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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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1-12-17 16:23:09, Hit :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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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성탄절 말씀(자료)
성탄절 말씀 (자료)

1.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2:1-14
2. 성탄의 은혜
갈라디아서4:3-7
3. 성탄의
비전과 새시대
미가5:1-15
4. 요셉의 성탄
마태복음
1:18-25
5. 빈 방이 없습니다
누가복음2:1-7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 2:1-14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천재들 덕분에
온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또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
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세 명의 천재들은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화가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20세기 과학과 문화 예술을
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 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전 인류가 어떠한 혜택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이를
다 끌어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간증과 개인이 받은 은혜들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종이가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류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었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알고 있다 해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신문 한 모퉁이에라도
거기에 대해 감사하다고
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묘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용기가
필요합니까?
용기라는 덕목은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세상에 오신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면,
'아무리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용기 없이는 그렇게 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을 하면 육안으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고 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 중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 분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제를 했습니까?
팡파레를 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고 천한 몇 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얼마 전에 미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그의 행차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경쟁하듯이
여왕의 의전품 목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행사 때마다 2벌씩
갈아입을 옷을 가져갔고,
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상복까지 가지고 갔으며
왕이 병이 들면 급하게 쓰려고
19l짜리 혈장액을 들고 가고,
또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 변기에나 앉다가
세균에 오염될까 두려워서
변기 깔개까지 들고 간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챙기다 보니
짐만 해도 2000kg이 넘었고,
게다가 전속 미용사 두 사람에
경호원과 수행원을 수십
명씩 데리고 갔습니다.
이 여행에 들어간 경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26억원이나 되었습니다.
여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여서 그를 영접하느라고,
또 언론사들은 그 사실을
보도하느라고 이만저만
요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영국이라는
나라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밀키웨이 즉, 천
문학자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은하계를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펴놓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태양계는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작은 별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도
그렇게 요란을 떠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14절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샬롬이요 에이레, 우리 나라 말로 화평이요, 화목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바로 위에 있는 1장 79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냄을 받았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 천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없는 우리의 현주소가 무엇인가 잘 아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에서 명료하고 간단하게 우리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베개를 높이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해당하는 평민의 모습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설명한 글을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일년 동안 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 십년이지만 그 우정의 탑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은 1분이면 족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1년이 넘도록 서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아마 교회를 다녔나 봅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가책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간 후 그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노력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편지를 5통이나 보냈는데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서 이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을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자기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앞에 녹아지지 아니할 사람의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벨을 누르는 친구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 이상이다. 이건 비유가 안된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대형교회에서는 1년에
한 400건 정도 장례가 납니다.
400건이면 매일 한 건 이상
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엄청나게 많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그런 십자가도 져야 됩니다. 물론 그 중에 대부분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는 장례입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많이 있지만, 가슴 아픈 장례도 있습니다. 자녀가 먼저 예수 믿고 주님을 만난 뒤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 믿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하고는 수년 동안 부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꼭 예수 믿으라고 눈물로 전하기도 하고, 대각성 전도 집회 때는 초대해서 복음을 듣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안 믿고 계속 미루기만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31절 이하에 바울이 너무나 흥분하고 너무나 황홀해서 소리친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 마음에 그대로 와 닿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어찌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아시고, 나 같은 것을 예정하시고, 나 같은 것을 때가 되자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하셨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고, 우리와 평화 하셨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의롭다 하시는 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받으시고 우리와 평화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우리를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겠는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눅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암흑과 혼돈 속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찬송가 469장을 여러분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 혼자 불러도 1시간이라도 부를 수 있는 찬송가입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얼마나 우리 예수님이 좋은지요.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 잘 몰라서 이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가서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의 왕입니다. 근심, 걱정을 그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 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셨습니다. 티끌보다 많은 죄, 석탄보다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서 1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명령합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고부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봐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좀 심한 다툼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절대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백번이고 천번이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용서함으로써 그들과 평화를 누림으로 우리가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묵은 감정을 가지고 계속 그를 접대합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알아두십시오. 주기도문을 통해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보십시오.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평화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보류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서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 하였다고
하면서 형제와 불화하면 안됩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지난 시간을 잊어버리십시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 갈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십시오. 과거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과거에 대해서 문을 닫고 못질을 해 버리십시오. 자물통을 잠가 버리고 다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으로서, 가는 곳마다 이 평화의 왕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이 강단에서 어느 자매가 한 세례 간증을 제가 기억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을 때 그는 생활이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간염이 걸려서 고생을 하고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그런대로 수입이 좋고 잘 사니까 마음이 다른 데로 갔나 봅니다.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볼 생각은 안하고 바깥으로 돌면서 마음을 다른 데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데 이웃에 있던 우리 교회 순장이 가서 전도를 했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면 다 이길 수 있어요.' 새가족반에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날 말씀을 배웠습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점점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그 놀라운 평화가 자기 마음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갈등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 살아계신 주님이 그 자매의 마음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이 그 마음을 다스리니까 평화를 해치는 모든 것들이 다 쓸려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남편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다 용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으로 자녀들을 들볶으며 그들에 대해 항상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연약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얼마나 감사하게 여겨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애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치유를 받으니까 얼마 후에 간염까지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끝으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마음의 평안이 있기에 인생의 거센 파도를 두려움 없이 타고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신으로, 평화의 대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 합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음을 선포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를 통해서 새로워지는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역사가 창조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면서 사는 내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성탄의 은혜/
갈라디아서 4:3-7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4가지 중요한 신앙의 기틀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창조 신앙이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해 주신 것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는 오늘 말씀 드리는 임마누엘 신앙이다.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능치 못한 것이 없다는 믿음이다. 셋째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신앙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재림신앙이다. 주님이 역사의 종말에 다시 오셔서 역사와 인류를 심판하시며 믿는 자가 휴거되고 부활하리라는 믿음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죄 아래 있고 율법의 정죄 아래 있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기업을 누리게 된 것을 찬양하고 있다.
먼저 3절에 보면 예수님 오시기 전 우리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실존을 묘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하였더니' 했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율법 아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정죄되고 율법과 죄의 종노릇하던 삶을 설명해 주는 말이다.
여러분! 세상에서 뭐니 뭐니해도 가장 비참한 삶이 종의 삶이다. 노예의 신분이다. 종에게는 자기 인권이나 권리나 소유가 없다. 자식을 낳아도 그 자식마저 자동으로 다시 종의 신분이 된다.
종은 짐승처럼 마구 다루어진다. 미국의 노예역사를 보아도 참 얼마나 비참한지 모른다. 채찍으로 얻어맞고 부모와 자식이 팔려 생이별하고 부부가 갈라지는 그러한 쓰라린 경험을 했다.
옛날 예수님 시대에 보면 종이 되는 몇 가지 케이스가 있었다. 첫째는 남의 돈을 빌려 빚을 갚지 못하면 그 빚 때문에 종이 된다. 다음으로는 전쟁에서 전쟁포로로 사로잡혀갈 때 종이 되었다. 그리고 종의 자녀로 태어나면 자연히 종이 된다. 한번 종이 되면 누가 빛을 갚아주거나 탕감해 주지 않는 한 종에서 자유인이 되는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의 종된 우리 인간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다. 그것이 무엇인가?
4절에 보니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셨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때가 차매'하는 말씀이다.
그 다음에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하였다.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임마누엘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원이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희생이었다. 저는 제
가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으로 힘든 경우가 자녀를 잃은 가정의 장례식을 집례할 때였다. 아직 나이 젊은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는 가정에게 참 위로할 말이 없다. 그 때마다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심정을 늘 생각해 본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보내주시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신 주님의 그 고통하는 사랑을 생각해 보곤 하였다. 성탄은 이 고통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구원받고 축복받게 된 사건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게 된 임마누엘의 축복과 사랑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1)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무슨 말인가? 인간으로 오신 주님의 모습을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죄인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요 내용이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 이브를 유혹해서 범죄케 한 뱀을 향해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셨다.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마귀의 권세와 세력을 꺾으시고 인간을 그 손에서 빼앗아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지난 주 Homeless를 위한 성탄예배 때 그런 말을 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 어떤 의미에서는 Homeless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누구보다 우리의 고독과 아픔, 슬픔과 고통, 헐벗음과 굶주림을 잘 알고 계신다. 여기에 큰 위로가 있다. 그가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그가 채찍에 맞고 찔림은 우리를 고치시고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2) 율법아래 나게 하셨다
율법으로 우리는 정죄 아래 있게 되었다. 죄를 범한 우리는 법에 의해 모두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의롭다고 판단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 아래 태어나셔서 십자가상에서 자신의 생명을 쏟아바침으로 그 모든 율법의 의를 이루신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 하셨는데 그 말은 헬라어로 '테테루스타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빚을 다 갚았다는 뜻이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의 빚을 다 갚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할렐루야! 이것이 가장 큰 성탄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
아들의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이제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의 유업을 얻게 하셨다.

성탄절은 홀로 된 자나 병상에 있는 분들이나 객지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더 외롭고 쓸쓸한 계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뻗치고 베푸는 계절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그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는 길이 되는 것이다.

/성탄의 비전과 새 시대/
미가서 5:1-15

미가는 주전 8세기경에 약 60여 년간이나 오래 활동한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요담왕(왕하 15:32-36)과, 친 앗수르적 사대주의 정책을 취하던 아하스왕과(왕하 16:1-16), 반 앗수르적 정책을 취하다가 그의 침략을 받았던 히스기야왕(왕하 18:1-8)의 치세 어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선지자 미가에게 임한 영감의 사명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과 남은 자의 구원을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죄와 심판과 구원에 대한 외침은 비단 미가의 경우뿐 아니라, 사실상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외친 저들의 존재적 사명의 주제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은 미가 선지자에게 영감된 거룩한 메시야의 탄생, 곧 성탄과 그 성탄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새 시대인 신약복음시대의 영광을 예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Ⅰ.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받았습니다(미 5:1-4).

메시야의 탄생은
유대땅 베들레헴이고,
그의 기원은 태초요
영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라고 하였습니다.
1. 언제 탄생할 것인가?
이스라엘의 수난기라고 하였습니다. 딸 군대, 딸 시온(미 4:8, 10, 13, 5:1), 곧 이스라엘의 통치자(재판자)가 이방의 침략을 받아 업신여김을 받을 때(미 5:1)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임산한 여인이 고통을 겪는 해산의 기간'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미 5:3). 바로 이러한 성경의 표현은 이스라엘에 왕이 끊어진 수난기를 뜻합니다.
메시야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생활에 붙인바 되어 고난을 겪을 것이고, 그 동안에 베들레헴에서 먼저 난 다윗 왕가는 단절이 되어 버린 때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시기를 가리켜 「고통하던 자」,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여 년간의 암흑기를 가리킵니다.

2. 어디에서 탄생할 것인가?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인데 여기에 에브라다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에브라다는 '열매가 많다'라는 뜻인데, 스불론의 베들레헴과(수 19:5) 구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에브라다'는 라헬이 베냐민을 해산하고서 죽어 장사되어, 라헬의 묘비가 세워진 기념 장소로 슬픔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창 35:19, 48:7).
베들레헴은 '유다 족속 중에 작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하나의 동네였습니다(눅 2:4). 초라한 시골 촌락이었습니다(요 7:42).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오실 메시야는 어떤 특정 지역의 후광을 입고 오시지 않고, 이름 없는 한 작은 촌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만민이 먹을 생명의 양식으로 떡집인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어떤 분이신가?
메시야의 실체가 어떠한가?

그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라고 하였습니다(미 5:2).
곧 메시야를 가리킵니다. 바로 왕되신 메시야를 뜻합니다(마 2:2). 그 분은 영원하신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옛날부터, 영원의 날부터'라는 뜻으로, 메시야의 자존적 영원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메시야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었습니다(요 1:1). 영원하신 아버지라고 하였습니다(사 9:6).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게 거룩한 메시야 성탄의 비전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실 메시야는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막대기 아래 압제를 당하던 흑암의 날(때), 곧 임산한 여인이 해산의 고통을 겪는 날에, 작은 고을 유다 베들레헴에서 상고, 태초이신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그 분이, 곧 왕이 탄생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출생하실 하나님의 독생자로,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 7:14). 학개 선지자는 그 분을 가리켜 '만국의 보배' 곧 만국의 소원이라고 하였습니다(학 2:7). 말라기 선지자는 '의로운 태양',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말 4:2).


Ⅱ. 메시야의
새로운 통치 시대를
예언하였습니다(미 5:5-15).

하나님의 영감은 선지자 미가에게 메시야의 탄생으로 말미암는 새 시대를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메시야 시대의 영적 통치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메시야 시대 곧 새 시대의 영적 통치를 몇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신적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오실 메시야 자신이 여호와의 자격으로 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에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섰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으로 서서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오실 메시야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하나님(아버지)은 하나라고 하였습니다(요 5:17-23, 14:7-10).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목자적 통치(다스림)
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중에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그는 자신이 선언하신 대로 선한 목자였습니다(요 10:11). 그는 양의 문이었습니다(요 10:9). 그가 양의 목자로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양의 목자로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그는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능력의 이름으로 그의 양떼를 먹이는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그의 손에서 그 양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 양들에게 영생을 보장한다고 하였습니다(요 10:28).
이렇게 선지자 미가는 선한 목자, 능력의 목자, 구원의 목자, 생명의 목자로서의 메시야적 통치시대를 내다보았습니다.

3) 그는 우주적 통치
자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4절 하반절에 「…그가 창대하여 땅끝까지 미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오실 메시야의 통치 영역을 말합니다.
여기 '창대하다'는 말은 '크게 자라다', '크게 되다', '굳게 되다', '강하게 되다'라는 뜻으로 메시야적 통치 영역이 땅끝까지 미칠 영향을 나타내는 예언입니다. 과연 그의 통치 영역은 예루살렘이었고, 온 유대였고, 사마리아와 땅끝이라고 하였습니다(행 1:8). 모든 족속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8:19). 온 천하만민이라고 하였습니다(막 16:15). 모든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4:14). 결국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들로부터 이루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영역이 되고 말았습니다(계 7:9). 그래서 천사는 외치기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하였습니다(눅 2:10).

4) 평화의 통치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5절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앗수르 사람의 침략을 받았을 때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내리라」고 하였습니다(미 5:6b).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땅과 이스라엘 궁을 짓밟을 때 하나님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운 지도자, 권능 있는 지도자들을 일으켜 그를 격퇴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미가의 표현은 구약적입니다. 신약에 오실 메시야께서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 같은 용맹스러운 지도자, 권능 있는 지도자를 일으켜 교회가 당하는 모든 위험에서 영전(靈戰)의 승리를 거둘 것이라고 하는 예언입니다.
말하자면 미가서 5장 5절의 「이 사람」은 그 뒤 6절 하반절에 「…그가 우리를 그(원수)에게서 건져내리라」고 예언된 사람과 같은 자를 가리킵니다. 그 메시야는 우리의 '평강'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바울은 그를 우리의 화평이라고 하였습니다(엡 2:14).

5) 메시야적 통치는 남은 자,
곧 선택 자가 그 대상
이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7절에 「야곱의 남은 자」, 8절에도 「야곱의 남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전 성경에서 보여주는 '남은 자'의 궁극적 의미는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을 의미하였습니다. 저들의 영적 특질을 두 가지로 묘사하였습니다.

(1) 그 하나가 이슬 같고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미 5:7).
① 즉 저들의 구원이 천적(天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다」고 하였습니다. 남은 자의 구원은 하나님께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율주의적인 구원임을 알려줍니다(요일 4:10).
② 그것은 공개적 비밀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슬과 단비는 실로 고요합니다. 들레지 아니합니다. 더욱이 이슬은 밤에, 아무도 모르게 고요히 하늘에서 내립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가 그러하다는 사실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구원체험은 참으로 신비한 비밀인 동시에 또한 결과적으로 드러나고 마는 공개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2) 또 다른 하나는 사자와 같은 기질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미가서 5장 8절에 「야곱의 남은 자는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수풀의 짐승 중의 사자 같고 양떼 중의 젊은 사자 같아서 만일 지나간즉 밟고 찢으리니 능히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야적 구원의 은혜를 받는 자는 소수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열국 중과 여러 백성 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승리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자는 승리의 표상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를 믿는 신자들도 이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은 그리스도의 승리 때문에(요 19:30), 부전승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6:33). 그 부전승의 비결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5:4). 믿음으로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요일 2:13), 사망을 이긴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5:56-57). 말하자면 오실 메시야의
통치권내에 들어가는 신약시대
구원받을 신자들은 이슬 같고
단비 같은 고요한 생명의 통치와,
사자 같은 능력의 힘을
받아 살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6) 종말론적 구원역사
시대라고 하였습니다(미 5:10-15).

이 부분 중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를 보면,
① 먼저 전쟁을 종결짓는다고 하였습니다. '말'과 '병거'와 '성읍'들을 훼파하고 무너뜨린다고 하였습니다(미 5:10-11).
② 각종 우상들과 여러 우상숭배의 행위들을 끝장내어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복술', '점장이', '새긴 우상과 주상', '아세라 목상'들을 섬기는 백성과 나라들을 하나님은 진노와 분한으로 심판하겠다고 하였습니다(미 5:12-15).
세상에 전쟁이 종식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없어지고 마는 때는 종말의 때가 아닌가? 바로 그 시대는 예수 재림과 함께 성취될 완전 신권 통치시대가 아닌가? 그렇다면 미가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종말론적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 재림까지 내다보며 새 시대를 예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선지자 미가는 오실 메시야 예수를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우주적 통치자, 평화의 통치자, 선택받은 자의 메시야, 그리고 전쟁과 우상을 종식시킬 공의로운 심판의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분의 탄생(강세)은 새 시대를 여는 축복의 관문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시대를 살아가던 하나님의 사람들인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밝아오는 미래 즉 새 시대의 비전을 받고, 그 세계를 믿음으로 소망하면서, 그 미래의 새 시대를 예언하고 살았습니다.
주전 8세기경, 미가 선지자도 예외없이 이 예언 사명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 작은 고을에서 탄생하신다고 예언하였습니다. 바도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과 함께 바야흐로 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성탄과 함께 도래할 새 시대는 어떤 성격의 시대입니까?
바로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강세)과 함께 전 인류의 역사는 새 시대, 새 역사를 시작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B.C.(주전)가 끝나고 A.D.(주후)의 역사가 기록되는 때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세계 역사의 연호가 시작되어 지금 1999년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새 나라, 새 복음이 반포되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마가복음 1장 14-15절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시대였습니다. 예수의 성탄은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제국을 건설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유대나라나 헬라제국이나 로마제국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왕으로 고백하고 섬기는 하나님 백성(그리스도인)의 모임인 교회운동이었습니다.
이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기 위하여 세계와 역사는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다 전파된 후에는, 이 세상 역사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우주적 종말이 올 것이라고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였습니다.

※ 바로 여기에 우리가 맞는 성탄의 참되고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탄은 새 역사의 신기원이 됩니다. 인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에서 그 출발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탄은 새 나라, 새 복음 곧 천국 복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예수는 이 세상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실로 인류가 받은 무한에의 선물, 영광의 선물, 축복의 선물이 아닌가? 바로 예수 성탄이 지닌 표적이 아닌가? 그것은 또한 새 시대의 표적이 아닌가?

그는 바로 많은 사람 곧 잃어버린 아브라함의 자손을 그에게로 되돌리기(찾음) 위하여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그의 성탄은 실로 별들의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포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성탄은 위대한 새 시대의 출발이 된 것입니다. 성탄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요셉의 성탄/
마태복음1:18-25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이는 네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이니라(전 9:9)"

요셉 청년은 처녀 마리아와 정혼한 후 일년 후 이 소박하나 왕궁도 부럽지 않을 꿈을 꿉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임신으로 모든 꿈이 깨어집니다. 성령의 계시로 아내를 데려와 아기 예수 탄생때까지 불침 하고 대부가 됩니다. 이 사건 통해 우리가 받을 은혜는?

1. 하나님은 우리들의
모든 일을 주관합니다.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더 니 …"
요셉의 파혼사건이 실상은 하나님이 역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실을 성령의 계시 없이는 인간은 모릅니다. 베르나드 성자는 이 세상에서 나외에는 아무도 해할자가 없다 했습니다. 나로 실패하게 한 것은 원수가 아닙니다. 나 자신의 무지와 나태와 게으름과 교만과 우월감입니다. 절망, 좌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장된 축복, 고난의 보자기에 쌓인 축복이란 엄청난 영적 비밀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합성어 갖고 살아야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선하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선 으로 인도하십니다. 고난이 왔다면 변장하고 온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2. 하나님은 모든
일에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으로 이거할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11 절)"
침묵의 칼 침묵의 심판이 있습니다. 말 안한 것은 부모가 자식 심판 할 때 갈등할 때 친구가 말안함 으로 무시함으로 칼쓸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침묵으로 아브람 심판 합니다.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륙세 이었더라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 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6:16-17:1)"
아브람 죄지을 때 15년간 하나님은 침묵으로 심판 합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암8:1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4:6-7)"
지식이 없어 이 백성이 망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들릴 때 희망입니다. 하나님 말씀 안 들릴 때 절망이요 심판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일에 은혜 주십니다.
왜 시골 처녀 총각 선택했습니까? 그들은 믿었고 들었습니다. 믿는 것 보면, 순종한 것 보면 선택함이 분명합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13:48)"
하나님은 은혜 주실 때 도구 쓰실 때 있으나 마리아의 선택은 도구없이 성령으로 하나님이 직접하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교통 사고 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건져 주신 하나님 보고 참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오직 은혜임을 고백 합니다.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니라(고전11:5)" 기도 응답될 때 하나님이 참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위기에서 쓰시고 건져 줄 때 하나님이 나를 아직도 이땅에서 쓰시고 계시는 구나하는 사랑과 은혜의 확신이 옵니 다. 성탄은 마리아와 요셉의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누구 용서 못해준다고 좌절 마시요 용서할 마음만 먹으면 내가 1%만 해 도 99%는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 불가능한 일 1%만 하십시오 하나님 이 다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구원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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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1-7절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을 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거기 있을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서, 예수님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 아구스도]는 로마제국은 물론 로마에 속한 모든 식민지까지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인구조사의 목적은 정확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단 자신의 호적지로 가서 혼인으로 인한 새로운 가족의 출생이라든가 또는 다른 가족의 사망...... 그 동안의 변동상황을 신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에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갈릴리 지방 나사렛이란 동네에 살고 있었는데, 본래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유대 땅 베들레헴이 있는 다윗의 동네로 마리아를 데리고 호적을 신고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정혼한 사이였기 때문에 만삭이 된 - 성령으로 잉태한지 10개월이 다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로 인해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낳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때에 호적령이 내려지지 않았다면 마리아는 자신이 살던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다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이 맞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이 때를 맞추어 하나님께서 로마 황제의 마음을 움직임으로 전국에 호적령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요셉으로 하여금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예수님을 낳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얼마나 정확하게 성취되는가를 다시금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기 약 700년 전에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미가 5:2~3절을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알기 쉽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시는데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일점 일획이라도 가감하지 말고 그대로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하기 때문에 함부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신 4:2, 마 5:18).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언하신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이 땅에 다시 오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유대 나라는 망하여서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불행하게도 말라기 선지자 이후로는 어느 선지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로부터 이제까지 그 많은 선지자가 메시아가 반드시 오실 것이라고 거듭해서 예언하였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희미해질 대로 희미해져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이때를 가리켜 학자들은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적으로 깜깜한 이때에 선지자의 예언대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제사장이 있었고, 서기관들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메시아의 탄생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다 영적 소경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나타났을 때, 그 별을 보고 별을 따라 베들레헴까지 먼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던 동방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고 했습니다(마 2:1~11). 그리고 그 밤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천군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베들레헴까지 가서 아기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눅 2:15~20).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탄생하였지만, 막상 찾아와 경배한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동방의 박사들과 한 밤중에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몇 명의 목자들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왕과 그 많은 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탄생했다며 동방에서부터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하는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짜와 시간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전세계가 크게 소동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회 안에 남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하면 예수님 오실 때 공중에 들려 올라가지 못한 신학박사들과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등등 많은 사람들이 크게 소동하며,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통곡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의 상황이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는 홍수심판을 대비하여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식구들이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세상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홍수가 나서 저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두 사람이 밭을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매를 가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두 사람이 같이 잠을 자다가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했습니다(마 24:42~43).
이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는지 알지 못하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평소에 준비해 놓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재림하실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를 해 놓고 계십니까? 주님께서 언제 오시든지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7절을 보면 [마리아가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했습니다. 구유는 낙타나 나귀나 말의 먹이통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마구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그 당시 사람들의 고약한 인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산통이 있어 해산을 하려고 하는데 잠시라도 몸을 풀 수 있도록 방을 내어주는 사람이 그곳에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산모는 급한 나머지 마구간을 빌려 아기를 낳고 구유에 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광경을 볼 때 참으로 그 당시 이스라엘의 인심이 얼마나 야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여관이 없었던 그 시절에 여행중인 한 나그네가 잠자리를 구했으나 아무도 그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여 유숙케 하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삿 19:15).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 각 지파들의 총공격을 받아 전멸당하는 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겨우 600명의 남자들만 남아 종족을 보존해야 하는 불행을 겪었습니다(삿 20:47~48).
마태복음 25:31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 오른 편에는 양을, 왼편에는 염소를 두고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양을 향하여 창세로부터 복 받을 자들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양들은, 우리는 결코 주님을 만나 본적이 없는데 언제 우리가 주님께 이런 대접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면서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 목마를 때, 나그네 되었을 때, 벗었을 때,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도무지 너희가 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주님을 만났으면 해드렸을텐데, 우리가 언제 주님을 만난 적이 있느냐고 의아해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대하여 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어떻게 행하며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예수님을 해산하려고 마리아가 이 부산 땅에 나타났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았다면 요셉과 마리아가 왔더라도 역시 사랑을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사랑을 베풀며 살지 않았다면 역시 영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머리 속에만 집어넣고 갑니다. 그 중에 몇몇 사람들은 마음속에 감동을 받아 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출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이 사회에 어떤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약 2:17).

믿음은 3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1. 하나님(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2. 하나님(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말씀)을
사랑하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 2:19절을 보면,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인줄
알고 믿고 떤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귀신들도 하나님을
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자신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을
신뢰한다거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말씀을 잘 알아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귀신의
믿음을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한 땅에 1300만 명이나
되는 기독교인이 있다고는
하나 전혀 힘이 없습니다.
이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사람이
적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의 사람이
정말로 드물기 때문입니다.
행함이 없는 사람은
불신자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죽은 믿음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생명은
사랑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신자의 생명도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면
생명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요한일서 3:10절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않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는 것은
그 사람이 의를 따라 사는지,
그 형제를 사랑하는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을
복음화 하는 방법은
기독교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입니다.
즉 사랑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랑만큼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웃을 전도하기
원하십니까?
평소에 사랑을 많이
베푸시기 바랍니다.
저는 너무 바쁘다 보니
친척들을 일일이
찾아보지도 못하고
전화할 시간을 내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들에게 매달
용돈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그돈을 어디에
쓰시든지 상관없이 보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얼마 후에
모두 다 교회에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 모두
작은사랑이라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이번
성탄 감사헌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복음화
하기 위해서 우리가 행하며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입니다.
이 작은 사랑들이 모아져서
많은사람들이 우리교회는
좋은 교회라고 칭찬하는
때가 오게 되면,
자연히 우리사회가
복음화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 모두 작은 사랑이라도
나누어주는 산
믿음의 사람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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