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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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3-09-20 12:18:47, Hit : 78
File #1    긍정의_힘.hwp (205.0 KB)   Download : 2
Subject   긍정의 힘


/긍정의 힘/
조엘 오스틴의 저서
‘긍정의 힘’을 본인이
교회 강단에서최초로
설교로 정리한 자료
(강단용으로
참고할만합니다)
/긍정의 힘(1)
비전을 키우라(사43:19)/
“긍정의 힘 - 믿는 대로 된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새롭게 떠오른 차세대 지도자
조엘 오스틴이 알려주는
최선의 삶입니다.
“긍정의 힘”은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1위!  
아마존닷컴 장기 베스트셀러!
NBC 투데이, 워싱턴포스트
지가 극찬한 책입니다.
인생이 100 배  달라지는
최선의 삶을 위한 7단계!
여러분의 시각이 바뀌고,
비전이 자라고,
인생이 변하는 마술 같은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7단계를 삶에 적용하면
이전보다 더 큰 행복
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 하루나 한 주가 아닌,
평생 동안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과 열정이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1일- “나는 비전을 키우는 사람이다”    
2일- “나는 건강한 자아상을 일군다”    
3일- “나는 생각과 말의 힘을 발견한다”
4일- “나는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날 것이다”  
5일- “나는 역경을 통해 강점을 찾는다”  
6일- “나는 베푸는 삶을 살 것이다”
7일-“나는 언제나 행복하기를 선택했다”
주위에서 기독교인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주로 섬기며, 성경 말씀들을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복된 말씀을 왜 이루지 못하고 있을까요? 재능이 부족해서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집안 대대로 가난해서, 학벌도 없고 재산도 없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품지 않은 복은 절대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 법입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좋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설픈 지식에 얽매인 우리는, 정작 가장 중요한 마음의 힘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원인은, 우리의 마음이 그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이성을 신격화하는 이 시대에 ‘마음의 힘’을 주장하는 이론이 어떻게 커다란 돌풍을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말하는 마음의 힘은 ‘하나님 안에서 품는 긍정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긍정보다 부정을 선택하고 기쁨보다 걱정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걱정과 근심이 미래를 준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커다란 착각인가요! 긍정을 선택하고 기쁨을 선택하고 걱정을 버리며 높은 단계로 도약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가정이 번창하고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상상하며 머리와 가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상상해야 실제로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삶은 최선이 될 것입니다.

최고의 삶을 살기 위한
소중한 선물당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7가지 단계
-비전을 키우라: 마음에 품지 않은 복은 절대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건강한 자아상을 일구라: 자신을 행복한 승자로 여기는 사람은 인생의 거친 파도를 이겨 낸다.
-생각과 말의 힘을 발견하라: 말과 생각에는 엄청난 창조의 힘이 있다.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라: 마음의 실타래를 풀지 않으면 행복은 찾아오지 않는다.
-역경을 통해 강점을 찾으라: 우리는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점점 더 강해진다.
-베푸는 삶의 즐거움을 누리라: 베푸는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장해 놓는 것이다.
-행복을 선택하라: 눈과 가슴과 얼굴에 열정을 가득 품고 살면 행복은 이미 나의 것이다

더는 희망을 꿈꾸지 못하고 낙심해 있는 사람들,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의 성공을 꿈꾸고 있는 크리스천, 성도들에게 진정한 ‘긍정의 힘’을 가르쳐 줄 사명이 있는 목회자, 카운슬러와 영향력 있는 리더층에 귀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면 더 나은 내일이 찾아옵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어떤 고난을 겪고 있든 상관없습니다. 누구라도 지금 당장 최선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춘 채 자신을 약하고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들은 자신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와 조건을 귀신같이 찾아냅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며 행복한 삶을 먼 미래로 미루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젠가 내 인생도 풀릴 거야. 언젠가 일이 좀 한가해지면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청구서 처리에 관해 걱정하지 않을 날이 올 거야. 언젠가 건강을 회복할 거야. 언젠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복을 더 많이 누리게 될 거야.” 그러나 ‘언젠가’는 결코 찾아오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오직 오늘뿐입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으며 우리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바로 오늘뿐입니다!
인간의 성공할 수 있는 4가지 요인을 말할 때, 두뇌, 지식, 기술, 태도 이 네 가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성공적인 삶은 적어도 93%는 태도가 영향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태도가 성공적인 삶의 93%를 차지한다는 말은 믿음의 생각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안 된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생각은 결국 그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부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긍정적으로 살아 나가야 하겠습니다. 인생은 탈출과 도전의 반복이라고 합니다. 죄악된 것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 부요와 행복의 삶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죄인 줄 알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속히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면서 어제보다는 나은 오늘로, 또 내일을 맞이할 때는 오늘보다는 나은 내일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지만, 우리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크던 작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적은 것을 보게 됩니다. 꿈을 이루기 위하여 도전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계획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두 가지의 다른 입장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 되었지 계획이 무슨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하는가 하면,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계획하면 되었지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계획합니다. 왜냐하면 기도에서 비전과 계획이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나름대로 어떤 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느냐, 못 되느냐를 결정하는 요소가운데 하나가 계획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계획 여부에 따라 비전과 개꿈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기도하며 계획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많은 분들이 "계획하고 실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말하기를 "실패가 두려워 아무 것도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복된 내일의 비전을 잉태하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비전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비전에 따라 내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며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기회를 찾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며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결정적인 때를 찾고 그 때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회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회를 찾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전도하고 그가 정말 구원받기를 소원하신다면 "그가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막연히 기도하면 주님께서도 막연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라면 주님의 응답도 구체적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주님에게 나아와 기도하면, 반드시 주님이 주실 내일의 비전을 잉태하는 자가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기도하며 기다리고 기도하며 계획하십시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내일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몸을 던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고통은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피아노의 속에는 강한 철판에 240 가닥의 철사들이 팽팽하게 걸려 있습니다. 철사들이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란 여간 긴장관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강렬한 고통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고통은 마침내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낳아서 새로운 도전과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다는 것은 그의 신앙을 의심해보아야 합니다. 일생 수동적인 신앙, 일생 그냥 앉았다고 돌아가는 신앙이라면 너무나 부족합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에게 주어진 모습대로 살아야 하고 그에게 주어진 기능 외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나무를 예로 들면 사과나무가 배나무가 될 수 없고, 배나무가 감나무로 바뀔 수 없습니다. 돈을 예로 들면 돈이란 조폐공사에서 찍어내는데, 같은 규격의 같은 재질이지만 어떤 종이는 1000원짜리가 됩니다. 어떤 종이는 5000원짜리가 됩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10000원짜리가 됩니다. 그러니 10,000원짜리는 1,000 원짜리의 10배가 되는 가치를 지닙니다. 종이는 아무런 힘도 없고, 소원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 위에 그려지는 것으로 유통될 뿐입니다. 어떤 그림이 새겨지느냐에 따라 돈의 가치,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으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이렇게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와 열정에 따라서 1000원짜리의 인생을 사는 분들도 있고, 10,000원 가치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 배에서 나온 형제들인데도 다 다르게 살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들이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이렇게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까? 그 사람의 품은 생각이 그의 위인 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이 생각하는 것으로 그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고상하면 그의 인생도 고상해지는 것입니다. 이사야32:8에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구역에 따르면 "고상한 자는 고상한 일을 도모하나니 그는 항상 고상한 일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비전을 말하지만, 비전과 인격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면 저는 인격을 선택할 것입니다. 정직하고 곧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의 삶은 일정한 방향이 있는 것입니다. 잠언 11:3에는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크게 쓰임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인격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났다고 머리를 치켜들지 말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과의 교제에 충실하십니까? 여러분의 가정생활은 하나도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여러분의 직장에서 타협하고 싶은 유혹을 받아보셨습니까? 돈이라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생각을 건전하게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그 분이 가장 요긴한 자리로 몰아넣고 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어주시는데 누가 말할 것입니까?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
- 오직 하나님! /
하나님으로 인한 확신 있는 비젼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절망하고 포기했을 그런 환경 속에서 꿋꿋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 중심에 생각해 보고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애3:19-26)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라는 말씀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절망적인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낙심하지 않고, 주저앉지 않으며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열린 창을 가진 자는 어디에서도 갇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매력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정체성이 약하면 절망하고 포기합니다. 어떤 고난을 당하게 되면 "모두 우리의 죄 때문이야. 우리는 망해도 싸"라고 하며 비관주의가 됩니다. 회개란 과거의 실수와 잘못을 아파하면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믿고 밝은 미래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것인 반면에 비관주의는 언제나 과거의  잘못이나 실수에 자신을 메어 놓고  절망하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채찍의 목적은 과거에 대한 형벌이 있지 않고 미래에 대한 예방에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로부터 채찍을 맞고 있다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매를 맞고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주여 죽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기도처럼 "우슬초로 저를 씻어 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가?" "나를 잊어버리신 것은 아닌가?" 의심합니다. 2500년 전 유대인들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신음했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강을 내시는 하나님을 몰라서입니다.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확신이 부족하고,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말씀하시는데도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대한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원하는 모습을 그리라/
마음에 품지 않은 복은 절대 현실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좋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마음속에 원하는 삶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입니다. 생각과 대화, 깊은 잠재의식, 행동을 비롯해서 자기 존재의 모든 부분에 이 이미지를 심어야 합니다.
패배와 실패의 이미지를 그리는 사람은 실패자의 인생을 살게 되지만 승리와 성공, 건강, 풍요로움, 기쁨, 평화, 행복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장애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런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허우적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의 나래를 펴고 더 튼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더 높은 단계로 자라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주십니다. 막대한 부와 승진의 기회, 참신한 아이디어, 창의력을 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인생 최고의 순간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과 패배감 속에서 허우적댈 필요가 없습니다.
‘많이 배우지도 못한 내가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내 몸이야 뭐 항상 이렇게 골골거리지.’ ‘난 여기까진가 봐.’  ‘이게 내 한계야.’
이런 비좁은 생각을 떨쳐버리고 하나님의 복, 예컨대 승진과 놀라운 성장을 기대하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마음에 커다란 그릇을 마련한 사람에게만 복을 넘치도록 부어 주십니다. 머리와 가슴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상상해야 실제로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낡은 가죽부대를 버리라/
예수님은 가죽부대의 비유를 들어 제자들의 비전을 키워 주셨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마9:17) 좁은 태도로는 폭넓은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옛 방식과 생각의 틀에 갇힙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으면, 원대한 비전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습니다.

낡은 가죽부대를 버릴 용기가 있습니까? 큰 생각을 품기로 결심했습니까? 원대한 비전을 품고, 앞을 가로막는 낡고 부정적인 태도를 버리겠습니까? 낡은 가죽부대는 버립시다. 생각을 바꿉시다.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우리 삶 속에서 행하실 크신 일을 기대합시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하나님은 우리 마음 밭에 끊임없이 새로운 씨앗을 뿌리고 계십니다. 우리 맘속에서 낡아빠진 생각을 뽑아내고 끊임없이 창조적 생각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단, 이 씨앗은 믿음의 토양 위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자라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뿌리를 내리려는 씨앗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엄청난 소망과 기대의 씨앗으로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이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서 엄청난 열매를 맺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의 날입니다.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린 사람은 오늘이야말로 건강을 회복할 때입니다. 온갖 나쁜 습관에 중독된 지 오래라면 이제 자유를 얻을 때입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빚에 눌려 지쳤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지금 해방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성장입니다. 하나님과 협력하기만 하면 바로 지금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멋진 순간이 될 것입니다.
믿는 순간,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사43:19)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을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시기 위해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이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마음에 충분한 그릇을 준비해 놓았느냐? 성장을 믿느냐? 직장에서 두각을 나타낼 줄 믿느냐? 뛰어난 리더와 훌륭한 부모가 되리라 확신하느냐?” 커다란 비전을 품으라는 말씀입니다. 의심의 토양 위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버립시다. 좁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크신 생각을 품읍시다. 성장과 풍요로움, 차고 넘치는 복을 생각합시다.  몇 년 전, 한 유명한 골프 선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왕은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미국까지 보내 그를 데려왔습니다. 둘은 며칠 동안 골프를 즐기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골프 선수가 돌아갈 때가 되자, 왕은 비행기에 오르려는 그를 세워 놓고 물었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서 저를 찾아 주셨으니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아닙니다. 이렇게 환대해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꼭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야 선생님이 이 여행을 평생 기억하실 테니까요.” 골프 선수는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골프채가 좋겠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골퍼는 왕이 어떤 골프채를 보낼까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 이름을 새긴 순금 골프채? 다이아몬드와 보석이 여기 저기 박혀 있는 골프채? 세계 최고 갑부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이 보내는 선물은 얼마나 대단할까?’
집에 돌아온 골퍼는 날마다 우편함을 확인했지만 골프채는 좀처럼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기대하던 골프채는 어디가고 달랑 편지 한 장이라니! 그는 실망하면서 봉투를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안에는 미국에 있는 커다란 골프 코스를 선물로 주는 기증서가 들어있었습니다!
왕의 생각은 우리와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은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크고 넓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큰 꿈을 꾸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긍정의 힘(4)
과거의 장벽을 깨라
(신1:1-8)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 가게에서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온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거저 준다고 했더니 매일 아침 열심을 다하여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어떤 때는 조금 늦으면 새 치기를 해서라도 제일 앞자리에 섭니다. 조금 더 늦으면 울며불며 읍소를 하면서도 반드시 제일 앞자리에 서서 자기의 원하는 것을 받아 갔습니다. 이 사람은 금고를 가져가기도 했고 출세의 상자를 가져가기도 했고 성공의 상자를 가져가기도 했고 쾌락의 상자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어느 날 아침에 검은 테를 두른 상자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은 테를 두른 상자를 가져간 뒤에는 다시는 그 가게에 나타나지 않자 상점의 점원이 가게의 주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개걸스런 소유자가 이제는 왜 오지 않습니까? 어제 가져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렇게 물어 보았더니 상점 주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나 가져가겠다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죽음의 상자를 주었더니 그것도 넙쭉 받아가더구나"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 붙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오늘 만 있지 내일이 없었던 사람이야”. 여기에서 우리들은 내일을 잊어버리고 오늘 눈에 보이는 것에게 집착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노예로 전락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온 어제도 존재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현재도 존재하는 것이고 그리고 살아야 할 내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사람은 내일을 향하여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어제를 허락하여 주셨고 은혜로 오늘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일도 은혜로 허락하여 주실 것 이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인생이야말로 지나간 어제와 살고 있는 오늘과 돌아올 내일을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인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40년 동안 계속 되었던 광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가나안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인데 첫 번째 말씀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하시는 말씀이고 본문에 말씀에서 시작되는 신명기는 40년을 결산하고 점검하면서 다가올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고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이 신명기의 중심 내용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어제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 아니고, 어떤 측면에서 오늘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일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일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오늘 말씀으로 들려주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신명기입니다.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라/
“과거를 통해 배우되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라. 과거를 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디서 출발하여 어떻게 해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는 말 그대로 과거에 이미 끝난 일임을 잊지 말라. 그래서 나는 '옛날에 좋았는 데'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과거의 영웅이었다는 것으로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갉아 먹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병은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다면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하다.
옛날이 더 좋았노라고 하면서
퍼져 앉아 있는 사람들은
좀 더 나은 현실을 창조할 시간이 없다.”
- 조지 포먼이 들려주는 인생교훈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과거의 기억에 묶여, 혹은 미래에 닥쳐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에 발을 담근 채로 현재 삶에서는 온전히 서 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오늘을 산다면 어떨까요? 아마 우리는 현재 앞에 놓여진 가장 중요한 일들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마지막인 것처럼 주님 앞에 온전히 서길 원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짐 보따리를 어느 곳에 둘 수 있나?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고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할 것인가를 살펴볼 때에 우리는 과거의 중요성과 그것이 현재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어디를 통과했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생각해 볼 때 무엇이 그 힘과 생각을 움직여 왔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참 자아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삶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존재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조종하려고 하는 이러한 ‘또 하나의 다른 존재’를 일컬어 ‘과거에 속한 내적 어린아이’ 라고 부릅니다. 이 내적 어린아이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부담이나 어려움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심리적 세계의 일부분을 반영합니다. 어떻게 오늘날의 내가 형성되었나? 내 존재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성령께서 자신의 숨은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매일매일 감사드리면서, 오늘 그분이 원하시는 삶은 무엇인지를 항상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행을 할 때 가져가야 할 짐을 잘 선택해서 챙기지 않으면 엄청나게 많은 짐 보따리를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짐 가운데서 꼭 필요치 않은 것들을 선별해야 하는데 아무리 세심하게 골라내어도 짐이 여전히 많은 것을 느게 됩니다. 우리가 여행에 거추장스러운 짐을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도 거추장스러운 짐 보따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출생에서 시작하여 유년기와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되기까지 짐 보따리를 주워 모으게 됩니다. 이 보따리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받은 영향과 압력인데 우리의 성년기 삶 속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유년기의 구습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장벽/
자기 마음에 있는 장벽은 누구도 깨뜨리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적은 마음에 있는 셈입니다. 마음속에서 패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여지없이 패합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은 헛된 꿈이 되어 버립니다. 장벽은 바로 마음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 장벽을 ‘견고한 진’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패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그릇된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과 믿음, 승리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마음에 품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자신감을 꺾으려 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랴? 마음속에서 과거의 장벽을 뚫고 믿음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장벽을 부수는 순간, 우리 삶이 변하고 나아가 우리 자손의 삶이 밝아집니다. 과거의 장벽을 깨지 못한 결과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났던 히브리 백성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풀려나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는데 약속의 땅까지 11마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가 히브리 백성에겐 4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히브리 백성은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똑같은 산 주위를 맴돌면서 광야를 헤맬 수밖에 없었나요?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예비해 놓으셨는데 그 땅은 엄청난 풍요와 완벽한 자유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 오랫동안 압제자의 그늘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평생 이용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온 히브리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새로운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마음가짐에 머물렀습니다. 항상 문제만 바라보고 불평하며, 자신들과 목표 사이에 있는 장애물에 질려서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마침내 노예근성에서 빠져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 (신1:6)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머문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나 고통,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날 때입니다. 더 큰 복을 믿고 나아갈 때입니다. 눈앞에 성장과 초자연적인 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굴레에서 맴돌며 매년 똑같은 일만 되풀이 한다면 그런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비전을 얻기 위한 세 번째 열쇠는 ‘과거의 장벽을 부수는 것’ 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때문에 번번이 앞길이 가로막혔어도 상관없습니다. 과거야 어쨌든 오늘은 새로운 날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 계획을 세워놓고 계시니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어렸을 적 누군가에게 학대받았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적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든 과거의 상처에 연연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미래가 펼쳐지는 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고통과 상처, 온갖 학대와 슬픔을 빠짐없이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면 두 배나 큰 기쁨과 평화와 행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좋은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나침반을 올바른 방향에 맞추십시오. 패배자의 마음을 갖고 승리자의 삶을 기대하는 어불성설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서 왜 인생이 풀리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사는데도 계속해서 나쁜 일만 생길 때,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누군가 진실로 대하는 우리를 속이고 우리의 것을 빼앗아갈 때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용당할 때도, 우리가 왼편 뺨을 대면서 모욕을 참아 넘길 때도, 하나님은 곁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상대를 용서하고 관계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모든 현장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록 장치는 쉼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악을 복으로 바꿔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겠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인정하겠는가?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겠는가?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 된다/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바꿔주십니다. 가난과 무력함만 생각하는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 비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그마한 생각과 믿음, 기대를 품고서도 왜 자신에게는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패배의 원인이 자신의 생각에 있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대 수준을 너무 낮게 잡습니다. “결혼 생활이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해. 얼마나 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바라겠어?” “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주머니가 두둑하지는 않지만 뭐, 그래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해.” 이것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멋진 승리의 삶을 살기 바라시지 근근이 살아가기를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알아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믿음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먼저 믿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까지 기다려왔다면 헛수고를 한 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먼저 믿음의 크기를 더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음에 충분한 그릇을 마련한 후에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복이 찾아옵니다. 항상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시리라 기대하십시오. 혹시 스스로는 부족한 게 없더라도 나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남까지 도울 수 있으려면 더 큰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그늘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면, 과거의 산에 거한 지 너무 오래 되었다면, 이제는 길을 떠날 때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저 그런 삶에 만족하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앞장서서 우리 가문의 어두운 마음 자세를 말끔히 씻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패는 실패를 낳는다/
학대당한 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되어서 자기 자식을 학대합니다. 부모가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결혼 생활에 실패할 확률이 꽤 높습니다. 실패는 실패를 낳습니다. 때로 두세 세대 이상 문제가 곪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그 문제는 알코올 중독일 수도 약물중독이나 가난, 우울증, 분노, 자존감 결여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든 우리에겐 악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움만 있으면 악의 흐름을 끊을 수 있어. 나는 하나님을 믿고 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거야. 새로운 지평을 열거라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의 크신 일을 기대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는 상관없어. 우리는 빌려줄지언정 꾸는 가정이 되지 않겠어. 장애물이 아무리 커도 겁나지 않아.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강하시니까.’
/하나님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은 여러분이 과거의 산에
거한 지 오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새로운 비전을 품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때입니다.
과거의 장벽을 뛰어넘고 마음속의 ‘견고한 진’을 부수십시오. 과거에 살지 않기 위해서는 바꿀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 것은 파괴적인 행위입니다. 고통스런 경험은 가능한 한 빨리 잊어야 하고 과거의 성공 사례에 정신을 집중하며, 과거의 실수로 부터 배워서 미래에는 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가문의 누가 무슨 일을 했든지 간에 여러분이 그것 때문에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문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자손 대대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편안함에 안주하는 삶을 살기에 빠르게 변화하는 생활에 발맞춰 내 자신이 변화하기가 숨이 찹니다. 현대를 함께 살아가려면 발을 묶어둘 수도 없는 노릇, 미리미리 미래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과거비판의 시각이 아닌
미래창조의 시각으로 보자/
우리가 육체적 수술을 병원에 가서 받는 것처럼 교회에 와서는 자신의 영적 수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수술을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수술은 개안수술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으로부터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어디서 오느냐 하면 눈이 어두워져서 오는 것은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면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보는 방식만 바르게 보고, 원칙적으로 보고, 은혜롭게 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고, 하늘의 지혜로 보면 문제는 없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는데 어찌하여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유의 색맹들. 눈이 있어도 자유를 찾지 못하는 이 자유의 색맹들이 오늘 현대인들이 걸린 질병입니다. 짧은 인생, 남만 비판하다가 짧은 인생, 남의 비판만 귀하게 여기고 물고 늘어지다가 더 짧게 만들고 말지요. 비판과 판단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이유 없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으로부터라도 오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자유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비판의 시각이 아니라 창조의 시각으로 늘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하나님은 과거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 창조적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다른 사람도 과거비판의 시각에서 미래창조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내 안의 내적인 능력만 회복되면 인생은 그렇게 살기 힘든 것이 아니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은혜롭게 드립니까? 그 은혜를 받으면 내적인 은혜의 힘이 나를 강권하시고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긍정의 힘(6)/
은혜를 사모하라(약 4:6-8)  
/새로운 출발/
하나님은 큰 문제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측면에서 도움을 주고자 하십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면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은 간음에다 부하를 일부러 죽음으로 내모는 등, 많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그에게 하나님은 자비를 내리시고 새로운 출발을 허락하셨습니다.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합한)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과거의 실수에 머물지 않고 은혜를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는 그의 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시23:6) 한때가 아니라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했다는 점을 주목하하시기 바랍니다. 메시지 성경(The Message)에는 다음과 같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내가 어디를 가든지 쫓아다닌다” 그러니까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입에 겨우 풀칠만 하고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를 쫓아다니길 기대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럭저럭 사는 삶 보다는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으면 좋기야 좋지. 하지만 나는 문제가 많아. 지금은 한창 어려울 때고 내 삶은 꼬여도 한참 꼬였어.” 하나님은 이런 고통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고비를 오히려 기회로 바꿔 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적들로 나를 이기지 못하게 만든다” 고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승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노아는 인생의 최대 위기를 맞아서 어떤 모습을 보였습니까? 온 세상이 홍수로 멸망할 때가 가까워 하나님은 거대한 배를 짓고 동물들을 모으는 엄청난 일을 노아에게 맡기셨습니다. 노아에게도 포기하고픈 유혹이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노아를 사랑하셔서 새로운 은혜와 초자연적인 능력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노아 자신과 가족과 동물을 구원할 배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완성되었습니다.
룻은 또 어떻습니까? 남편은 죽고 극심한 가뭄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는 굶어죽을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좌절하지 않고 매일 밭에 나가 떨어진 곡식을 주웠습니다. 성경은 룻이 그런 고난의 한가운데서 밭의 소유자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소유자가 일꾼들에게 일러 룻을 위해 곡식을 충분히 흘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도 고난의 순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래지 않아 룻과 나오미의 상상황은 180도 바뀌어 가난
대신 풍요가 찾아 왔습니다.
요셉도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은 어렸을 적에 애굽으로 팔려가 고난 받고 이용당했습니다. 그러나 남들에게 어떤 일을 당하든 어느 곳에 가든 간에 요셉은 변함없이 복을 누렸습니다. 심지어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강간 미수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을 때도 복은 그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난 그는 애굽의 모든 농사 문제를 관장하는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시련 속에서 찾아옵니다. 그러니까 홍수 속에서, 가뭄의 한복판에서, 학대 속에서 은혜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스런 순간을 지날 때, 이를테면 요셉처럼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나 룻처럼 재정적으로 흔들릴 때나 노아처럼 세계적인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절대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런 때일수록 오리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기대할 때 아무리 혹독한 시련의 광야에서도 은혜의 꽃은 피어나는 법입니다.  
야고보 4:6을 보면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미 다양한 은혜를 주셨습니다만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33을 보면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라고 했습니다.
/큰 은혜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은혜의 차별성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은혜는 어려울 때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은혜인데 반해 하나님의 은혜는 독생자를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은혜입니다. 그 은혜야말로 사람이 베푼 은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욱 큰 은혜인 것입니다.

둘째는 이미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지만 보다 더 큰 은혜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변덕스럽습니다. 기분과 감정을 따라 생각과 태도가 변합니다. 돕고 사랑하는 것도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가면 갈수록 더 깊어지고 풍성해 집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큰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더욱 큰 은혜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더 큰 은혜를 받으려면 맨 먼저 겸손해야 한다.
6절을 보면 "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아침인사를 Good morning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샬롬이라고 인사하고, 한국 사람들은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진지 잡수셨습니까?” 라고 인사하고, 헬라 사람들은 ‘은혜’라고 인사했습니다. 인사말은 그 민족의 생활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변, 난리, 당파싸움전쟁으로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자고 나면 사약을 받거나 귀양을 가거나 죽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침에 만나면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고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보릿고개, 흉년, 기근, 찌든 가난이 수천 년 계속되는 동안 유일한 희망은 배부르게 먹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특수계층을 뺀 일반대중들은 제때 밥을 찾아 먹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만날 때마다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를 해야 했습니다.
"좋은 아침! 은혜! 샬롬! "이라는 인사말에 비하면 밤새 안 죽고 살아남았느냐? 라든지 아침밥이나 먹고 나왔느냐? 라는 우리네 인사말은 서글픈 정서가 서립니다. 본문은 교만한 자는 은혜를 받을 수 없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은혜는 좋은 것, 평안한 것, 행복한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모든 것이 좋고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지 못하면 그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자신만만한 것, 머리를 치켜드는 것, 남을 얕잡아 보는 일련의 행위를 의미합니다.
주고받는 행위는 정해진 법칙이 있습니다. 언제나 상을 받는 사람은 상을 주는 사람 아래에 서야 합니다. 그것이 세계 공통의 공식입니다. 상을 받는 사람은 의자에 앉아서 받고 주는 사람은 땅바닥에 엎드려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면 자세를 낮추고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받아야 합니다.
/교만은 은혜를 가로막는 가시와 같다/
국가도, 지도자도, 교회도, 회사도, 가정도, 나도 너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가로막고 차단하는 것이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다윗도 교만했다가 무시무시한 진노를 받았습니다. 전염병으로 7만 명 죽었습니다(대상 21:14). 사무엘하 6장을 보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때 그 감격과 기쁨을 참지 못한 다윗이 힘을 다해 춤을 추었습니다(6:14). 그 모습을 창문을 열고 바라보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심중에 다윗을 업신여겼습니다(6:16). 미갈은 사울왕의 둘째딸로서 왕가의 예절과 법도를 익히며 자랐기 때문에 자기 딴으로는 고상하고 격조 높고 품위를 지닌 여자라고 목에 힘을 주며 사는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며 제대로 씻지도 않고 흙바닥에서 뒹굴고 들판을 쏘다니던 베드윈 출신이었습니다. 자연히 미갈은 자기 남편 다윗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그 날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미갈은 다윗에게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라고 비아냥대며 남편을 멸시했습니다(6:20). 사무엘하 6:23을 보면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고 했습니다.
주경학자들은 이 구절을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미갈, 남편을 멸시하고 조롱하는 미갈의 태를 닫으셔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석하는가하면, 정떨어진 다윗이 그날 이후 미갈과 잠자리를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을 낳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둘 다 일리 있는 해석이라고 봅니다.
교만은 은혜를 무너뜨립니다. 교만은 성공을 무너뜨리고 행복을 무너뜨립니다. 돈을 벌었더라도, 공부를 많이 했더라도, 성공했더라도, 얼굴이 예쁘더라도, 행복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교만에 빠지면 안 됩니다. 본문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 임하는 은혜도 받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은혜를 확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말씀을 바라보기만 할 뿐 마음을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구경꾼이 있고 감동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 역시 받아야지 구경하면 안 됩니다. 어느 주일아침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설교가 어스킨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스칼렛이라는 여자가 설교를 듣고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여자는 그 다음 주일도 어스킨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 그 교회 예배에 참석해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일은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어스킨 목사를 만나 스칼렛이 물었습니다. "지난 주일엔 제가 큰 은혜를 받았는데 오늘은 왜 은혜를 받지 못했을까요? "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난 주일엔 당신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즉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나를 만나기 위해, 내 설교를 들으러 왔기 때문에 은혜를 못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교만은 말씀을 가로막고, 축복을 가로막고, 성공을 가로막고, 은혜를 가로 막아버립니다. 교만을 물리쳐야 합니다. 요한 세바스챤 바흐는 1,100여곡 이상을 작곡한 작곡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죽기 몇 달 전까지 그리고 실명상태로 악보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작곡을 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코랄은 "주여 당신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 라는 것입니다. 이 곡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음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 "하나님은 경건한 음악과 함께 하신다 "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1,100여 곡이 넘는 작품 끝에 그는 항상 S.G.D라는 서명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Soli Gloria Deo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바로 이러한 정신과 신앙과 삶이 은혜 받은 사람의 생활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세상 그 무엇이 쓰러뜨릴 수 있을까?
가장 암울한 순간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 그 무엇이 쓰러뜨릴 수 있겠습니까? 현재의 상황이 아무리 회복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의 은혜를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님의 손짓 한 번이면 인생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성경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소망하라” 고 말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믿고 기대하고 선포하십시오. 항상 은혜를 소망하는 맘으로 살면 하나님은 반드시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주님께 소망을 둘 때 곧, 은혜를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장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사방에 절망스런 일 뿐이라도 기대하고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기만 하면 회복은 순식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문제의 잿더미 속에서 금세 해답의 싹을 틔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두르고 있으면 그 어떤 적도 감히 우리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상관없이 단호히 선포하십시오. “ 하나님, 놀라운 복이 제게 오고 있음을 믿습니다.”
절대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있음을 온전히 이해하면 자신감 있는 삶이 펼쳐집니다. 그럴 때 감히 요구하지 못할 은혜를 사모하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고난도 더는 고난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특별대우를 느끼게 됩니다. 그 결과, 누구보다도 훌륭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도록 체험하게 됩니다.

/긍정의 힘(7)/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민13:25-33)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라/
사람이 어떤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근시안적인 눈을 가진 사람은 바로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하지만 비전을 가지고 먼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귀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상당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아니면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나요? 충분한 자질과 장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메뚜기 같이 약하고 약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나요?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느끼는지에 따라 성공의 크기가 결정 될 수 있고,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나기도 합니다.
자기존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감정인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입니다. “나는 나 자신이 좋아” 혹은 “나는 내가 싫어” 와 같은 말이 자기존중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자아상은 일종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데 ‘스스로 자신을 그린 그림’ 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자아상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보다는 자신에 대한 ‘시각’을 반영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건강한 자아상은 개인의 성공과 행복을 결정하는 핵심요소 중 하나입니다. 자기개념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한다는 데 있습니다. 심리학적 증거에 따르면, 우리의 행동은 자아상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진 사람이 큰 거래를 따내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거나 회사 야구시합에서 장외홈런을 터뜨릴 수도 있는 반면 건강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도 때때로 실패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자화상은 현실로 그대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우리는 마음에 품은 이미지 이상으로 성공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격이 없어. 하찮은 존재야.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어. 나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이야.‘ 이런 생각은 행동으로 그대로 나타납니다.  “나는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왜 하필 나야?”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없어.” 자아상이 약한 사람의 대화 속에는 늘 이런 문구가 따라다닙니다.
반면 하나님과 같은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만족한 삶을 살아갑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좋아하심을 알기에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지금의 모습으로 창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위한 목적과 계획이 있으심을 믿습니다. 저는 제가 세상에 있는 누구와도 다른 유일한 존재인 줄 압니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기에 당장 그것을 찾아보려 합니다” 자아상은 육체의 일부분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는 무의식속의 ‘관리인’ 이어서 마치 자동차의 자동속도조절장치와 같은 기능을 담당합니다. 속도를 시속 100킬로미터에 맞춰놓으면 도로 상황에 따라 차의 속도가 늘거나 줄어도 자동속도조절장치는 항상 원래의 속도를 회복시켜 줍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자존감
을 얻을 수 있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남의 말, 이를테면 부모나 주위의 친구의 생각이 나의 자아상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이 만든 이미지로부터 자아상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기 성격이나 외모, 능력, 업적에 따라 자기 맘대로 자화상을 그려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아상이 하나님의 음성과 정확히 일치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사로 보시며 우리의 잠재력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굳게 믿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한 큰 계획이 있으시다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아상이 약한 탓에 우리는 늘 김빠지는 소리만 해댑니다. “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저 말고 능력이 많고 배운 것도 많은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저에겐 그런 능력이 없어요.”
구약에 나오는 기드온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가 기드온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믿든 말든 하나님은 우리 역시 이런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도 불굴의 용기와 힘과 잠재력을 소유한 용사입니다. “ 하나님은 저만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거예요. 저는 용사가 아닙니다. 용기도 없고 강하지도 않아요.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기드온이 저랑 같아요? 기드온은 자신감과 결단력이 있는 위대한 리더니까 하나님이 그런 엄청난 말씀을 하신거죠.” 정말 그럴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악한 미디안에게 국토를 유린당하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자 기드온의 본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저 같은 것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겠습니까? 저의 집안은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가장 보잘 것 없습니다. 저는 그런 제 아버지 집에서 가장 못난 사람이고요.”
중요한 사실은 기드온이 자신을 보는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이 전혀 달랐다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두려움이 앞섰으나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강하고 용감한 자로 대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스스로 약하다고 생각했으나 하나님은 그를 강한자로 보셨습니다. 기드온의 눈에 자신은 부족하고 결단력이 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그는 유능하고 대담한 리더였습니다.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용사로 보십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엔 그렇지 않아도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이미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 자격이 없고 결단성도 없으며 약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나 한 몸 챙기기도 바쁜 하찮은 존재라고 자기를 비하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뛰어난 용사입니다!
/자아상을 바꾸라/
누구나 자아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견에 동의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이제 변명 같은 것은 그만하고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을 행하십시오. 혹시 약점만 보거나 자신감이 없어서 온전한 삶을 나중으로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직장이나 교회에서 리더 자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역사회에서 봉사할 수 없다고, 곤궁에 빠진 친구를 도울 수 없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시지도 않았지만 기드온이 책임을 회피하도록 놔두지도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완벽한 사람만 사용하려 하신다면 누가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불신앙과 메뚜기 사고/            
400여 년 동안 애굽 땅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해방되어 모세의 인도로 광야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란 광야 가데스 접경에 이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진격해서 그 땅을 차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성들은 앞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정탐꾼을 보내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서 우리가 싸워서 얻어야 될 가나안을 좀 잘 미리미리 조사를 해서 유익한 정보를 얻은 다음에 그 정보를 기초를 해 가지고 전략을 세우고 그래서 전쟁을 합시다’ 라는 의견은 그럴듯해 보이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1장22절에 보면 하나님이 정탐꾼을 보내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탐꾼을 먼저 보내자고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꼭 그렇게 고집을 피우면 한번 정탐꾼을 보내봐라' 하고 마지못해 허락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불신앙을 합리성에 포장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결과, 이 정탐꾼 사건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비참해졌습니까? 그들은 보고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두려움만 심어주었고 불신앙이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불신앙이 얼마나 치명적인 해를 끼칠 수 있는가를 우리는 미리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잠복성 불신앙이 고개를 들면 우리를 메뚜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무엇이 메뚜기 사고입니까? 문제는 커 보이고, 자기는 작아 보이고, 하나님은 안 보이고, 세상만 보이는 것이 바로 메뚜기 사고입니다. 믿음이 없어지고 불신앙이 그들의 의식을 사로잡으니까 작은 성곽도 하늘에 닿을 큰 성곽처럼 보인 것, 이것이 메뚜기 사고입니다.
메뚜기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첫째로 마음에서 선전포고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마음에서 싹트고 자라는 내면의 태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내 모든 생각, 좋은 생각, 나쁜 생각, 메뚜기 같은 생각, 거인 생각, 다 가릴 것 없이 모든 생각을 예수님 앞에 갖다 놓고 예수님이 그 생각을 다스리도록 위임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 주십니다.
둘째로 크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선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십니까? 오늘도 이 우주만물을 보존하시면서 지키시며 우리의 생명을 지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입니까? 이 인류 역사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고백하고 순간순간 이 하나님을 마음에 묵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메뚜기처럼 보인다고 생각되는 사고는 모두 사라집니다.

잠복해 있는 불신앙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중요한 계기가 되면 우리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메뚜기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무서운 힘이 될 수가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는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고 그 하나님의 크심을 선포하고 묵상하면서 기도로 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승리하는 자 되어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영광 돌리는 내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열 명의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자신을 메뚜기에 비교한 것은 신앙적으로 자신을 비하하고 믿음을 상실한 메뚜기 신앙입니다. 이런 메뚜기 눈으로 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영적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이러한 메뚜기 눈과 반대되는 것이 바로 여호수아 갈렙의 눈입니다. 그들은 적이 비록 강하고 클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능히 이길 것이라는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만용이 아니라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안에서 나온 용기요 확신입니다. 이제부터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와도 그 어떤 위기가 여러분을 흔들어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도망하지 말고 당당히 맞서십시오. 여러분은 약하지만 여러분 안에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힘든 싸움이 되리라 예상한 모세는 전투에 앞서 적을 알고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6주 후에 정탐꾼들이 정보를 입수하여 돌아왔습니다. 일단 모두의 입에서 반가운 소식이 나왔습니다.  “우리가 듣던 대로 정말 훌륭한 땅입니다.” 그러자 온 무리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아멘!” 정탐꾼들의 말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이 포도송이와 석류를 보십시오. 우리가 본 과일 중에서 가장 크고 맛이 좋습니다. 그뿐입니까? 여기 꿀도 맛보세요. 맛이 기가 막힙니다.” 이번에도 모두 입을 모아 기뻐했습니다.그런데 마지막 소식이 떨떠름했습니다. “하지만 그 땅에는 거인들이 있더군요.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떼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오, 저런!” 계속해서 정탐꾼 열 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우리에겐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거인들을 물리칠 수는 없어요. 너무 크고 강하다고요.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에서 “스스로 보기에도”에 주목합시다. 그들 앞에 놓인 적과 장애물에 비해 그들의 자아상은 너무나 작고 초라했습니다. 그들은 적이 몰려오기도 전에 스스로 무력하게 쓰러지는 불쌍한 메뚜기 떼와 똑같았습니다. 이 열 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한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만 초점을 맞췄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패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두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분명히 정탐하고 온 땅은 똑같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마치 다른 땅을 다녀온 것처럼 말했습니다. “모세, 우리는 충분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무시무시한 거인들이 사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보다 훨씬 크십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어서 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인가요?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지극히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흔하디흔한 ‘메뚜기’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명령을 실천할 ‘능력’과 자세를 갖춘 적극적인 사람을 원하십니다.
불행히도 애굽에서 나온 그 많던 사람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에 들어갔지만 나머지는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음과 자존감의 부족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미래를 그들에게서 빼앗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히브리 백성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지만 연약한 자아상 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들이 약속을 성취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들의 시각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요? 성공한 사람, 건강하고 활기차고 행복한 사람으로 보는가요? 하나님을 위해 쓰임을 받는 사람으로 생각하는가요?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는 일을 행할 ‘충분한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가요? 하나님과 그 크신 능력 안에서 스스로 상당하다고 확신하는가요? 아니면 자신을 하찮은 ‘메뚜기’로 보는가요? 하나님은 우리를 ‘충분한 능력’의 소유자로 보십니다.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되돌리고 싶다면 먼저 ‘믿음의 눈’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어야 합니다. 스스로를 행복하고 성공한 사람으로 보는 시각이야말로 인생의 거친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한 열쇠입니다.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승자이자 불굴의 용사로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목표 없이 아무렇게나 인생을 떠도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대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불행과 낙심, 외로움, 병마, 패배 속에서 허덕이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게 아닙니다. 인생의 고난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자신도 모르게 패배에 익숙해진 사람도 있고, 잘못된 생각에 빠져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던 자아상은 이내 일그러진 지 오래입니다. 환경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그러니까 부모님이나 친구의 상처 주는 말과 행동, 의견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니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습니다. 나쁜 쪽으로 왜곡된 자아상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그릇된 이미지를 받아들일 때 낙심과 가난, 아니 그보다 훨씬 무서운 파괴의 힘이 우리를 파멸로 이끕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그런 깨진 거울에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 정말로 현실이 되어 버립니다. 죽을 때까지 인생의 쳇바퀴 속에서 맴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고 생각을 통제하여 하나님의 선하심 속에 거하기 바랍니다. 항상 작은 생각과 믿음과 기대를 품는 한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은 작은 행복뿐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처럼 눈에 보이는 약점과 실패와 불가능만 생각하면 결국 ‘메뚜기 정신’이 우리 속에 뿌리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도 놀라운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엄청난 잠재력과 재능을 숨겨 놓으셨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고 믿음으로 나아가며 하나님이 주신 꿈과 소망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만이 그 잠재력을 분출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사로 창조하셨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그 믿음을 끊임없이 성장시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차고 넘치는 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긍정의 힘(8)/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라
(시16:1-5, 눅15:20-24)
/존귀한 자로 창조된 자/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피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천덕꾸러기라고 합니다. 사람 중에는 깔보이고 무시당하며 소홀히 대접받는 비천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인기가 있는 귀인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은연중에 귀인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옷도 맵시 있게 입으려 하고 차도 고급차를 타려고 하며 신분상승을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화려하게 자신을 치장하고 굵직한 자리를 여럿 꿰차고 명함에 빽빽하게 적어 가지고 다니며 과시하여 그 앞에서 굽신거리게 할 수는 있어도 진심으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 그리고 칭찬을 들으며 귀히 여김을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돈은 구겨지고 더럽혀져도 돈으로서의 가치를 그대로 인정받는 것처럼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져도 하나님은 내 가치를 변함없이 인정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귀한 사람입니다. 비록 죄로 인하여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는 다른 사람에 비해 얼굴이 덜 예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건강이 좋지 않을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나와 성격이 달라서 내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은 비록 서로 다르기도 하고, 또 못나 보이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두고 보시기에도 아까울 정도로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존귀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때로는 내가 나를 죄악의 진흙탕에 몰아넣을 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인생길에서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금 일으켜 세워주시고, 성령으로 강건케 해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존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 시편 16: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시편 16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이 얼마나 존귀한 자인지를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세움을 받은 자신만 존귀한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모든 성도가 다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들입니다. 목사나 장로님, 권사님들만 존귀한 자가 아닙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하나님께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존귀한 성도는
어떻게 사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1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 자신을 살려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십시오. 내가 지금 죽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명이 위험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내가 주님께 피난 갑니다'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 피난은 언제 가는 것입니까? 나라가 평안하고 부강할 때가 아니라, 전쟁이 나고 난리가 나서 너무너무 살기가 힘들 때 피난을 갑니다. 평안할 때는 피난을 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람께 존귀함을 받습니까? 어려움을 당할수록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더욱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아무리 초라하다 하더라도 하나님 품으로 피난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받아주십니다.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입혀주십니다. 왜 그렇게 해 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존귀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나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그렇게 존귀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행복을 찾습니다. 2절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습니다. 하나님 안에 행복의 열쇠가 있고, 하나님의 안에 행복의 자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기준으로 삼고, 세상에서만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려는 사람은 존귀한 성도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며 살아가야 할 성도들인데, 하늘의 유업과 축복은 보지 못하고 세상적인 것에만 연연한다면 어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존귀한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존귀한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은 다른 성도를 존귀히 여깁니다. 다윗은 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다윗은 자신만이 존귀한 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왕인 자신은 존귀한 자이고, 권력이 없는 평민은 존귀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가 다 존귀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존귀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 성도들을 존귀히 여기고, 그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을 갖게 됩니다.
왜 세상 속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예수님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자신과 동일시 하셨겠습니까? 거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는 버림받을 만큼 작게 취급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합니다. 권력의 높낮이에 따라서 차별하기도 하고, 돈을 얼마나 가졌느냐에 따라서 차별하기도 합니다. 남자냐 여자냐 하는 것으로 차별하기도 하고, 나이를 얼마나 먹었느냐 하는 것으로 차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신앙인들조차도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 하는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기도 합니다. 목사를 바라볼 때에 얼마나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느냐 하는 것으로 목사를 차별하기도 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온통 차별이 공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똑같이 존귀한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따라서, 또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그 눈으로 사람을 바라보시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작아 보이는 그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그들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계십니다.
또 하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이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특정한 일부의 사람만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셨습니다. 죄를 지고 사망의 고통에서 헤매이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으로 십자가 사건으로 구원함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예수님은 부자나 권력을 가진 사람만을 위해서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하신 사람들이기에 주님은 작은 자 하나까지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과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신 형제들이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하실 만큼 존귀한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도 존귀하게 생각한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들의 존귀함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못난 내 남편, 내 아내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여겨 생명 주셨고, 구원하셨고, 존귀하기 때문에 나와 함께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함께 신앙생활 하는 분들 가운데서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그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면서 구원하신 귀한 생명입니다.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 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께 존귀히 여김을 받는 사람은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다윗은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어떤 경우에도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거나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주위에 온통 우상숭배의 풍조가 만연해 있다 하더라도 자신만은 독야청청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의 자리에 굳게 서 있겠노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나는 쓸 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날 내 삶의 모습이 아무리 초라하고 또 죄악 가운데서 헤매며 사는 삶이었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존귀함이 반감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데,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존귀하지 않다고 깎아내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나는 존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늘 가슴에 품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만 존귀한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분들이 다 나처럼 존귀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남편, 내 아내도, 또 함께 신앙생활 하는 모든 교우들도 똑같이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한 사람으로 만드셨고, 존귀한 사람으로 인 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존귀하신 예수님을 대하듯이 존귀하게 여기며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더욱 존귀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두 걸음을 보신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도 우리를 이렇게 보십니다. 우리가 쓰러 넘어지는 순간이나 실수하는 순간은 보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두 걸음을 보시고 우리가 잘한 일을 보시고 최고의 순간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수하기도 하고 해서는 안 될 행동도 합니다. 이때는 하나님과 우리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지만, 언제까지 자책하며 죄책감 속에 빠져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항상 앞으로 나아가며 자신감 있게 고개를 들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완성되어 가는 작품’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한 일 두 가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신을 보려면, 어떤 실수를 하든지 자신의 잠재적 가치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내재 가치를 판단할 때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지,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내가 얼마나 인기가 있고 성공했는지를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의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유일무이한 창조물인 우리는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을 세상에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삶을 제대로 누리고 싶다면 현재 자신의 모습이 맘에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나머지 온갖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행복을 모르며 마음에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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