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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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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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2-04-09 05:48:09, Hit : 42
File #1    생명의_신비_부활의_신비.hwp (61.0 KB)   Download : 2
Subject   일어나는일은모두생명사건이다
일어나는 일은 모두
생명 사건이다
(고전 15:20-26)/
일어나는 일은 모두
생명 사건입니다.
그 생명사건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의 차이입니다.
생명이 죽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단지 부패와 소멸이
따를 뿐입니다.
작든 크든 일어나는
일은 모두 생명 사건입니다.
사건의 중요성은 생명의
중요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중요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은
모두 사고입니다.
양의 많음과 규모의
큼과 효과의 높음은
사건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고를 재는 수치입니다.
영국 국교회에 소속한
어느 목사님은 두 인조
다리를 차고 다녔는데
그 당시 인조 다리
(Artifical limbs)는
요즈음의 것과 같이 세련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인조
다리를 한 어느 목사님
집에 머무르면서 자신이
경험한 신앙 간증을
이야기할 때였습니다.
그는 목사님과 저녁식사를
마친 후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내일 아침에
구둣가게에 가서 새 구두
한 켤레를 맞춰 신으십시오”
인조 다리를 한 목사님은
혹시 그가 농담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든 대화를
다 마치고 잠자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후, 목사님도
그의 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는 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의 종이 하라는
대로 하여라”
하나님께서는 스미스
위글스워스를
‘나의 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명칭인가요?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그 목사님은
그날 밤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시내로 가서 신발가게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인이 도착해서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가게 문을 열자마자
목사님은 안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습니다.
가게 직원이 다가와서는
“안녕하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라고 물으니 “구두 한
켤레만 주시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치수는 얼마나 되시죠?
색깔은 어떤 것으로 할까요?”
이 물음에 목사님은 주저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때에 가게 주인이
그의 발을 보면서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선생님! 이 상태에선
저희들도 어떻게 도와
드릴 수가 없다”
고 말했습니다.
그때 목사님께서,
“아무튼 됐어요.
내가 여기 온 것은
새 구두 한 켤레를
사러 온 거니까,
치수는 팔 이구요
색깔은 검정색으로 주세요”
직원은 목사님의 요청대로
구두를 찾으러 갔는데
몇 분 뒤에 돌아온 주인은
그가 요구한 구두를 건네주었고.
구두를 받아든 목사님은
오른쪽 인조 발끝을 구두
속에 집어넣자 참으로
꿈에도 상상치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조 발과 다리가 갑자기
진짜 사람의 발과 다리로
되어버린 것이고 똑같은
현상이 다른 쪽 다리에도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고
다만 결론을 현실로 알고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그 가게를 실제로
걸어서 나갔다는 사실을!
새 구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새 두 다리를
가지고 말입니다!
정말인가? 사실이고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있기에
그래서 신비의
세계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창조해 낸다는 개념
자체를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죽음까지도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는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라는 말이 신약
성경에는 그렇게도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소식을 들은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전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줄로 이미
믿고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부러진 뼈를 고치시는
것이나 없는 다리를
만드시는 것이나
아무런 차이점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가장 큰 이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의 맛과 향기를
알고 체험했던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육신의 양
식보다 영혼의 양식이
더 맛있었고 귀중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양식을 위해서
믿음을 강하게 하고,
하나님 안에서 인격을 세우며,
언제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품성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전력투구했고
그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말씀을 체험으로 아는
삶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았던 하나님의 종
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인도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감격/        

올해도 온 산천초목들이
씨 맺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씨는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죽음이 판치는 세상에
생명을 지녔으니
얼마나 감격인가요?
또 자기들의 대를 이어갈
가능성을 갖게 됐으니
얼마나 큰 희망인가요?
이제 서리가 내리고
눈이 오고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도
괜찮습니다.
생명이 이를 다 이기고
내년 봄에는 파랗게
노랗게 빨갛게 다시
춤추며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바람 스치고
돌이 조롱해도
생명을 가졌으니
미소 가득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생명은
금년에 갑자기 잉태된
것이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주신 것입니다.
이를 변함없이 갖게
된 것이니 참으로
축하할 일입니다.
우리도 죄와 죽음과
연결된 생명을 가졌으나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주신 영생의 생명을
가진 자로 거듭나게
됐으니 이보다 더 큰
성공이 어디 있는가요?
영생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니(요 1:12)
세상에 이보다 더
부러울 것이
어디 있는가요?
항상 기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살전 5:16).
가끔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사는 것이 무엇이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나고 보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라고 질문을 해보곤 합니다.
특히 주변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고 표현할
만큼 애쓰는 모습들을
보면 더욱 생각해 보고
동시에 근심과 걱정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근심 걱정,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를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죽음은 주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고 슬픔이었고
동시에 모든 것을
빼앗아 가버린
좌절이요 실패였습니다.
주님의 죽음으로 인해
주님을 따르던 자들의
모든 희망과 꿈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희망과 꿈이 무너진
그곳에는 그것보다
더 깊은 슬픔과 좌절과
두려움이 있었지만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을 바꿔버렸습니다.
고전15:22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주님의 죽음은 모든
것을 빼앗아 버렸는데
주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삶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삶을 주었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제대로 사는 삶의 의미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고전15:32-35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히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을 앎이니라.
부활을 믿게 된 사도와
성도들은 삶이
변화되었습니다.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성공이라는 목표가 있었고, 사회적인 대접을 받고 싶은 자리에 서고 싶은 목표가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은 목표가 있었고 권력의 자리에 서고 싶은 목표가 있었습니다. 호기심에 혹은 병 고침을 받기 위해,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주님을 따르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지적 욕구 충족을 위해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민족 해방을 위해 주님의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따르던 자들도 있었습니다. 즉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삶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된 후에는 자신들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사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예수를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기꺼이 드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여러분 자신인가요? 주님인가요?

삶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죽음 앞에 모두 좌절했고 슬픔과 두려움에 빠졌으며 그들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목표가 한 순간 무너지고 말았고 그들은 흩어졌으며 각각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났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처럼, 다락방에 숨어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전혀 꿈도 꾸지 못했던 다시 살아나신 부활이라는 사건을 접하게 됩니다. 이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기쁨과 동시에 의심이었으니 고기를 잡으러 내려가는 베드로와 같이 부활이 실감나지 않았고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주님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 믿어지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40일 동안 계속 나타나시고 만나 주심으로 그들은 부활을 믿게 되었고 이 부활을 믿게 된 사도들은 삶의 엄청난 변화가 왔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사도들, 여인들, 주님의 부활을 지켜보았던 모든 사람들은 좌절과 두려움, 슬픔과 절망에서 희망과 기쁨, 용기와 순종의 삶으로 변화 되었습니다.두려움에 벌벌 떨던 베드로였지만 부활 진리를 믿게 되는 바로 그 순간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러한 증언을 한합니다. "우리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2:36) .
부활하신 주님은 만난 사람들, 이 사실을 믿는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 어떤 핍박과 어려움 앞에서도 담대하게 살게 되었으며 재산을 빼앗겨도, 직장에서 쫓겨나도, 그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사는 길을 택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으니 그것은 바로 기쁨과 감사, 소망과 담대함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게 된 성도들은 슬픔이 기쁨으로, 속상함이 감사로 변했고 좌절이 소망으로 변했으며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사는 의미를 깨닫고 삶 속에 기쁨과 감사가 있으며 소망이나 담대함이 있는가요?

사람은 죽음 앞에 모든 것을 상실합니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모든 것이 무너짐으로 인한 슬픔과 좌절과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해 주님을 믿는 자들은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고 영생의 부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영생을 얻은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고 동시에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살고 왜 사는지를 알고 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삽니다. 동시에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기쁨과 능력으로 살고 감사와 담대함으로 살며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떳떳하게 살고 영원한 생명과 상급을 바라보며 속상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기쁨으로 감사하며 삽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진정한 삶을 주셨고 영생을 주셨으니 영원한 생명을 얻음에 대해 소망을 갖고 남은 생애를 살기를 바라고 동시에 이 세상에서 살면서 제대로 사는 삶과 삶의 기쁨과 감사를 주셨으니 부활의 그 날을 기다리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고 담대함과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을 지난 뒤 자연은 더욱 싱그럽게 피어납니다. 온 산천에 주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생명의 노래가 넘칩니다.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대자연도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은 세속의 환경 속에서도 꽃과 나무들의 장엄한 '무언의 합창'을 듣습니다. 사랑의 물을 먹는 꽃이 더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도 이런 이치라는 사려 깊은 설명입니다. 그래서 앗시시의 프란시스는 꽃과 새들에게 사랑의 설교를 했던 것일까요? 십자가에서 확증하신 주님의 사랑(롬5:8)을 이 봄에 더욱 열심히 나누시기 바랍니다.

/죽음을 통과한 참 생명/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리겠습니다. 어떤 남자에게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는 어린 딸을 수시로 폭행하므로 딸은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짱눔 아버지를 피해 이른 나이에 집을 떠났습니다. 엄마는 딸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고다. 그런 쓸쓸한 생각을 하며 엄마는 죽었습니다. 집을 떠난 딸은 온갖 고생을 하였고 그러면서도 행복한 가정을 꿈꾸었으며 좋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혼에 성공하지 못하였고, 아이도 갖지 못하였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처가 계속 따라다니며, 그녀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깊은 공부를 하고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그런 아버지를 선택했다는 사실, 그런 쓰라린 경험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런 불행한 인생을 자신이 선택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영혼의 성장을 위해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배웠고 이제 아버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마음에 고요한 평화가 찾아와서 존재의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는데 9년 동안 노력한 결과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찾아가 사랑을 전하기 위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아버지는 병에 걸려 병원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어린 딸에게 한 짓이 몹쓸 짓이었음을 알았고 부끄러워했고, 죄의식에 시달렸으며 그런 상태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딸은 중환자실로 들어갔고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동안 많이 늙었고, 몹시 초췌한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옆에 앉아서 자신의 머리를 아버지의 가슴에 가만히 갖다 대었습니다. 딸의 마음은 아주 평화로웠고 복수나 미움의 마음은 전혀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희생자라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아버지를 용서한 것입니다.

그렇게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가 눈을 떴습니다. 오래 전 집을 나간 딸이 곁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버지가 깨어날 때 딸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말입니다. 그의 몸이 초긴장 상태가 되고 있는 것을, 몸에 부착된 여러 기계들이 보여주었습니다. 딸은 자신의 손을 아버지의 머리에 갖다 대었고 아버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아버지를 사랑해요. 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했어요.”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딸은 다시 한 번 속삭였습니다. “아버지, 제가 당신을 사랑해요. 아버지를 완전히 용서했어요.” 긴 침묵이 흘렀고 아버지가 한숨을 내쉬었고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긴장 상태를 가리키던 기계들이 평온한 상태임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딸은 아버지가 35년 동안 지니고 있었던 슬픔과 죄의식을 순식간에 녹인 것입니다. 보복을 위해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대신, 선물을 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눈물로 범벅이 되었고, 그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렸습니다. 딸은 다시 앉았고 팔로 사랑스런 아버지를 감싸 안았으며 다시 머리를 아버지의 가슴에 대었습니다. 더 이상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 또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용서받았고, 놀라운 평화와 안식이 그의 모든 세포에 깃들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멋진 딸을 오랫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드럽게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얼굴에 깃든 미소는 순수한 평화였습니다. 그 순간 기계들이 멈춰 섰고 간호사들이 달려왔지만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트로 아버지의 머리를 덮었습니다.

딸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잃었지만, 슬픔에 잠기지는 않았고 간호사들에게 잠시 아버지와 함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딸은 자신의 손을 시트로 덮인 아버지의 가슴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분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이분은 세상에 와서 당신의 역할을 완전한 모습으로 수행하였습니다. 저는 이분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제 이분이 하늘 고향으로 돌아가오니, 그 여정을 축복하여 주십시오.” 딸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습니다.  

내면의 평화가 우리 인생의 필수 과목입니다. 딸은 그 과목을 만점으로 이수하였습니다. 두 발이 전쟁터에 있었지만, 가슴에 향기로운 장미꽃을 피운 것입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실은 선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치유되기 어려운 끔찍한 경험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 오기 전에 아버지와 맺은 선의의 계약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원하여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화의 길을 걷기 위하여 말이죠. 마침내 내면의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존재의 평화가 최고의 사랑으로 꽃피어났습니다. 그 사랑은 고요하였고, 숭고하였습니다. 그 사랑의 빛이 시들어가는 아버지의 100조 개 세포에 비춰졌습니다. 그 빛의 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순식간에 죄의식은 사라지고 순결한 평화가 아버지의 영혼을 감싸 안았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와 딸은 함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힘은 이처럼 강력합니다.

인생이란 적어도 절반은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일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일의 여정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배반합니다. 나 또한 누군가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배반합니다. 누구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반된 역할을 동시에 맡으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고통과 어둠은 그런 과정과 맞물려 있습니다. 타인이 내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타인의 일입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은 가급적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할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게 상처를 입힌 상대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랑이라 합니다. 그런 용서의 사랑이 가능하려면, 우선 내 마음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입었는데 어떻게 평화로운 마음이 될까요? 그것이 가능한 길을 매리의 이야기에서 배웁니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간 하늘이 더 맑고 푸릅니다. 그 푸른 평화를 위해 일부러 폭풍우를 선택하였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은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고통에서 기쁨으로 나아가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는데, 그것이 제자들에게도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몸의 부활을 이루셨고, 제자들은 마음의 부활을 이루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서워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절망과 고통에서, 평화와 사랑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런 모습에 대해 우리는 제자들도 부활하였다고 말합니다.

/일어나는 일은
모두 생명 사건이다/
작든 크든 일어나는
일은 모두
생명 사건입니다.
사건의 중요성은
생명의 중요성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생명의 중요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은
모두 사고입니다.
양의 많음과 규모의 큼과
효과의 높음은
사건과 무관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고를
재는 수치입니다.
변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며 본래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적의 핵은 생명입니다.
생명과 신비와 경이로움 존엄과 고마움을 아는 자는 생명 현상이 곧 기적임을 압니다. 그리하여 고요함 속에서 박동하는 우주의 맥박을 감촉하고 침묵으로 부르는 삶의 찬가를 듣고 계절의 황홀한 원무에 모두가 동참되어 있음을 압니다. 그리하여 사랑의 삶을 삽니다.

기적을 모르는 자들의
무지와 기적을 바라는
자들의 어리석음이
생명을 소외시키고
생명을 침식하고 있습니다.
생명현상 밖에서 기적을
구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사고입니다.
기적을 초자연적,
초인적 힘의 변증으로
보는 한 인간적 사건의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진실로 위대함은 기적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기적은 오직 사랑의 기적뿐.
사랑의 기적이 구원입니다.
기적은 신의 변증이 아니라
사랑의 당위입니다.
살려냄이 기적입니다.
서서히 질서 있게
알차게 성숙되었던 것이
어느 순간을 기하여 발화되고
폭발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을 너무 알려고 하지 말고
기적을 너무 강조하지 말고
인간을 위함의 적극성과
창조성에 기적의 동기를
찾아야 합니다.
기적은 나누어진 개개인
에게서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성실한 나들이 모여
서로를 위하고 존중하고
사랑할 때 불가능하다던
새 세계가 드러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느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 '행복은 지상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는 있으나
존중하지 못한다."  
감사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행복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란
감사할 일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자연과 사람이,
사람과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가 감사함입니다.
그래 빚진 마음에
무엇인가 나를
드리려는 삶입니다.  
있을 때 잘 해란 말은
너무 중요한 말입니다.
내가 가진 것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남을 소중히 살릴 때
우리는 행복의 나라
시민이 될 것입니다.
파랑새는 언제나 지금
이곳에 당신과 나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편안하다면
이곳 저곳이 없고
따라서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없으리.
만약 편안하지 못하다면
편안의 폭과 깊이는
커질 수 있으나
하늘과 땅이
본래 한 뿌리요
해와 달이 합하여
더욱 밝기는 하나
가고 오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없기도 한 것 같아요
. 생사를 넘어서지
못한 삶의 꿈에서
인간의 인간에 대한
책임은 무한 책임입니다.
비극적인 현실의 슬픔을
빚어낸 원인과 책임이
자기에게도 있음을
통찰해야 합니다.
안일을 원하고
운명을 찬양하고
자기 합리화를 만들고
변명의 자료를 찾아서
책임을 밖으로 돌리는
순환논리가 역사를
어둠으로 몰고 갑니다.
마구 내 뱉는 책임 없는
말들에서 웃음을 구하고,
우정을 논하고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진 일그러진
우리 모습들.
말씀과 말에 구별을 두려는
사람들은 지나친
형식론자가 아니면
자기 은폐와 책임회피의
그늘 속에 빠져든 자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가진 것,
아는 것, 할 수 있는
것으로 역사의 한 부분을
책임질 때 새 아침이
서서히 어둠을 밀어내고
우리 모두가 그리는
아름다운 새 세상을
밝힐 것입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오늘을 시작합니다.
가난해도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보기 부러워 할
정도의 여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행복해 보일
듯하나 실제로는 마음이
추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려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에 조건을 알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은
만족을 모를 터이니
마음은 추운 겨울
일지도 모르겠네요.
몸이 추운 것은 옷으로
감쌀 수 있지만 마음이
추운 것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요.
사는 기준이 다
같을 수는 없지요.
행복의 조건이 하나
일 수는 없답니다.



생명의 말씀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역사는 다른
생명을 살리는 역사입니다.
강에 번성하는 물고기들은
다른 생명을 살리는 힘이
되고 실과는 맛이 좋아서
사람과 짐승들에게
즐거움을 주며 또
한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약재로 쓰입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를
잡아다가 회를 쳐서
먹어보면 바닷물이
짠데도 불구하고
짠 맛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소금 물속에서
이렇게 다는 맛이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정도인데
죽은 물고기는 소금물에
넣으면 그만 짠 맛이
되고 맙니다.
다 같은 소금물인데
결과는 이렇게
다른 것이다
. 이것이 생명의 신비가
아니겠나요? 물고기는
살아 있는 동안 짠 물만
먹고 살지만 하나님께서
물고기의 생명 속에 바
닷물을 잘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속에 있습니다.
물고기 안에서 알이
부화하여 거기에서
생명이 자랄 때 이미
그 알 속에는 생명의
구조와 기능과 모든
원칙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생명의 신비, 성장의 신비,
죽음의 신비, 부활의 신비
생명의 신비는 우리가
영원히 신비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실입니다.
나 자신이 생명인데,
내가 나를 모릅니다.
출생부터 신비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
난다는, 이 생명의
출생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또한 성장의 신비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그저 젖을
먹이는 것뿐인데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라고
아버지 어머니를 고루
닮아서 자라납니다.
뼈는 뼈대로,
몸은 몸대로,
정신은 정신대로
날로 자라납니다.
성장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엄연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성장의 신비 역시
생명의 신비입니다.
또한 부활의 신비가
있습니다. 부활
그 생명 자체가
신비인 것입니다.
스스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신비가 없고 이적이란 없습니다.
다만 창조의 역사가 있고
생명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부활은 생명의 신비입니다.
자라나는 싹을 한번 보십시오.
다 죽은 것 같은 동토
(凍土)에서 움이 돋아
나는 작은 생명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애벌레가
나비로 자라서 날개를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벌레였던
잠자리가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생명은
여전히 신비롭고
그 변화는 너무나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성경에서 부활이라는
말은 변화라는 말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죽음으로의 변화,
생명으로의 변화,
그리스도적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습니다.
생명 자체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없던 생명이 태어났고
그 생명이 성장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 다음 단계로
부활이라고 하는 차원의
생명이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사실이고 죽음이
사실인 것처럼
부활은 사실입니다.
부활생명도 다음
단계로 향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의 생명도
우리 앞에 놓여있는
엄연한 변화의
한 단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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