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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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3-12-22 16:34:52, Hit : 50
File #1    성탄절_말씀_(자료2).hwp (111.5 KB)   Download : 1
Subject   성탄절 말씀(자료2)
성탄절 말씀(자료2)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40장1-5)
옛날 헬라 철학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같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한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자가 있었는데 어떤 날
친구 집에 초청을 받아서
가서 늦도록 즐기며 대화하고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게 될 때
그 친구는 생각했습니다.
이 분은 앞을 보지 못하지만
이 친구가 가는 길에 어두운
데서 어떤 사람과 이렇게
부딪히면 그러면 어려움이
있을 거 같아서 이 시각
장애자의 손에 촛불을
켜서 등불을 하나 손에
들려주었습니다.
"이러고 가면 당신은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은 당신을
보게 될 테니까
길에서 부딪히는
일이 없을 거요."
이제 이 친구는 등불을
손에 들고 가는데 정말
예측했던 대로 골목에서
어떤 사람과 아주
크게 충돌을 했습니다.
그럴 때에 이 친구는 화가 났습니다.
"나야 어차피 앞을 못 보지만
눈뜨고 다니는 사람이
내 손에 있는 등불을 못 보냐?
왜 날 이렇게 충돌을
하게 만드느냐?"
그러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같이 충돌한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의 손에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소"
라고 말했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도 문제고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자,
내 손에 있는 등불이 이미 꺼졌어요.
그것조차도 모르고 있다는 거죠.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큰 희망이 온다" 라고 하는
제목의 책 한 권이 있습니다.
잭 캔필드와 마크 빅터 한센이
공저로 내놓은 책인데 주제는
소망에 대한 책입니다.
그 책중에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생각을 혹은
지혜를 이렇게 모아서
몇 마디로 정리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장 큰 핸디캡은 공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핸디캡이라고 하면
물리적이거나 경제적이거나
혹은 육체적인 핸디캡을
생각하지만 정신적
핸디캡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가장 큰 핸디캡은
용기가 없다는 거예요.
두려워하고 있다.
용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으니까 말이에요.
가장 좋은 날은 언제나 오늘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어제라고 생각해요.
또 어떤 사람은 먼 훗날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올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장 좋은 날은 항상 오늘
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가장 하기 쉬운 일은 실수다.
가장 소용없는 재산은 자존심이다.
자존심 지키느라고
여러분 수고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자존심,
그것이 망조입니다.
가장 소용없는 재산입니다.
가장 큰 실수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가장 큰 방해는 이기주의다.
무슨 일을 할 때 딱 걸려듭니다.
이기주의가 중간에 나서면
되는 일이 없어요.
이건 큰 장애물입니다.
사랑도 친구도 사회도
공부도 뭐든지.
심지어는 운동도 이기주의가
딱 작용을 하면은
그건 망조가 됩니다.
이건 큰 방해올시다.
큰 위안은 잘 끝을 내는 일이다.
가장 불쾌한 사람은 불평만을
말하는 사람이다.
여러분, 불평하는 사람
그거 구제불능입니다.
그 사람과 사귀다 보면
나까지 아주 어지러워집니다.
불평하는 사람 가장
불쾌한 사람입니다.
가장 큰 파산은 열정
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가장 큰 필요는 상식이다.
우리는 높은 지식을 원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은 상식입니다.
상식에서 떠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가장 사악한 기분은 다른
사람의 성공을
질투하는 것이다.
가장 못된 마음,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가장 못된 마음은
질투하는 마음이에요.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다.
용서받는 것도 최고의 선물이요.
남을 용서하는 것도
가장 큰 선물입니다.
가장 위대한 순간은 죽음이다.
가장 큰 지혜는 하나님이다.
이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은 사랑이다.
이렇게 그의 사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성경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어떻게? "복역의 때가 끝났다. 죄사함 받았느니라" 말씀하시고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신약에서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이 무슨 뜻입니까? 다가오는 미래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예비한다는 말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에요. 미래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라 그 말입니다. 현재와 미래, 생각할 때 우리는 현재에서 미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생각합니다만은 그러나 사실은 미래를 위해서 현재가 있는 겁니다. 미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요. 그 미래를 위해서 현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좀더 나가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것을 생각할 때에는 우리는 보이는 데로 보이지 않는 것도 좌우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보이는 것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원인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결과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위대하고 큰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생각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소중히 여길 줄도 모르고 관심을 가질 줄도 모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크게 생각을 합니다.
제가 결혼 주례를 할 때마다 그 얘기를 합니다만은 이 자리에는 없지만 너희 두 사람 살아가는 중에 태어날 자녀를 생각해 보자. 또 그 후손도 생각해 보자. 지금은 신랑 신부지만 이제는 좀 있으면 아빠 엄마가 되고 그 다음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된다. 그때를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가야지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순간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못되는 것이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 지금은 보이지 않는 저 미래를 보는 듯이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이요. 그래서 여러분 잘 아는 히브리서 11장에서는 신앙을 그렇게 정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라고. 그것이 믿음입니다. 미래가 더 큰 것이에요. 현재에 의해서 미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의해서 현재가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의해서 미래를 보는 것이 미래학이라고 합니다. Futurelogy 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미래학자들이 글을 씁니다. 미래학에 대한 책이 많은데 누가 한 번 그렇게 비판하는 글을 썼더라구요. 미래학자의 예언 치고 맞는 일이 하나도 없답니다. 그러나 미래학자의 말은 모두가 믿는답니다.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왜요? 미래학이란 과거로부터 현재로 그리고 현재로부터 미래를 생각해요. 그러나 종말론이라는 것은 Eschatology 라고 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미래를 생각하고 미래로부터 현재를 생각합니다. 그것이 종말론이요 바른 신앙이올시다. 여러분 예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한다, 예비한다, 그건 뭡니까? 현재에 있으면서 미래를 생각하는 거예요. 저녁에 살면서 아침을 생각하는 거예요. 금년에 살면서 내년을 생각하는 마음, 이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 그게 바로, 그것이 예비한다는 거예요. 또 그런가하면 미래에 대한 확실한 것을 믿어야합니다. 중요한 건 이것입니다. 내가 믿거나 말거나 미래는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되요. 그것도 가장 확실한 문제에 대해서. 결정적 미래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어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요. 받아들이면서 오늘을 생각합니다. 미래를 위해서 오늘을 사는 사람, 바로 그것이 지혜요, 그것이 신앙생활이올시다.
우리 한양 아파트 앞에 가면 로데오 거리라고 해서 저녁에 가면 굉장합니다. 내가 알기에 30 넘은 사람은 거기 갈 때가 못돼요. 맨 젊은이들만 와글와글하는데 제가 어느 찻집엘 들어갔는데요. 다 돌아보니까 부끄러워서 앉아 있을 수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얘기인 즉은 조금 나이들은 사람이 거기 들어가면 "좀 사양해 주십시오." 나가시라 그런다 그래요, 영업 안 된다고. 제가 그 젊은이들의 거리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좀 나쁜 생각이지만 '너희들도 두고 봐라 이제. 너희들 젊은이 때가 그대로 항상 있을 줄 아냐?' 너희 젊음이 항상 있냐고요. 시간문제다 이거. 나도 너희들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했죠. 여러분 그걸 알아야됩니다. 이 젊음이라는 게 항상 있는 게 아니거든요. 항상 있는 줄로 착각하는 젊은이가 그게 멍청한 거죠. 소년은 장년을 생각하고 장년은 노년을 생각해요. 산 사람은 죽는 시간을 생각하고 살아야지요. 이걸 생각하지 못하면 바보 중에도 바보죠. 인간이 그게 다른 거예요. 동물과 다르다는 게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거든요.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대학에 입학했으면 졸업을 생각해야될 거 아닙니까? 요새 흔히 말하는 인기학과라는 게 무엇입니까? 공부가 재미있다고요? 그게 아니에요. 졸업한 다음에 취직이 잘 되느냐 안 되느냐, 그게 인기학과죠. 벌써 입학하면서부터 취직을 생각해야죠. 취직도 안되는 과목해서 뭘하노. 그 공부해 가지고 누굴 굶어 죽이려고? 안 그렇습니까? 벌써 입학하면서부터 졸업해 가지고 앞으로 한 평생 무엇을 하느냐, 생각을 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냥 좌우간 대학 입학하고 볼 거다. 부정입학이든 뭐든 입학하고 볼 것이다. 나 요새 그 무슨 부정입학했다는 얘기 들을 때마다 난 그 부모님을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그런 멍청한 부모가 어디 있어요? 이 아이가 일생동안 그걸 괴로워하고 살 생각을 못해요. 그리고 자기 자식에게 단 한번도 진실하라, 공부하라,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못하는 이런 바보를 만들건대 말이에요. 거기다가 돈을 몇억씩 내고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고. 참 이렇게도 어리석을 수가 있나? 이걸 생각해 보세요. 미래를 예비하는 거죠. 다가오는 미래를 위하여 예비하는 마음이 있어야 해요.
그런고로 예비한다는 것은 몸은 현재에 있으나 벌써 앞에 가 있다는 것이에요. 생각은 벌써 저 앞에 보다 더 먼 앞에까지 가서 생각을 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 특별히 그 많은 비유들은 전부가 종말론적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중에 비유 중에도 또 대표적인 비유가 열 처녀 비유같은 것들 있지 않습니까? 또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준비한다. 아, 처녀이면은 결혼하고 결혼하면은 신랑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지금 미리 준비해야된다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로 신앙이올시다.
성경에 보면은 참 유감스럽게도 어처구니없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람들의 사상을 단 한 마디로 말하면은요 메시아닉 에스펙테이션, 메시아 대망사상입니다. 유대사람들의 모든 철학과 종교 신앙은 거기에 집중되어 있어요. 메시아 대망. 메시아가 오신다. 메시아의 나라가 온다. 이것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이 제사장 바리새 교인, 서기관들이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시고 나니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는 아이러니가 있는 거예요. 그럼 왜 이런 일이 있었을 것 같습니까? 저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 소원을 이루려고 했어요. 나는 부동자세요. 내 욕망 내 처지는 이대로 현재라고 하는 직선 상에서 메시아를 맞으려고 했어요. 내 소원 내 욕망을 고대로 두고 거기에 집착하면서 예수를 맞았는데 예수가 내 맘에 들지 않아. 메시아가 내 맘에 안 들어. 결국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되었습니다. 과거와 현재에 집착해 있는 사람, 자기 자신을 비울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를 위하여 열심을 내도 마찬가지요. 그는 참으로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이 세가지로 말씀하세요. 먼저 자기를 비우라. 자기를 부인하라. 그리고 자기 십자가가 뭡니까? 십자가는 곧 죽음입니다. 나 자신을 죽여버리고 나 자신의 고집, 나 자신의 철학, 나 자신의 과거, 절망, 교만 할 것 없이 나 자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리고 그리고 나를 좇으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확실한 메시지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봅니다. 예비한다. 뭐를 예비하느냐? 대로를 준비하라, 그랬어요. 대로, 큰 길을 준비한다. 이 말은 영어에서 주로 번역할 때는 하이웨이라고 합니다. 고속도로입니다. 여러분 이 길이라는 거 참 중요합니다. 좋은 길, 그러면 가기가 얼마나 편합니까? 제가 저 북녘 땅에 갔을 때, 몇 곳에 다니면서 비포장 도로가 많아서 이렇게 좀 튼튼한 차를 가지고 갔습니다만은 가다가 비포장 도로가 덜컹덜컹하면서 가다가 펑크가 됐어요. 스페어 타이어를 가지고 갈아 끼웠어요. 그것이 또 펑크가 됐어요. 내 일생에 스페어 타이어까지 펑크가 난 건 처음이요. 그래 가도 오도 못하는 겁니다 이거는 이제는. 타이어 둘이 터져나갔으니까. 이런 덜컹거리는 길을 달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다는 겁니까? 자동차가 좋으면 뭣해요. 다 망가지고 말아요. 그런데 이렇게 다니다가 고속도로, 이 포장된 도로에 딱 나서면 여러분 운전하시는 분들 얼마나 좋습니까? 싹 터질 때, 그 기분이야 이루 말도 못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생각을 해요. 이 길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고속도로.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고속도로가 있는 사람이 있듯이 마음이 활짝 열리고 마음에 주의 길이 예비된 사람, 한 말씀 한 말씀이 그대로 마음속에 그대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귀한 열매를 맺습니다만은 자, 이게 장애물이 많아요. 돌짝밭과 같아요. 도대체 말씀을 바로 받아들이지를 못해요. 이건 참으로 힘든 사람이에요.
저는 한 40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만은 제가 강의할 때 좀 엄하게 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내가 강의하는 동안 중간에 질문하지 마라. 다 들어두고 집에 가서 생각해 보고 다음에 와서 질문을 해라" 그렇게 합니다. 왜요? 듣는 도중에 마음에 의심이 생겨 가지고 "교수님" 해 가지고 물어보고 그러면 여러 사람에게 방해를 줄 뿐 더러 나도 강의 하다가 헷갈리고 너 자신이 손해를 보는 거다. 지금 들을 때는 이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100% 옳다고 생각하고 그냥 들어둬. 그게 중요한 거요. 그 시간에 뭐 고개 흔들면서 '아니요. 나는 생각이 달라요' 요런 생각하는 동안 손해는 네가 보는 거다. 여러분 어떤 자세로 듣습니까?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에 고속도로가 있는 거예요. 아무 장애물이 없어. 그냥 들어와야 되고요.
또 성경은 말합니다. 골짜기는 메우고 산은 낮춰라. 교만한 사람은 낮추어 겸손하게 하고 절망하는 사람은 소망을 가지라. 그래서 평정해서 여기서 고속도로를 만들어 가지고 주님을 영접하라 하는 그런 말씀이올시다. 그리고 이 '대로' 라는 말은 뭐냐하면 즉시 받아들인다는 뜻이죠. 천천히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대로 확 들어오도록 그렇게 받아들이라, 그런 뜻이올시다.
마틴 루터의 설교 중에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사탄이 어느 날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이제 세상에 사람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파송하는 기간에 그들에게 이렇게 훈시를 했다고 합니다. 가서 어떻게 해야 많은 사람을 유혹해서 지옥으로 끌고 오겠느냐? 하니깐 한 사탄이 말하기를 "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돌아가면서 얘기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오래 전부터 해먹은 건데 그거 그 방법으로는 안된다" 그러더래요. 또 한 사탄이 말하기를 "나는 돌아가면서 지옥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지을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사탄이 빙그래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렇지 않아도 지옥을 안 믿어" 그러더랍니다. "그러면 고난을 주겠습니다. 고통을 많이 주어야 되겠습니다." "고통을 주면은 그 사람들 순교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당한다고 더 기뻐한다" 그래 안된다 이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 왕초 사탄이 딱 한 말이 "그냥 가서 이렇게 말해라. '서둘 것 없고 천천히 예수 믿으시오'." 천천히. 누구나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천천히, 그러다가 세월 다 가는 거예요. 선한 일도 천천히, 뭐든지 좀 후에, 조금 더 있다가. 바로 이것이 예비되지 아니한 마음이요. 예비된 마음이라는 것은 들으면서 바로 받아들여요. 즉시 받아들이고 즉시 순종하는데 있는 거죠. 그에게만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말합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리고 주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의 길을 예비하라. 내 길이 아니요. 주의 길입니다. 엘마 레더맨이라고 하는 분은 단체보험을 세일하는 사람인데 보험세일즈를 아주 독보적으로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큰 부자가 된 사람인데 어떻게 보험을 세일하느냐? 그 비결이 뭐냐? 그러니까 이 분 얘기를 들어보세요. 나는 누구 한 사람을 만나려면 그 사람을 위해서 일주일동안 준비합니다. 그 과거가 어떤지 그 가정이 어떤지 형편이 어떤지 다 연구를 해 가지고 속속들이 알아 가지고 그 다음에 딱 만나서 "당신을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준비하는 거예요. 준비 없이 길가는 사람들에게 "보험 드세요" 그러면 되겠어요?
우리가 주님을 맞이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하고, 많은 성경지식을 얻고, 우리 마음을 비우고 주를 맞이해야돼요. 큰 유감스러운 것은 예수님 당시에 그렇게도 많은 사람이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진작 오시니까 예수를 박해했어요. 그렇게도 소원하면서 예비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마음의 빈 그릇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여러분 그 오물이 가득한 더러운 그릇에다가 무엇을 담을 수 있겠어요? 금년 성탄에 우리는 마음을 비우십시다. 절망이든 교만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다 버리세요. 작은 성공이 큰 미래를 망칩니다. 깨끗이 비워버려. 아주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오시는 주님을 영접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가장 큰 기적이 나타나는 성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보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생각과 뜻은 항상 과거에 붙들려 있습니다. 지난날의 노예가 되어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시각조차 없는 저희들입니다. 금년에도 다시 성탄을 맞습니다. 어지러운 과거를 다 잊고 메시아로 말미암은 밝은 미래를 바라볼 수 있고 영접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현재에 의해서 미래를 보지 말게 하시고 주님이 약속해주신 밝은 미래에 의해서 오늘과 내일을 볼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탄준비(1)
눅1장26-56
다음주일은 성탄주일입니다. 이 시간에는 성탄준비라는 주제로 먼저 마리아의 성탄준비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마리아는 성탄을 위한 준비된 그릇이었습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 가브리엘이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것을 예고했습니다. 천사의 예고 중에 놀라운 세 가지 비밀한 사건이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 천사가 하찮은 마리아를 찾았다는 사실.
마리아는 평범한 시골 처녀요. 때문에 평범한 남자 요셉과 약혼했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했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천사의 방문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왜 가브리엘이 수많은 여인가운데 마리아를 찾아 주었습니까? 본문28절이 답해 줍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한 것은 마리아가 예뻐서도 아니고, 재물이 많고, 학문이 많아서도 아닙니다. "은혜를 받은 자여"한대로 천사의 방문은 마리아에게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입니다. 생각하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찾아와 주신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성육신 사건, 도성인신사건,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신 이 사건이야 말고 최고의 은혜요, 또 이것이 최초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와 주심은 보통한 일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리아는 선지자, 예언자, 당대의 위대한 여성 지도자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찮은 마리아를 찾아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뽐내는 사람에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순결한 성도, 순수한 성도, 마음을 텅 비운 성도가운데 찾아와주시는 우리 주님이십니다. 금년 성탄절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평안이 생겨납니다. 본문28절에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고 했습니다. 평안은 돈을 주고 살 수 없습니다. 주님으로부터 그냥 공짜로 받은 선물입니다. 평안은 농부가 밭에서 고구마를 캐듯이 땅에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출처가 하늘입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찬송가 가사와도 같습니다. 평화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선물인지라 '하나님이여! 우리 가정에 평안을 주시옵소서, 우리 교회에 평안을 주시옵소서'이렇게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은혜를 받으면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본문30절입니다. "마리아여 무서워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왜 두려움이 없어집니까? 본문28절이 답합니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 시험이 와도 겁이 없습니다. ♬시험이 와도 겁없네♬찬송을 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내게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입니다. 마리아의 형편은 도무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자격으로 보면 그에게는 자격증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자격증을 따 낸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기억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로다"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오늘밤에 세상을 떠날지라도 천국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둘째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점.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1) 그것이 생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본문34절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여기 안다는 말은 성적인 관계를 뜻합니다. 마리아는 자기의 처녀성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남자관계 없이 어린아이를 낳는 여인은 하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이 일이 가능할지라도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요셉으로부터 버림받게 될 것이고, 어쩌면 구타를 당하고 파혼소송을 당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신22:23-24를 보면 처녀가 남자와 정혼한 후에 다른 남자와 간음하면 성밖으로 그들을 끌어내어 돌로 쳐 죽일 지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8장을 기억하십니까? 어떤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군중들은 이러한 여자를 율법에 보면 돌로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다그쳤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한마디 말을 들은 군중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뿔뿔이 양심에 가책을 받아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여자만 남았을 때 "여자여 너를 치려는 자가 어디에 있느냐?"죽을 뻔한 생명이 살게 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찌 마리아라고 예외일수가 있겠습니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천사의 말을 들었을 때 마리아에 입장에 서보면 아무리 옳게 여기려해도 이 메시지는 복음이 아니라 파음이요,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생각하면 복음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복음이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주와 심판이 됩니다. 다시말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구원, 축복이 되는 복음이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저주, 심판이 되는 파음이 된다는 말입니다. 처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으리라는 복된 소식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마리아가 이 복음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외면해 버렸더라면 마리아는 사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찌했습니까? 성탄준비를 착실하게 한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세 가지 자세를 배우면서 우리함께 성탄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① 겸손의 자세입니다. 천사의 통보를 받았을 때 만일 마리아가 조금이라도 교만한 여인이었다면 '그러면 그렇지 나를 빼 놓을 수가 있는가'자기가 선택된 것을 아주 지당한 것으로 여기면서 어깨를 으시대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문38절입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라고 말했습니다. 계집종이라는 말은 굉장히 계급이 낮은 하인을 뜻합니다. 마리아는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자기의 신분을 하인의 자리에다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실 때 친히 낮은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성탄절을 준비하는 우리모두가 낮은 말구유처럼 겸손해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이러한 마음가운데 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마음을 비우고 한없이 낮은 자리에서 우리 주님을 영접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② 믿음의 자세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본문35절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천사가 전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처녀의 몸인지라 생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생리적 불가능이 곧 하나님의 불가능은 아닙니다. 여기 덮는다는 말은 감싼다는 말을 지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마리아를 감싸면 불가능한 마리아는 감추어지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나타날 것을 믿었습니다. 생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일이 가능할 것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내게 감싸질 때 모든 불가능은 사라지고 내게 능력만 나타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③ 순종의 자세입니다. 38절을 보면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본문37절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천사가 말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아멘'이렇게 말씀을 받고 순종하기로 결단했다는 말입니다.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이 말을 산부인과 의사가 말했더라면 '아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순종을 했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사람이 있습니다. 학자의 말, 과학자의 말, TV의 말, 신문의 말은 철썩 같이 믿고 순종을 합니다. 비타민C가 좋다고 하니까 약국에 비타민C가 동난 적도 있습니다. 이렇게 TV의 말은 믿고 순종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안 믿으려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셋째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가
보통아이가 아니라는 것.
아직 낳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유치원에 입학
시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리부터 이름
까지 지어 주셨습니다.
본문31절입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예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여호수아, 헬라어로는 예수스, 다시말하면 예수라는 말은 여호와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마1:21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면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는 예수 곧 그 이름이 구주이시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사건이고 충격적인 사건이었겠습니까? 처녀의 몸에 잉태된 아이, 그 아이가 인류의 메시아인 것을 천사가 밝혔을 때에 아마 마리아는 너무도 놀랐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계속해서 낳을 아들 예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32절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의 아들이 아닙니다.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또 다윗의 위를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본문 33절에 보면 "야곱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라고 했고 "그 나라가 영원하리라"고도 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요약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입니다. 결코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질문이 하나 있다면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시냐?'이러한 물음일 것입니다. 2000여년 동안 수많은 인생들이 줄곧 물어온 물음이 있습니다. 철학적이면서도 실존적인 그리고 구원을 갈망하는 인생의 절규라 할 수 있는데 '도대체 예수님은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라"대답을 못하니까 재차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나 하느냐"그렇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묻습니다. "그대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는가?" 정답을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지성인들, 철학자들이 물었습니다. 오늘도 젊은이들이 묻고 있습니다. 그런데 계4:7에 보면 네 생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을 깊이 연구한 성경 학자들은 사복음서의 별명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복음, 누가복음은 사람복음, 요한복음은 독수리복음 전혀 무리한 해석만은 아닙니다. 사실 마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2:2에 보면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찾아와 묻는 말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라고 했습니다. 사자는 밀림의 왕입니다. 왕이신 예수님을 묘사한 마태복음이 사자의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말을 했습니다. '누구의 가슴에도 예수님만은 왕으로 모셔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떤 성도가 충성된 성도, 교회에서 존경받는 성도입니까? 예수님은 성도의 왕이십니다. 따라서 왕을 왕으로 모시고 그 왕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충성된 성도요, 교회에서 존경받는 성도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가정의 왕이시고, 우리 교회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교육계의 왕이시고, 경제계의 왕이십니다. 국가가 부강하게 되기를 원할진대 예수님을 위대한 왕으로 영접하는 국가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의 종으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글자그대로 마가복음은 송아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식사할 겨를이 없이 동분서주(東奔西走) 일하실 때에 송아지처럼 일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일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을 잘 가꾸는 일군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설명하는 사람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꿈 많은 10대 시절을 다른 복음에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12살된 소년의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니다. 그리고는 인간을 잘 소개했습니다. 우시는 예수님, 아파하시는 예수님, 슬퍼하시는 예수님, 배고파하시는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그려놓은 인간, 바로 그 모습이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예수님을 보면서 인간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가르쳤는가?를 중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어렵게 여겨지는 요한복음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가르쳤습니다. 도성인신(都城人臣)하신 예수님을 가르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를 가르치고 죄인이 어떻게 영생을 얻을까?를 가르쳐주었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요17:3을 보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안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서 '야다'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역시 부부지간의 관계를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알 때 교리 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부부지간의 관계처럼 깊은 체험,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독수리는 하늘높이 올라가는 왕자입니다. 하늘의 왕자입니다. 그러나 새끼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땅에 내려와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올라가 승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려가 죄인의 모습이 되어 십자가를 지고 죽어주신 예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가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성경에서 성탄을 축하하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성탄을 축하하지 말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말씀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성탄을 축하하는 그 축하 속에 예수님의 죽음이 빠져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라는 말은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성탄을 축하하는 일은 좋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빠뜨려 버린 축하는 무의미하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탄생했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잃어버린 크리스마스는 무의미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십가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성탄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선물교환으로 끝나는 성탄절이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어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성탄절을 준비할 때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고, 하늘의 영광이 되어질 것이며, 죄인이 복음을 만나고, 이 땅에 평화가 도래해 질 것이 아닙니까? 이와 같은 의미 있는 성탄절 되어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준비 (II)
(눅1장18-25)
오늘은 우리 모두에게 소망을 주시고, 구원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축하하는 기쁨의 성탄절입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과 가정가운데 기쁨과 평화가 더욱 충만하실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마리아의 성탄준비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요셉의 성탄준비에 대하여 말씀 드리면서 은혜를 사모하려고 합니다.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골의 정숙한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동거하기도 전에 잉태를 했습니다. 그 때 요셉이 얼마나 당황했겠고 마음가운데 고민하였을까요? 바로 그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요셉아"불러서 세 가지를 당부하십니다. 하나는 마리아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때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 시간 본문 말씀 중심해서 세 가지 내용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요셉의 인격.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①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본문19절을 보면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죄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 의로운 사람이란 정의롭게, 바르게,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잘사는 사람 많습니다. 그러나 요새 요셉처럼 살아보려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혀 죄없는 사람을 찾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허물이 있을지라도 옳게, 바르게, 정직하게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보려고 힘쓰는 요셉과 같은 의로운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의로운 사람이 없었기에 소돔과 고모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정죄할 줄 몰랐습니다. '나쁜 여자, 죄를 범한 여자'그렇게 정죄하지 아니했습니다. 또 요셉은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고집이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본문24절에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요셉은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작정하고 주님을 찬송하면서 순종하는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오늘 성탄주일에 주님께서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요셉인생을 찾고 계십니다. 이러한 가정에 임하기를 원하고 이러한 성도 만나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땅에 의로운 사람이 누구냐? 묻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② 남의 허물을 드러내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요셉은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몹시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19절을 보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허물을 찾으려고 뒷조사하며 찾으면 그것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입니다. 다시말하면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티를 지적하려는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고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치료해 줄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시말하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배가 불러 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마리아의 사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여기 부정한 마리아를 보라. 배가 부른 것이 그 증거가 아니냐?'이렇게 나팔을 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리아는 물론 요셉도 함께 패가망신(敗家亡身)되었을 것입니다.
③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우리의 인격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20절을 보면 "이 일을 생각할 때" 이 말은 깊이 숙고했다는 뜻이요, 무슨 곡절이 있었겠지 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마리아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때 20절을 보니까"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불렀습니다. 왜 요셉아?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 요셉아?"불렀을까요? 마1장 서두에 보면 메시아 족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때가 차매 요셉에게 메시아 곧 한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떠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팔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입니다. 천사가 누구에게 나타났습니까? 생각이 깊은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두려워말라"격려하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천사를 만나 뵙는 금년 성탄절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요셉의 믿음.
요셉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천사가 현몽한 아들에 대한 두 이름이 답을 줍니다. 하나는 예수, 또 하나는 임마누엘입니다. 요셉이 무엇을 믿었습니까?
① 죄에서 구원하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란 이름은 요셉이 지어준 이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천사가 전하여준 이름입니다. 이름마다 뜻이 있습니다. 예수란 무슨 뜻입니까? '도와준다. 구원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불쌍한 인생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십니다. 오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누구의 죄를 위해서 입니까? 바로 내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꿈속에서라도 부를 우리의 구원가가 아닙니까?
② 우리와 함께 하실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본문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여기 임마누엘이란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28:20을 기억하시지요. "볼지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크리스마스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낮고, 천하고, 냄새나고, 추한 죄인들과 함께 하신다는 말이 놀랍지 않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한한 그리고 죽을 인생인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기적입니다. 크리스마스입니다. 성육신 사건, 임마누엘 사건입니다. 임마누엘은 어떤 신화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추상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이고 지금도 아기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 현실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무엇을 하신다는 것입니까? 사30:26이 답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상처 입은 우리를 싸매십니다.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가난한 자를 부유케하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임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망, 기쁨이십니다. 만일 우리에게 예수님이 안 계시다면 우리처럼 불쌍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고마우신 예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남은 생애를 전적으로 드려야 만 할 것입니다.

셋째 요셉의 증거.
25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만일 요셉이 아들을 낳기도 전에 마리아와 동침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설을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야말로 기독교의 기둥이 아닙니까? 핵심이 아닙니까? 어떻게 죄인이 인생을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죄 없으신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정결한 처녀의 몸으로 탄생하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카톨릭에서는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다는 이 말씀을 근거해서 영원한 동정녀 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빗나간 주장입니다. 요셉은 그 후에 정상적인 마리아와 부부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도 형제들이 있었으니 그 증거입니다. 카톨릭에서는 그 형제들을 사촌 형제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촌이라는 말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그냥 형제들이라고 했습니다. 왜 요셉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은 누가가 기록했습니다. 누가는 기독교역사가가 아닌 세속적인 역사학자들까지도 훌륭한 역사가로 지목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누가의 직업은 의사입니다. 의사인 누가에 의해서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움직일 수 없는 기독교의 기둥이요, 발판,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반대자들의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의 기록이 많지 않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연구의 부족 탓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꿰뚫는 교리 하나가 있는데 바로 동정녀 탄생입니다. 또 예수님 자신이 동정녀 탄생을 말씀하신 일이 없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합니다. 요8|23을 보면"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일본신학자 우찌무라간조가 말합니다. 성경에서 과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제거한 다면은 무엇이 남을 것인가 두 가지만 남을 것인데 성경의 앞뚜껑과 성경의 뒤뚜껑만 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말씀은 이적적인 말씀이요 과학이 용납할 수 없지만 과학을 반대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창1|1을 보십시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과학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또 성경의 맨 마지막 선언을 보십시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했습니다. 구름 타고 영광 중에 다시오 실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이적이라는 말입니까? 성경은 이적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적으로 마칩니다. 미국 남침례 신학교 학장을 역임한 시카고라 박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오늘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말을 듣고 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그때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그 사실을 믿는다. 만일 성경에 요나가 물고기를 삼켰다고 기록했을지라도 나는 그대로 믿는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가능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과학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과학을 초월합니다. 믿음에서 초자연적인 기적을 제거하면 믿음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프링스턴신학교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가 한사람 있습니다. 그레샴메이천박사입니다. 그가 쓴 책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말합니다. 메이천박사가 쓴 예수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아니 했다고 한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동정녀 몸에서 태어나셔야만 했습니까?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성경에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얼마나 많이 예언되어 있습니까? 만일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모든 구약의 약속이 거짓말 약속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본문 22절입니다."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 선지자가 누구입니까? 이사야입니다. 본문 23절은 사7|14을 인용한 말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만일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하나님의 종 이사야는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되고 말지 않았겠습니까? 또 죄인을 구속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셔야만 하셨습니다. 죄 있는 것은 죄있는 것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거룩하고 죄 없는 자만이 죄인을 대속할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욥25:4절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의인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을 동정녀 몸에서 탄생하게 섭리하신 것입니다. 본문24절에 보면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한대로 행하였다고 했고, 또 본문25절을 보면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라고 하였으며 또 본문25절은 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잘 소개한 증거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어떤 날입니까? 이사야, 요셉이 증거한 대로 아기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 탄생하여 우리 가운데 오신 날입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가 기독교를 이 땅에 설립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한자로 기독(基督)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자로 우리가 믿고 있는 교를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글로는 예수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예수님 없는 기독교문화,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육적으로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적으로 우리 모든 죄인들의 가슴가운데 오셨습니다. 불신과 가난으로 쪼들린 가정마다 오셨습니다. 유리 교회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여기 오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오셨다는 말이요, 하나님께서 시간가운데 오셨다는 말이요, 하나님께서 나의 피곤하고 지친, 고독하고, 고달픈 내 삶 속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오실 때에 놀라운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였고,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오셔야만 했습니까?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의미를 십자가를 통해서만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골고다의 언덕을 떠나서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길이 뚫려지고 승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 가슴가운데 기쁨, 평화가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의 남은 생애가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마태복음 1:1
성령께서 신약의 복음을 여시는 첫 서두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은 주전(B.C.)의 역사와 주후(A.D.)의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 결정적인 표현입니다. 아니 이 선언은 사실상 전 인류의 구원역사를 집약시켜 놓은 하나님 자신의 구원경륜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 세계(世系)에 해당되는 말은 '비블로스 게네세오스( )'로서 '탄생의 책' 혹은 '생성의 책'(창 2:4)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또 다르게 '족보'(창 5:32, 6:9, 11:10) 또는 '계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하는 성령의 표현 속에 숨어 있는 기독교의 구속사적 의미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界)!
Ⅰ. 이 말은 역사 속의
기독교를 알려 줍니다.
마태복음 1장 1절 이후에 기록된 예수님 선조의 족보는 사실상 구약에 나타난 유대의 역사를 알려 줍니다. 이 유대의 역사는 세 가지 과정의 단계를 기초하고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아브라함 때부터 다윗 때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1:2-6a).
말하자면 족장시대와 사사시대를 망라하고 있습니다. 남자뿐 아니고 두 이방 여자 라합과 룻이 나옵니다. 불륜의 여자인 다말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 역사의 조상이었고, 다윗은 위대한 유대의 군주였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다윗 때부터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된 데까지의 역사입니다(마 1:6b-11).
즉 왕정 시대의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어간에는 극치에 달한 유다의 영광과 역사의 비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까지를 기록한 역사입니다(마 1:12-16, 18-25).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란 이 세상에서 진행된 역사(세계 역사) 속에 자리를 잡고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 역사의 시조요, 다윗은 히브리 역사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의 후손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하였을 때,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눅 2:1-7). 다시 말하면 세상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역사 속에서 계시(예언)되었고, 신약의 역사 속으로 화육강세(化肉降世)하여 들어오신 것입니다(히 1:1-3).
그러므로 기독교는 역사의 점진성 속에, 아니 세계 역사의 틀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역사적 복음 종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베스도 총독 앞에서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때 「…이 일은 한편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행 26:26).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만인공지의 역사적 사건의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Ⅱ. 역사 속에서 계시된 구속 언약의 기독교를 알려 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통하여 언약의 아들로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였습니다. 22장 17-18절에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창 15:4, 17:2-4). 이런 경우 아브라함은 메시야의 약속을 받은 위대한 조상이었습니다(갈 3:16, 롬 9:5).

다윗에게도 메시야 탄생의 언약이 주어졌습니다. 「…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하였습니다(삼하 7:12-16).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사 11:1, 10). 예레미야를 통하여서는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렘 23:5).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이런 언약의 실현이요, 예언의 성취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일반 세계 역사의 틀 속에서 위대한 구속 언약을 계시하고, 약속하고, 그것을 성취시키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Ⅲ. 구속사 속에 계시된 예수는 왕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왕들의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7장 4-5절에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열국의 아비' 곧 '왕들의 아비'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이야말로 이상적인 왕이었습니다. 이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행 13:22). 이는 하나님이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고 하였습니다(행 13:23).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런 언약의 실현이요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여러 곳에서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유대인들의 상식 속에서도(마 22:42), 걸인과 소경들에게서도(마 9:27, 20:30), 군중들 가운데서도(마 12:23), 이방 여자들에게서도(마 15:22), 예루살렘 성민들에게서도(마 21:9) 예수는 반복적으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다윗의 자손'은 바로 메시야의 대명사였습니다(행 2:30, 롬 1:3, 딤후 2:8, 계 22:16).
Ⅳ. 왕이신 예수는 죄인의 구주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먼저 아브라함 자신이 죄인이었습니다. 부름받기 전 갈대아 우르에 살 때 그는 하나님을 몰랐던 죄인입니다. 그는 부름받은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서 실수와 실패를 연속한 죄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앙한 죄를 범하여 하갈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출생시켜, 지금까지 게속되고 있는 저 중동전쟁의 전범자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족보 중에 이방 여자 라합과 룻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륜의 여자 다말과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더욱이 다윗의 한평생도 연약과 실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죄인이었고, 영적으로 자주자주 불신앙의 우를 범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러한 역사 속의 죄인 조상의 자손으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죄인으로 출생하였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는 죄없이 출생하였습니다. 그가 역사 속의 죄인 조상의 자손으로 오셨다는 말은, 죄인을 대속하는 죄인의 구주로 오셨음을 알려주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구세주였음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구주(요 4:42)로 오셨습니다.
Ⅴ. 죄인의 구주 예수는 믿음의 주요, 우리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믿음의 조상입니다. 창세기 16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신앙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고, 칼날을 피하기도 하였습니다.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였습니다(히 11:32-34).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는 믿음의 모범을 말할 때 아브라함과 다윗을 들어서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과 믿음으로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고, 주께서 그 죄를 죄로 인정치 아니함을 받은 사람 다윗은 행복자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믿음의 조상과 믿음의 영웅이었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는 우리의 완전하신 믿음의 주요 믿음의 대상자로 탄생하신 것입니다(히 12:2).
성도 여러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 말씀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역사 속에 자리를 잡은 구원 종교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역사 속에서 계시된 구원 언약의 종교임을 알려줍니다. 구원 언약에 약속된 예수는 우리의 주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 주이신 예수는 죄인의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그 죄인의 구주는 우리 믿음의 주요, 믿음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이 말씀 속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자리잡은 기독교는 사실,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의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역사적 사건의 사실을 역사적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안중근 의사의 역사, 이준 열사의 역사, 이순신 장군의 역사, 유관순의 역사, 또는 6.25 전쟁… 등입니다. 우리는 이런 역사 속에 이미 자리를 잡은 사건들에 대한 지식을, 역사적 기록이라고 하는 문서(책)를 통하여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그 역사 속에 자리잡은 사건들을 결코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믿습니다. 그 지식의 믿음은 역사적 기록(문서)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는 그 사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기록(역사 문서)은 믿지 않겠다'고 할 때, 그는 그만큼 무식한 자나 정신이상자로 낙인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역사의 한가운데 하나님의 특별계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탄생사건인 것입니다. 그 위대한 예수 탄생 사건을 성경이라고 하는 기록적 지식을 통하여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통하여 믿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의 반열에 이르는 엄청난 축복을 받게 됩니다. 말하자면 구원의 반열에 들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의 역사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믿음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구원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영생의 족보에 오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아끼심이 됩니다.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그 이름이 기록이 됩니다(말 3:16-17). 바로 예수의 성탄은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世系)를 만드는 새언약의 가족이 되는 축복을 받게 합니다. 새 영통 가족의 시작을 위하여 예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축복 앞에서 감사합시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간 사람들의 것입니다. - 아 멘 -

예수 임마누엘
(마1장18-25)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18-25)
예수, 그 이름의 비밀을 아십니까? 성 베르날로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혀에 꿀 송이처럼 달고, 예수 그 이름은 귀에 아름다운 멜로디로 울리고, 예수 그 이름은 마음에는 기쁨이 솟아나게 하는 이름이다." 그런가하면 우리와 이 땅에서 함께 한평생을 뇌성마비로 살아온 시인 송명희는 예수의 이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여러분은 예수라는 이름을 부를 때, 무엇을 떠올리십니까? 그 이름이 내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어떻게 역사하고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작명하신 하나님
예수! 그 이름을 하나님께서 직접 작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그의 모친 마리아는 요셉과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그가 잉태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수태를 고지(告知)받고 금새 자기 사촌인 엘리사벳에게 가서 의논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사벳이 도무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나이에 임신이 되었고, 천사가 마리아에게 "아이 낳을 증거 중의 하나가 바로 엘리사벳이 임신한 것"이라고 한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 좇아갔습니다. 이 사실이 마리아에 의해서 고백되어졌는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알려졌는지, 어떤 경로로 알려졌는지는 모르지만 요셉이 이 일을 알았습니다. 요셉은 침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늘 옳은 것을 숭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곤혹스럽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몹시 고민스러웠습니다. 그가 고민할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그의 고민에 대한 답을 가르쳐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다." 어떻게 그 아이가 출생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름을 가르쳐줍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니라" 그래서 그는 마리아를 집에 데려왔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특별한 이름이 아니라 당시에 많이 있었던 흔한 이름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호수아가 바로 예수입니다. 히브리말로는 '여호수아'이고 그리스말로는 '예수'였습니다. 마치 우리가 '북경'이라고 쓰는 단어를 영어권 사람들은 'Peking'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중국에 가면 '북경, Peking'이라고 하면 못 알아듣습니다. 그들은 '베이징'이라고 해야 알아듣습니다. 똑같은 단어를 이처럼 나라마다, 언어마다 다르게 읽습니다. 여호수아,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단어가 신약성경이 기록되면서 헬라어로 '예수'라고 표기되었습니다.
예수, 그 이전에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그도 위대한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예수님과는 다릅니다. 여호수아는 얼마 있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계시는 구세주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이십니다. 스룹바벨이 제2성전을 지을 때 귀환한 동포들에 의해서 대제사장으로 선임되어 나간 사람의 이름도 여호수아(예수아)였습니다. 그는 헐어진 성전을 다시 짓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면서 성전의 제사를 회복한 사람이지만 그는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다릅니다.
많은 여호수아가 있고 많은 예수가 있지만 이 예수만은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어주신 분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왔지만 예수 그 분만 하나님께서 700년 전, 400년 전 계속해서 '내 아들을 한 아기로 이 세상 보낸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사 9:6) 그 분이 오신다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유일하게 예언되어서 이 땅에 예언의 성취로 오신 아기입니다. 많은 이름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작명하시고 작명에서 끝나지 않고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말의 뜻을 한층 더 깊이 풀어서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니라.'이라고 그 이름의 정확한 설명까지 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중요한 두 가지 뜻을 붙잡아야 됩니다. 첫째로 '내가 어디에 소속된 사람인가?' 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입니다.
제가 처음 외국 나들이할 때 설움이 참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국가에서 돈을 정식으로 $50 밖에 안바꿔줄 때도 있었고 조금 지나니까 $100 바꿔주었습니다. 여행비 $100을 가지고 어디에 가서 씁니까? 국가가 약하니까 한 달을 여행하고 40일을 여행하더라도 그냥 $100만 환전합니다. 그래서 돈을 암달러상에게서 바꿔서 팬티에 속주머니를 만들든지, 여러 곳에 숨겨 넣어 가지고 나오던 때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외국에 같이 가서 돈을 거두면 이상한 곳에서 돈이 나옵니다.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꿈같은 옛날 이야기입니다만 가난한 나라 백성의 설움이었습니다. 그것만해도 서러운데 입국대에 서서 korea라고 하면 열외로 비켜놓고 "당신 어디서 왔소? 지금 무슨 일 해요? 숙소는 어디요? 당신의 신원을 증명할 이 나라에 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하고 꼬치꼬치 캐묻습니다. 처음에 나가면 도무지 말 소리도 안들리는데, 그 질문에 일일이 답변하면서 20분, 30분 지내고 나면 진이 빠집니다. 미국 갈 때마다 그렇게 미국 대사관에 줄서서 비자를 받곤 했습니다.
얼마 전에 희년 선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서 병원을 개원하는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거기에서 네팔에서 온 사람들, 방글라데시에서 온 사람들, 인도네시아에서 온 사람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등 각 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 날, 남의 나라에 와 있는 설움이 어떤 것인가 하는 간증을 들으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잔인한 민족인가 싶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울다가 끝났습니다.
언제 한번 브라질에 있는 우리 동포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유럽에 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브라질 여권을 가졌습니다. 비행기에서도 같이 재밌게 이야기하다가 저와 같이 줄서서 파리 공항에 들어가는데 저는 여권을 보이니까 그냥 가라고 합니다. 그런데 브라질 여권을 가진 그 사람은 세워놓고 옛날에 제가 당했던 그 고문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친구 때문에 30분을 밖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나와서 이야기하기를 자기들이 처음 브라질에 이민 갔을 때 브라질 여권 가지면 미국이나 유럽을 마음대로 다녔는데 이제는 국가가 어려우니까 이렇게 사람 값이 개값이 되었다고 한탄합니다. 역전이 되었지요. 한국 경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나라가 무너지면 내가 가진 모든 것, 같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나라 사람 아닌 또 다른 시민권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분의 백성입니다. 그 분 왕국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위치는 계속 바뀌어갈 것입니다. 계속 흔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이 일시에 다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한편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렇지만 어깨에 모든 정사가 걸려있는 분의 나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의 영원한 나라, 흔들림이 없는 나라, 완전한 그 나라의 백성이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 대한민국 백성으로 당하는 설움과 어려움에 손해가 있을지 몰라도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하나님만이 주시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 풍요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내가 확고하게 입적되었습니다. "자기 백성을" 내가 그의 백성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가슴에 품습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입니다.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어떤 상태에서 어떤 방법으로 그 분의 백성이 되었단 말입니까? 그냥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이집트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시작이 어디라고 말합니까? "저희 죄에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죄입니다. 죄는 어느 때든지 사람을 불행케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쉽게 죄의식을 느끼지 않으며 잘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거짓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거짓말 같은 것은 죄로 안 여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혜롭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이것이 동양 문화의 특색인 것 같습니다. 둘로 구분합니다.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의리를 지키고 정직해야 됩니다. 그러나 내 가족이나 내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거짓말 잘 하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제갈 양입니다. 그래서 동양에는 거짓말이 죄라는 의식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거짓말을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벤처 기업하는 젊은 두 청년이 거짓부렁으로 만들어놓은 신화가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불행케 하고 있습니까? 다른 자식들은 밤잠을 자지 못하고 공부해서 대학에 입학했는데 거짓문서 만들고 법을 교묘히 속여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상상해 보건대 지금 그 부모들은 원상복구 할 수 있다면 자기 머리털이라도 다 뽑고 싶을 거예요. 기가 막힐 것 아닙니까? 다시 벗어날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다 쓰고 싶어할 겁니다.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또 거짓말하라면 열심히 할거예요. 거짓은 늘 거짓말로 포장되어야 진실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인생은 어떻게 됩니까? 부모의 잘못된, 거짓된 판단으로 인생이 멋지게 준비되어져야될 때에 찌그러진 인생으로 평생동안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한번 지어버린 죄의 고통을 다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멕베드>를 보면 던컨 왕을 죽인 멕베드가 자기 손에 묻은 피의 흔적을 보면서 외쳐대는 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것으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구나." 한번 죄를 지어버리면 다시 돌이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들이 기도합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시옵소서."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 외에는 죄를 사하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마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우리 하나님은 필시 그 방법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두 팔을 스스로 묶으시고 사랑하는 아들이 그 모진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외쳐대는 그 고통의 소리를 다 들으셨습니다. 죄는 우리 인생을 불행케 하는 원흉입니다. 그러나 그 죄는 하나님도 불행케 하는 원흉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놀라운 감격을 가져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찾아오시고 만난 이유가 내 의로움 때문이 아니라 내 죄 때문이라는 사실, 내 잘남 때문이 아니라 내 못남 때문이라는 사실, 내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내 추잡함 때문이라는 사실, 내 영광스러움 때문이 아니라 내 비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 좋아합니다. 귀한 것 좋아합니다. 그리고 같이 있고 싶어합니다. 나쁜 것 싫어합니다. 추잡한 것 멀리하고 싶습니다. 실패하고 못나고 추잡하고 더럽지만, 내 자식이면 그 자식의 실패와 아픔을 10배나 100배나 당하는 부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믿습니까? 인생을 가장 불행케 하는 죄에서 구원하셔서 참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 예수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으로 그 사역이 끝나지 않고 또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을 우리는 내 곁에 모시고 삽니다.
가난, 지겹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절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가난의 고통을 안다.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었지만 나는 머리 둘 곳이 없었던 생애를 살았다. 너는 아무리 못하더라도 집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날 곳이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났다. 가난, 그러면 내가 너 앞서 있다. 네 모든 가난의 행로를 내가 안다. 너와 함께 하겠다."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런가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의 때를 나는 안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 너와 함께 있는 나는 안다."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눈물의 아픔을 아시는 주님입니다. 또 친구의 배반을 당하셨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사랑했던 제자 유다에게 노예 값도 못되는 개 값 같은 은 삼십 냥에 팔렸다. 네가 당한 그 배반의 아픔을 내가 안다. 나는 너의 임마누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 분이 임마누엘이십니다. 그 분 앞에 나 같은 것은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 나올 수 없다구요? 그 이름이 예수입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 임마누엘이신 주님이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그 분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수고롭고 무거운 짐, 그 짐을 진 상태 그대로 나오라."(마 11:28)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백성 된 것도 알겠고 예수께서 죄 사해주신 은혜도 알아서 예수 그 이름을 크게 부를 수 있는 성도들이 계십니까? 그렇지만 그 구원이 지금 이 시간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명퇴 당해서 직장도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증에 빠져있는 내게 임마누엘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으십니까? 여러분, 그 분 앞에 서십시오. 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내 임마누엘로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만드시는 역전의 명수이십니다. 내가 당했던 손해와 내가 당했던 슬픔과 내가 당했던 멸시와 내가 당했던 좌절까지도 사용해서 그것 없이는 도무지 안될 것 같은 성공의 길로 인도하기를 기뻐하시는 나의 임마누엘이십니다. "할 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내가 너의 임마누엘이라."(막 9:23)고 말합니다. 그 분은 마태복음의 마지막을 닫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 말씀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 그 분은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셨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 임마누엘로 오신 그 분을 향해서 나아가는 밤입니다. 그 분을 향해서 찬송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송명희 시인은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도무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비밀이 되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아마비로, 뇌성마비로 평생을 고통 당하면서도 예수가 그 속에 비밀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의 인생에 감동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가 그 인생에 임마누엘로 능력이 되었단 말입니다. 예수! 임마누엘! 이 분 때문에 송명희가 하나님은 공평하시다고 노래합니다. 임마누엘이신 그 분을 찬양합시다. 그 분을 붙잡고 다시 일어납시다. 그 분의 백성 된 인생은 비밀을 가져야 됩니다. 그 분 때문에 도무지 사람들이 웃을 수 없을 때 웃습니다. 왜냐면 내 속에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설명은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화급할 때에 세상이 감당 못할 평화를 누립니다. 설명으로 안됩니다. 심리학자가 다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문자 그대로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그런 일 할 수 없는 인생들이 주님의 능력을 의지해서 상상할 수 없는 사역을 펼칩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예수 그 이름 때문에, 그 비밀 때문입니다. 예수의 비밀이 모든 성도들에게 임마누엘로 역사하는 복된 성탄절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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