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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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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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2-04-08 14:11:02, Hit : 35
File #1    삶은_이미_죽음을_껴안고_있다.hwp (28.5 KB)   Download : 2
Subject   삶은이미죽음을껴안고있다

/삶은 이미 죽음을
껴안고 있다/
(벧전1:3-9)
매일매일 사람은
태어나고 매일
매일 태어나는
것만큼 죽습니다.
장구한 세월동안
반복되는 이 사건은
지금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할 것입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삶은 이미 죽음을
껴안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생과 사, 그것은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 포개져
있습니다. 어떤
죽음이든지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절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내 삶과 그렇게도
가까이 있는 죽음의
실체를 속 시원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는
인간이 풀어야 할
과제중의 과제입니다.
죽은 자를 사망(死亡)
했다고 하는데 죽어서
세상에서 달아난 자,
잊혀진 자라는 뜻입니다.
친애하는 사람이 죽으면
잊지 못하고 제사나
추모제를 지내지만
그러나 그것도 3 대를
못 가고. 곧 잊혀지고 말며
사람은 이전 세대를
영원토록 기억할 능력이
도무지 없습니다.(전1:11)
그러니까 죽은 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저 세상 사람,
우리 인간의 영역을 떠난
잊혀진 망자(亡者)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영원토록
상대할 유일하게 남는 자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창조주가 되시는 절대
권능 자 하나님!
생사화복(生死禍福)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
그분이 내게 구원자
(그리스도)가 되어
주시지 못한다면
인간은 절망입니다.
하나님이 내 영혼을 받아
주셔야만 삶의 일체의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은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고,
가치 부여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들로
가득 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은 모두가
우리에게 생명과 복이
되는데, 그 약속들의
정점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단지 15 분/
서양 연극 중 생명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한 젊은이를 주인공으로
한 <단지 15분>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뛰어난
성적으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논문 심사에서도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제 학위 받을 날짜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이었고
그의 앞날은 장밋빛
그 자체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껴서
정밀 검사 결과
청천벽력 같은 진단이
떨어졌는데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남은 시간은
단지 15 분! 그는
망연자실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습니다.그렇게
5 분이 지나갔습니다.
이제 남아있는 인생은
10분이었습니다.
이때 그가 누워 있는 병실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는데
억만 장자였던 당신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속히 상속
절차를 밟아 주십시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에게
재산은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그렇게 운명의 시간은 또
다시 줄어들었는데
그때 또 하나의 전보가
도착했습니다. 당신의
박사 학위 논문이 올해의
최우수 논문상을 받게
된 것을 알려 드립니다.
축하합니다! 하지만
이 축하 전보도 그에게는
아무 위안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절망에 빠진
그에게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왔지만
그 전보도 그의 시계를
멈추게 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15분이 다 지나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연극은 한 인간의 삶을
1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응축시켜 보여 줍니다.
이 청년의 삶은 우리
모두의 삶과 같습니다.
젊은 시절의 꿈을 좇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어느 새 머리카락이
희끗해집니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즈음이면,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 후회한들
아무 소용없습니다.
시간은 강물과 같아서,
막을 수도 없고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물을 어떻게
흘려 보내느냐에 따라
시간의 질량도 달라
질 수 있습니다.
루 시우스 세네카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
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정말 시간의 빠른 흐름이
새삼 느껴지며 참으로
두렵기까지 합니다.
지금 이 시간도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시간은 매사에 멈추는 법도,
또 더디게 흘러가는 법도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시간을 저축하거나
남에게서 빌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우리에게
무한정 베풀어지는
것도 아니며 길어야
고작 100년의 삶을
우리 인간들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바로 우리의
생명인 것입니다!
시간을 돌처럼 헛되이
버리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우리 인생  길에 누군가
늘 곁에 있다면,
우리 마음은 풍성함
속에 언제나 행복하고
희망 찬 나날이
될 것입니다.
한 번 지나가는
인생길에 마음을 여시고
내가 베풀어야 할
것은 다 베풀어
보시기 바랍니다.
베풀며 산다는 것은
  곧 나의 기쁨이고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유독 “죽은 자의 부활‘ 이라는 표현이 도처에 많습니다. 다시 삶을 얻는다는 부활(復活)!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트 예프스키는 부활이라는 대 작품을 썼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대한 뜻을 기리거나 역사적인 사건을 오래도록 계승하고자 할 때 부활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의 부활‘은 수평적이고 역사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역사 너머의 초월적인 영적 세계의 부활까지도 약속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신비로운 영성체(靈性體) 부활, 곧 ’신령한 몸‘의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만이 말씀하실 수 있는 영역입니다.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사람, 죄를 운명적으로 안고 태어난 허물진 인간은 절대로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영적인 차원의 세계다. 그래서 하나님은 좀처럼 믿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부활의 표징(表徵)들을 많이 남겨주셨다. 봄이 되면 마른 잎 다시 살아나는 것도 부활의 표징이고, 불치의 병이 하나님 은혜로 고침 받는 것도 부활의 표징입니다. 남대천에서 산란된 연어가 3-4년 동안 수십만 킬로의 여행을 한 후, 제가 빠져나갔던 그 구멍으로 정확하게 되돌아와서 자기 분신을 낳고 일생을 마치는 것도 부활의 징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권선징악 (勸善懲惡)을 말하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을 지지하는 것 자체가 죽은 자의 부활을 어렴풋이나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종들은 부활의 표징을 실제로 나타내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썩은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종이 있다니 이는 복 중의 복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사의 세계는 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음까지도 생명으로 바꾸어 놓으실 수 있는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라는 말이 신약성경에는 그렇게도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기 할 일을 다 했으면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 여기 머무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한 바울의 말씀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빌1:19-29)인자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신 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셔서 하늘 보좌에 오르신 분이시십니다. (막16:19) 그래야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게 되기 때문입니다.’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요12:31-32)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에서 들린다는 말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뜻합니다.

(지옥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스올’,희랍어 ‘하데스’
는 쓰레기 더미라는 뜻)
지옥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더러운 쓰레기처럼
하나님께 버림 받
은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다면 이보다
더 큰 절망은 없을 것입니다.
죽는 것이 절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고 구원하신다면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생으로
들어가는 영광스런
입문(入門)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인류가
소망할 수 있는 궁극의
소망이요, 최종 목적이며,
가장 위대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반석위에
굳건히 세워줄 유일한
근거도 죽은 자의 부활이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목숨 걸고 지켜낼 용기를
주는 것도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의 소망은
그저 단순한 인간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실현하실 하나님의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불러내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롬4:17) 부활 영광의
하나님께 세세무궁토록
찬양을 돌려드리고
아멘으로 화답하자.
우리는 죽은 자의 부활을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체험신앙/삶의 체험을
통해 얻은 신앙은
위기 속에서 힘을
발휘하게 마련입니다.
다윗의 용기와 자신감은
목동 노릇을 하면서
위기 가운데 함께하시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경험하고 그 손길에 의지한
자연스런 결과였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깨닫고
믿는 자들과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일대일의
만남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우리의 믿음은 삶의 위기
가운데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이 닥쳤을 때 선으로
악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만나길 구하시기 바랍니다.
관계의 어려움 가운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를 경험하길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가장 탁월한 방법으로
가장 적절할 때에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체험신앙으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깨달아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가슴 뛰는 삶을 위하여/
여러분은 삶을 위하여
얼마나 시간을
할애하십니까가?
하루에 몇 시간 씩
일하고, 얼마를 벌고,
어떤 야망을 이루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모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삶은 언제까지나 저쪽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
시계는 몇 시인가요?  
삶은 시간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시간에 의해
살고, 또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시간
속에서 생을 마칩니다.
우리는 시간을 쓰고
아끼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린 일
이라고 믿습니다.
시간을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시간을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쓰는  
계산하며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시간은 쓸모 있는
측정 수단이지만,
우리가 부여하는 만큼의
가치만을 지닙니다.
웹스터 사전은 시간을
‘연속선상의 두 지점
사이의 간격’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흔히 탄생을 삶의 시작으로,
죽음을 삶의 끝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탄생과 죽음은 연속선상의
두 지점일 뿐입니다.
시간이 흘러가면
모든 것들이 변합니다.
안도 변하고 바깥도 변합니다.
우리의 외모도 내면의
자아도 변합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지만
우리는 대개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조차 그것에 저항합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주위
세상은 빠르게 변화합니다.
그것은 위리와 속도를
맞춰 주지 않습니다.
변화란 언제나 너무 빨리
오거나 너무 늦게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화는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는 변화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에
겁을 먹기도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변화를 선호합니다.
예기치 않은 변화가
생기면 불안해하고,
혹시 삶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까 봐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환영하든
거부하든 변화는 일어납니다.
삶의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변화는 지금까지의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하고,
새롭고 낯선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의
낯설음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유방암을 두 차례나
이겨낸 작가 로니 카예는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
라고 말했습니다.
변화는 대개 지금까지의
문이 닫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문들의
이름은 끝, 완성,
이별, 죽음 등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안정한
시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기는 닫혀진
문을 보고 슬퍼하면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가장
힘이 드는 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바로 그 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만일 그대가 변화에
맞서 싸운다면 평생
싸움만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껴안는 방법,
아니면 적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잘 모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실재
모습보다는 과거나
미래의 모습을 봅니다.
어제의 내가 반드시 지금의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크나큰 자유가 있습니다.
그때 어 이상 과거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일어나
샤워를 하며 어제의
때를 씻어 내지만,
어제 느낀 감정의 찌꺼기는
여전히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지
않는다면, 상대방과
자신을 진정으로 바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살지 않으면,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과거의 문을 닫지 말고
가끔씩 그 문을
들여다보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더 나은 방법을
추구하는 데 전력을
투구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나은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시설이나
새로운 조직 또는
새로운 방법들이 아니요,
성령께서 쓰실 수 있는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즉,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기도의 투사들인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어떤 시설이나
방법이 아닌 사람에게
임하시며 어떤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기도의
사람들에게 기름을
부으시는 것입니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신자의 어떤 행실이나
공로, 종교적 의무의
실천 같은 것들로
죽지 않습니다.
신자의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은 단지 죄를
죽이는 일에만 관여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발견하고
또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게 하고 죄와
싸울 수 있는 복음적인
동기를 제공해 주는
주체로 활동합니다.
/구원에 이르는 문/
세상에는 참 많은
문과 통로가 있습니다.
모두 다 비슷한 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주님은 단 하나의
문만이 구원에 이르는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3-1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가지는 포도나무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야만
살 수 있습니다.
몸속의 혈관들과 관련된
병이 참 많습니다.
혈관에 대한 대부분의 원인이
콜레스테롤을 비롯한
불순물들이 혈관에 쌓여서
혈액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심근경색이라든가
뇌경색이라든가
하는 병들은 바로
그 혈관이 막혀서
터지는 경우에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적인
통로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통로를 통해서
우리가 늘 공급받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영적인 통로가 불순물이
쌓여서 막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인생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인터넷에
접속해 있어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앉아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접속해 있어야만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접속해 있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 말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런데 예수님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무성하게 열리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에
가지만 무성하고, 포도가
열리지 않으면 일 년
농사 헛일 한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포도나무에 가지가
무성하면서 정작 열매가
없다면 그것을 무엇에
쓰시렵니까?
포도나무는 가구를
만들 수도 없고
포도가 나지 않으면,
정말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우리가 가지의
영양분을 열매에게
양보해야 합니다.
가지가 자신이 모든
포도나무의 영양분을
독차지하려고 하면,
포도열매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지는 열매에게 영양분을
공급하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가지는 열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지입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풍성
하게 하는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가지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가지가
되어서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는 일에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주시는 은혜, 받는 믿음/
절망의 순간에
찾아온 만남의 은혜,
우리 안에 심어주시는
소원의 은혜,
책임 있는 삶을
도전하시는 질문의 은혜,
기적을 창조하는 말씀에
은혜에 반응할 때
기적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새로운 일들을 계획하시고
그 일을 통해 더 큰
은혜를 베풀길 원하실 때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은혜를 받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절망 가운데
희망을 보고 빈들
앞에서도 풍성히
거두게 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
양심을 찌르는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회개하는 믿음.
낯선 땅, 새로운 목표를
향해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지금 가진
것을 헤아리며 뒤로
물러서지 않는 믿음.
우리의 삶 가운데 주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먼저 믿음의 한 발을
내딛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힘으로는
못하겠다고 느껴질 때,
나의 힘으로는
못하겠다고 느껴질 때,
다시 걷는 그 걸음이
두렵게만 느껴질 때,
그 걸음에 힘을 주시는 분.
하나님으로 인해
다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1:9)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계를
반영할 수 있을 까요?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십니다.
영생의 약속이 고마우면
그 기쁨 전해야 합니다.
(딤전6:12 요일5:11)
믿음과 선한 행실로
이웃에 본을 보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주님 다시
오시면 지혜로 다스리시며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십니다.
새 하늘 새 땅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롬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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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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