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Connect
Member : 0 Guest : 0

help
subject/ name/
content/ comment

영암교회
위드뉴스

View Article     
Name
  서정호 2022-03-26 08:14:21, Hit : 65
File #1    인생은_고통백화점.hwp (44.0 KB)   Download : 3
Subject   인생은 고통백화점
/인생은 고통백화점/
주님은 우리
인생의 플러스(+)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터에 나가 죽은
미국의 청년들의 수는
20여 만 명 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
전쟁터에 자식들을
보내놓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며 마음에
스트레스를 받아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의
숫자는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그렇다.
총에 맞아 죽는 것보다
걱정 때문에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말이다.
사람은 총에 맞으면
살수도 있다.
그러나 근심에 사로
잡히게 되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이 나쁜
생각을하게 되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총보다 무섭고
암보다 무서운 고난으로
인한 근심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첫째로, 다른 환경과
다른 장소와 다른 일들을 찾으라.
근심은 또 다른 근심을
낳고 걱정은 또 다른
걱정을 낳게 된다.
근심이 몰려오면 그 자리에
있지 말고 그 자리를 떠나라.
우리의 문제는, 스트레스가
몰려오거나 걱정이 생기면,
그 자리에 퍼질러 앉아
근심과 스트레스를 분석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는데 있다.
근심에는 능력(?)이 있다.
근심은 우리를 묶는 힘이 있다.
근심은 또 다른 근심을 낳는다.
그러므로 그 자리를
일단 떠나야 한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뿌리치고
떠낫듯이 말이다.
그 현장에서는 이길 수 없다.
제 3의 장소로 가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생각을 다듬어야 한다.
술을 앞에 놓고 술을 먹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비디오를 틀어놓고
비디오를 안 볼 수 있는가?
근심의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근심이 싹튼 현장에
머물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근심하는 자리에서
피하는 것이 지혜일 때가 있다.
성경은 시험 당할 때에
피할 길을 주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근심꺼리가 찾아
올 때,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생각의 채널을
바꾸고, 때로는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 옳을 때가 있다.
근심 안 하려 할수록
더욱 근심하게 되고,
고민 안 하려 할수록
더욱 고민하게 되고
잊으려 할수록 더욱
간절히 생각나고,
음식을 절제하려 하면
할수록더욱 음식
생각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한 본성 아닌가?
결심으로 안된다.
노력으로도 안된다.
떠나라! 피하라!
다른 일과, 다른
생각에 몰두하라!
때로는 시험과 근심
꺼리를 무시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수 있다.
둘째로, 근심과 문제가
생기면, 원초적인 근심과
걱정에 사로 잡히지 말고
고상하고 거룩한 근심
꺼리를 찾아야 한다.
근심이 있음은, 살아
있다는 증거의 표현이다.
살아 있는 자만
근심할 수 있다.
동물들은 근심이 없다.
우리가 근심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생명이기에
그런 것이다.그렇다면
근심을 안 할 수 없다면
근심과 걱정의 내용들을
바꿔보자. 이를테면
구원에 이르는 근심이나
거룩해지는 근심이나 믿음을
얻기 위한 고상한 근심 말이다.
셋째로, 고난의 내용은
우리가 바꿀수 없지만
그 고난을 바라보는
생각의 방향이나 근심하는
우리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큰 배는 작은 키로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근심과
고난의 문제도우리의
생각의 방향에 따라
생사가 달라지기도 한다.
"안된다면" "안되는것" 이다.
안된다는 키로 방향을
안되는 쪽으로 설정하면
우리의 배는 그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될 것이다"하면
"잘되어 지는 것이다"
컵에 물이 반이 있다.
생각의 방향이부정적적인
사람은 물이 반박에
안남았다고 불평하고
절망 할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상황인데도
긍정적인 사람은
물이 아직도 반이나 남았다고
감사하며 소망을 품을수 있다.
"왜 나만 이러냐고"
생각할수 있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이 어디선가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수 있다.
우리는 고통의 백화점에서
우리의 생각대로 그리고
필요를 따라 물건을
쇼핑하고 구매할수 있다.
고통의 백화점에는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선택은 우리가 해야 한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은
마이너스(-)를 구매하려 할 것이다.
오래된 학습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제는 믿음과 긍정적인 생
각으로 풀러스를 구매해야 한다.
언제나 우리 인생의 플러스
(+)는 주님이시다.
지금의 우리의 처지와 형편
이 절망적이고, 위기이고,
가능성이 희박할지라도
주님이 오셔서 플러스(+)가
되시면 우리의 삶은
홀연히 역전될 수 있다.
우리의 고단한 삶은,
주님의 역전이 아니면
기적이 아니면 안되는
처절한 하루,하루가 아닌가?
주님을 플러스로 생각하고,
믿고, 기대하고, 의지하라.
그분만이 우리의 일몰을 일출로
근심을 찬송으로, 걱정을 기도로,
저녁을 아침으로, 절망을 소망으로
역전시키실 수 있으시다.
그뿐인가, 마침표가 없으신
주님이 오셔야우리의
지독하고 처절한 고난과
고통의 문제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이다.
쓰레기통에서도
꽃을 피우시는 분,
고목에서도 꽃을
피우시는 분,
사막에서도
물을 내시는 분,
광야에서도 고기를
먹게 하시는 분,
홍해속에서도
길을 내시는분,
끈하나 없이 지구를
공중에 떠있게 하시는 분,
한번도 해와 달이
바꾸어 뜨게 하는
실수를 하지 않으시는 분,
언제나 공평하신 분
언제나 선하신 분,,
그분으로 인하여 재대신
화관을 쓰게 될 당신은,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걸작중의 걸작이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우리는 멀어져
감을 두려워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
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 하지만
안개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개 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가끔은 우리 삶이 안개
속에서  헤멜 때가 있지요"
힘들고 고통스러움을
안개에 비유하지만
안개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밝은 태양이 떠오른다는 것을
알려주기에 힘들고 고통스런
시간이 지나면 좋은 날이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합니다.
/뛰어봤자 벼룩이라도
벼룩은 뛰어야 한다/  
벼룩을 유리병 안에 넣고
뚜껑을 씌워 놓으면,
뚜껑까지만 뛰어오릅니다.
그렇게 병뚜껑 까지만 뛰는
것에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뚜껑이 없어도 그만큼만
뛰어오릅니다.
벼룩 스스로 자기의 한계에 갇히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 몸의 몇 십 배를 뛰어 오르던 일은 아련한 추억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날마다 더 높이 뛰어 오르는 것입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감사하고, 더 많이 충만하고, 더 높은 비전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다.



현재 우리가 당하고 있는
모든 저주와 같고 형벌과
같은 고난들, 걱정, 염려,
불안, 어둠은 이미
십자가에서 청산하신 것들입니다.
우리를 근심케 하시거나,
우리에게 허리가 꺾이는
것과 같은 고통을 주시는
것은 주님의 본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눌리게 하심'이 아니라
'누리게 하심'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누림을 경험하고
충만하게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신 일들을 인정하고,
날마다 뛰어 올라야 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 안에는 엄청난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으십니다.
우리의 할일은 능력을
새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능력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아주 옛날에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금을
가지고, 돌멩이를
다루듯이 차고 놀았는데
그 광경을 본 외국인들이
껌 값을 주고 금덩어리를
사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금의 가치를
모르면 금을 가지고도
거지로 살아갑니다,
우리 안에 계신 분은
금보다 귀한 분이십니다.
그분의 가치는 실로
계산이 안 되는
어마 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분 안에는 불가능이 없으시며,
안 되는 일이 없으시며,
마침표가 없으시며
절망이 없으십니다.
우리가 만일 그 사실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실제로는 활용하지
못한다면 마치 은행에
수천만 원을 쌓아 두고도
굶고 있는 사람과 같은 것이며
비행기를 타고도 비행기
안에서 제공되는 기내식을
돈이 없다고 거절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무한한
잠재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신분을
소유한 특별한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 피의 값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우리는 그 신분을
망각해서도 안 되며
그 신분으로 모든 특권과
영광을 누려야할
필연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잘 살아야 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잠들어 있는
능력을 깨워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오래전부터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워 드려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셔야 하고
그분이 통치하셔야 합니다.
무엇으로 깨울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내 안에
피로 값 주고 은사로
주신 능력들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기도인데
그냥 기도가 아니라
깨어 있는 기도이며,
창공을 뚫고 올라가는
우렁찬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그런 기도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했었는데 지금은
추억으로만 남는다.
/기도는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끌어
올리는 펌프/
기도는 펌프와 같은데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끌어 올리는
펌프를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못하고
안 되니 어떻게 샘물을
끓어 올릴 수 있을까요?
기도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의 패배의식 때문입니다.
기도를 했으나 거절당한
경험이 많으면,
우리는 벼룩처럼,
더 이상 기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기도에 대한 거절감 내지는
기도의 패배주의가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그러나 안 되기도 하지만,
안 하기도 합니다.
벼룩의 병뚜껑 때문입니다.
벼룩이 뚜껑을 치워도,
더 이상 뛰어 오르지
못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듯 많은 성도들은,
영적인 열등감과
패배의식이 병뚜껑이
되어 더 이상 기대도,
기도도, 희망도 없이
무력하게 하루를 보냅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뚜껑을 치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뚜껑이
있다는 것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없다는
패배의식, 기도해도
별수 없다는 고정관념,
아무리 해도 나는
안 된다는 열등감,
그 뚜껑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고정관념, 열등감,
패배의식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며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며,
희망을 잃게 만들며
주저앉게 만들며 늘
실패와 무기력의 틀,
내지는 병 안에
갇혀 살게 만듭니다.
누가 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패배의식이나 고정관념,
열등감은 창살 없는
감옥과 같은 것입니다.
벼룩은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더 높이
뛰어 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벼룩이 그 능력을
상실한 이유는 뚜껑이
있다고 믿고 생각하는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사실은 뚜껑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뛰어 봤자
벼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뛰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속입니다.
기도해봤자 벼룩이라고,
아무리 해봤자 안된다고
우리는 그 사단의 속삭임에
속아서 몇 번 기도하다가
포기하고 몇 번 시도해
보다가 중단하는 것입니다.
뛰어 봤자 벼룩일지라도
그래도 뛰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벼룩의 사명이 아닌가요?
어제까지는 뚜껑으로
인하여 주저앉았었지만,
오늘은 다시 뛰어
보지 않을래요?
우리는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얼마든지
뛰어 오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의
힘으로 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는 죽으려 했지만,
오늘은 살기 위하여
희망을 품고 뛰어 봅시다.
그 어떤 고정관념도
그 어떤 열등감도,
그 어떤 패배주의도
우리를 가두어
놓을 수 없습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이 대단해서입니다.
피지 못하는
꽃은 꽃이 아니듯,
울지 못하는
새는 새가 아니듯,
뛰지 못하는 벼룩은
벼룩이 아니듯,
기도하지 못하고
절망하는 성도는
성도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Prev    삶은이미죽음을껴안고있다
서정호
  2022/04/08 
 Next    송구 영신말씀(자료)
서정호
  2021/12/25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lifesay
홈

서정호 목사 온라인 자료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