시면서 입은 하나만 만들어주신 것은 들은 것의 반만 말하라는 뜻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입을 다무는 것이 입을 여는 것보다 좋으며 침묵이 과연 금일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엡4:25)는 것과, 둘째는 "덕을 세우는 데 소용이 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는 것입니다.
입은 조심해서 사용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사용하여 이웃에게 큰 덕을 세워야 할 귀한 은총의 수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와 같이 경우에 합당한"(잠25:11)언어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를 모았다고 하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 아내는 바구니를 준비해 가지고 나가서 소의 혀를 사온 다음 그 혀를 가지고 그날 요리를 해서 먹었습니다. 며칠 후에 남편이 또 말하기를 오늘은 가장 싼 것을, 모든 음식 재료 중에 싼 것을 사 가지고 오라고 했는데 그 아내는 또 가서 소 혀를 사왔습니다. 남편이 "어째서 가장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했는데 혀를 사오고, 가장 싼 것을 사오라고 했는데 또 혀를 사왔느냐" 하고 물었는데 그 부인은 대답하기를 "가장 맛있는 것이 혀입니다. 친절한 말, 사랑스러운 말, 그 아름다운 말을 듣는다는 것, 이보다 더 맛있는 게 없습니다. 좋은 소리를 듣는 거 가장 맛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왔습니다. 가장 싼 것, 가장 쉬운 것,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쉽게 할 수 있는 싸구려 행동이 바로 말입니다.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그래서 혀를 사왔습니다." 이렇게 지혜를 담아서 대답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장 귀한 것도 말이요 가장 잘못되기 쉬운 것도 말인데 그래서 말에 허물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불행해 지기도 하고 그리고 망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대나라 왕 웃시야라고 하는 왕이 죽었을 때에 선지자 이사야가 경험한 영적경험이 나타나있는 말씀이올시다. 웃시야 왕은 유대나라 왕으로서 52년 동안을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특별히 우상을 멸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 앞에 성실히 행해서 왕과 백성은 태평세월을 52년 동안 누렸습니다. 그러한 좋은 세월이 이제 갔습니다. 그 왕이 죽었습니다. 이사야라고 하는 선지자는 모든 선지자 중에 유독 정치가로 알려져 있으며 방백 중 하나입니다. 그는 웃시야 왕의 친척입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을 의지하고 그 왕궁에서 일하는 그러한 관료 중에 한사람이었는데 그가 의지하던 웃시야 왕이 죽었습니다.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의 장차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걱정이 있는 바로 그런 순간에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소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는 세 가지 체험을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하늘과 그 영광으로 충만한 땅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큰 감격을 얻게 되고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나는 살아남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가 사명을 보게 됩니다. 난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내가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내게 주어진 운명을 혹은 사명을 받게 됩니다. 소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존 칼빈의 유명한 명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먼저요. 하나님을 알고야 나를 압니다. 부모를 알고야 나를 제대로 알고 스승을 알고야 나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나를 아무리 보아도 나만 가지고 나를 알 수가 없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 앞에서 자기의 추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 나아가서는 저주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확실한 정체와 그 정체에서 이어지는 미래의 운명까지도 그가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입술이 부정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입술이 부정한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 아˜ 나는 저주받았다. 나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두려워합니다. 입술이 부정합니다. 동시에 저 부정한 백성 중에 살기 때문에 문화화 되었습니다. 다 같이 부정하니까 무엇이 부정인지 의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 부정한 입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끔 아이들이 가출을 하게 되면 어머니는 정신이 없습니다. 이 아이가 나가서 어떻게 될 것인지 앞으로 돌아올 것인지 안돌아 올 것인지 이게 너무 답답해하는 어머니들이 많은데 가만 확인해보면 그 아이가 공부도 안하고 말썽부리고 그럴 때에 "야! 그럴 바엔 집을 나가라." 나가서 죽어라. 너 같은 것 우리 가문에 필요 없고, 너 낳은 걸 내가 후회한다" 고 말한 경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사실 그 정도라면 그 아들은 효자입니다. 나가 죽으라고 했는데 아직 살아있으니까요.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은 그의 인격이요. 그의 믿음이요. 그의 운명이라”고. 말로 인해서 그는 저주를 받아요. "나는 저주받았다. 부정한 입술을 가졌기 때문에 저주받은 운명이다." 이렇게 이사야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성경은 나의 말과 나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여러분, 거울을 보고 나를 보지 말고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종합하면서 자신을 보아야 됩니다. 부정한 입술이 부정한 운명으로 지향합니다.
험담은 삼자를 죽인다/험담이라는 것은 탈무드에 말하면 삼자를 죽인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말을 듣는 사람을 죽입니다. 내가 험담을 말하게 되면 그 사람 마음이 그만 상하고 무너지거든요. 또 하나는 험담의 대상을 죽입니다. 이 내용에 있는, 내가 지금 험담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죽습니다.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은 험담하고 있는 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말, 부정적인 말, 더러운 말을 하지 말 것은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을 죽이고 내 심령이 지금 황폐해지 운명이 삐뚤어져 나갑니다.
입술을 태우시는 하나님 /성전 환상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은 먼저 제단의 숯불로 이사야의 입술을 태우셨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체험에서 일어난 문지방이 요동하고 집에 연기가 가득 차는 현상을 보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고백한 것이 자기의 부정한 입술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의 하나 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33편 1절에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 또 147편 1절엔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고 했습니다.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의 백성이란 즉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지 않고 찬송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마땅한 일을 하지 않고 염려하며 세상을 바라보며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구하지 않았던 죄악을 고백한 것으로 보입니다.
영혼의 부흥은 찬송의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예배 때마다 찬송을 많이 부르고 크게 부르고 찬송 부르기를 즐거워합시다. 찬송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킬 것입니다. 찬송이 없는 성도는 늘 불평하며 아직 버릇없는 어린 아기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는 성도는 그의 삶이 성숙해지고 새로워 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12세기의 영성가인 끌레르보의 버나드 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가 자신의 책에서 진리로 나가는 길 세 단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고 의롭게 되고 정결하게 되는 길은 먼저 결정적인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하고야 유순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노를 쉬게 한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의 말은 언젠가는 터지게 마련이고 언젠가는 불의로 치닫기 마련입니다. 아주 낮추고 낮추어서 겸손하게 되면 말이 부드럽고 온유하고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모두 이해하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 믿어주는 마음, 내 편에서가 아니라 저 편에서 생각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차면 우리의 말은 전혀 달라집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순결을 지켜야 됩니다. 항상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고 깨끗한 순결, 입술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오순절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징은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방언은 언어입니다. 언어의 변화가 먼저 오는 것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말이 달라진 것입니다. 소통하는 말로 그리스도적인 말로 복음전하는 말로 언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 보면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배추나 무를 소금을 쳐서 잠깐만 나두면 부들부들 해집니다.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맛없는 것도 맛이 있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녹아 없어집니다. 자기 정체는 녹아 없어지면서도 자기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소금입니다.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부드럽게 화목하게 맛있게 그러한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사명의식을 받게 됩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가겠나이다." 여기서 선지자가 됩니다.우리는 지금 언어 폭력시대에 살고 있는데 언어폭력이 실제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말초 신경적이요 극단적이요 속된 말을 하고 잔인한 말을 합니다.
언어는 그 마음에 있고 그 인격에 있고 그 신앙에 있고 그 운명으로 치닫게 됩니다. 입을 새롭게. 제단 숯불을 입에다 대서 지져버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그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고 입술이 새롭게 되고 다시 내 심령이 새로워지고 내게 듣는 사람 모두가 새로워질 것이고 그에게 새로운 운명이 전개될 것입니다.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톨스토이 민화집 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이야기는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 사람들의 사랑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사랑에 힘입어 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는데 어색할 뿐 아니라 인색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사랑을 표현하고 나누는 일을 배우고 또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사랑의 나눔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년 간 결혼 상담을 한 후 게리 채프먼은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사랑의 언어, 즉 사람들이 사랑을 구사하고 이해하는 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생명의 말씀사)"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는 이것입니다.
제1의 사랑의 언어: 인정하는 말/마크 트웨인은 "나는 한 번 칭찬을 받으면 두 달간은 잘 지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 년에 여섯 번 칭찬을 받으면 일 년 동안 사랑의 그릇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은 격려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칭찬하는 말이나 감사의 표현은 사랑을 잘 전달하는 힘이 있으며 당신이 그를 인정한다는 하나의 좋은 표현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사랑의 감정을 말로 전달하고 싶으면 온유한 말을 써야 합니다. 사랑은 온유하기 때문입니다.
제2의 사랑의 언어: 함께하는 시간/"함께하는 시간"이란 누군가에게 온전히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저 함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하는 활동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가 감정적으로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활동은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아버지가 두 살짜리 아이와 공굴리기를 할 때 중요한 것은 놀이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 있는 감정입니다.
제3의 사랑의 언어: 선물/선물을 줄 때 우리는 반드시 그 사람을 생각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선물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생각만 품지 말고 그 생각을 선물로 줌으로써 선물은 사랑을 실제로 표현하는 수단이 됩니다. 선물은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제4의 사랑의 언어: 봉사/이것은 상대방이 당신에게 원하는 바를 해주는 것을 말하는데 그를 도와줌으로써 그를 기쁘게 하고 그를 위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들은 생각하고, 계획을 세우고, 시간을 내는, 노력과 정력을 요구합니다. 자발적으로 이러한 일을 하면 정말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진리를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갈5:13)고 요약했습니다.
제5의 사랑의 언어: 육체적인 접촉/아동 발달 과정을 연구한 많은 보고서에 따르면, 육체적인 접촉을 전혀 갖지 않고 지낸 아이들보다는 안아 주거나 키스를 해 준 아이들이 훨씬 건강하게 자란다고 합니다. 손을 잡아 주거나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는 것은 사랑을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사랑은 선택이며 사랑은 변화를 가져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혼율이 갈수록 높아져가고 많은 청소년들이 가출하고, 사고를 치는 것은 우리가 텅 빈 사랑의 그릇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사랑의 언어로 말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이, 그의 삶이 풍성해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언어/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말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있고 내가 한 말은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시며 그 한 말들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언어의 종류
1. 입술의 언어/마음에도 없는 입술로만 하는 말입니다. 엘리베이터 안내양이나 큰 식당의 도어맨의 인사와 같은 종류의 말입니다. 상대방의 느낌이나 기분은 생각하지 않고 내 감정대로 하는 말이므로 상대방에게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합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교회 안에 이런 언어가 많은 것을 알고 예배 대표기도를 100일 전에 통보하면서 "나와 같이 준비기도 합시다."라고 말하며 준비 기도를 시켰는데 교회가 변화되고, 기도를 준비한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고 감격해서 울었다고 합니다.
2. 머리의 언어/지식의 말, 정보를 전달하는 언어를 말하는데 이런 말로는 사람이 변화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지식이 있는 사람에게 존경을 하지 않으며 똑똑한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어리숙한 사람에게 영향과 변화를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코미디 중에서도 바보 같은 행위를 좋아합니다.
3. 가슴의 언어/느낌의 언어이며, 이해하는 말, 공감하는 말입니다. 느낌은 생각 이전의 것입니다. '느낌은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아닙니다. 느낌에는 윤리성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느낌과 감정을 표현할 때 대개 4가지로 표현하는데 즉,'기쁘다, 슬프다, 화난다, 무섭다.'이다. 존 포웰은 여기서부터 참다운 대화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4. 혼의 언어/사람을 변화시키며 치유시키는 생명의 언어입니다. 입의 말보다도 8 백배에서 1천배에의 영향을 끼치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설교나 강의라도 듣는 이들은 24시간이 지나면 20%밖에 기억하지 못하고 일주일이 지나면 제목정도만 기억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훌륭한 목사, 교사를 10명씩 조사해 본 결과 그들은 한결같이 혼의 말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혼의 언어, 생명의 언어, 치유의 언어는 입술을 통해서도 말하지만 눈과 손과 몸으로 하는 몸의 언어(body language)를 통해서 더 많이 전달된다고 합니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말하는 자세나 경직된 자세로는 듣는 사람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진지한 자세로 가까이 다가가서 힘 있게 악수하거나 상대방의 눈을 보고, 미소를 지으면서 하는 대화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어떻게 하면 가정생활에서 혼의 언어를 할 수 있는가?
1. 말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내가 한 말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언젠가 낱낱이 고해야 될 날이 있습니다. 깨어진 그릇과 쏟아진 물과 내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같이 원상회복이 불가능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내 입에 달려 있으며 지금 현재의 나는 언젠가 내가 한 말의 열매를 지금 따먹고 산다는 것을 깊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잠18:20, 21)
2.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지 않도록 훈련해야 한다.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격려,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릴 때 자라면서 알게 모르게 하루에 약 430가지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보편적으로 자주 쓰는 말, '안된다, 죽겠다, 불경기다, 장사가 안 된다, 지겨워, 피곤해.' 같은 말은 안하는 것이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3. 우리말의 원천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일이다.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삶(Christian Basic Life)즉 말씀, 기도, 교제, 증거의 삶에 시간을 지속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암송과 묵상'이 최고의 방법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경건의 시간으로 꾸준히 실천합니다. 싫든 좋든 우리말은 우리의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것이 그대로 내 입술을 통해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은 그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
이해인 수녀의 시 “나를 키우는 말” 을 소개합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서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기도: 하나님 아버지,오늘도 신령한 세계를 바라면서도 아직도 해결되지 아니한 문제가 있고 정결함을 원하면서도 아직 입술이 정결해지지 못함을 고백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셔서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새로워지게 하시고 입술이 정결해져서 내 심령이 정결해지고 듣는 자가 정결해지고 이 사회가, 그리고 우리의 앞날이 정결해질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