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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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1-04-04 05:58:23, Hit : 675
File #1    부활의_주님을_만난_자의_삶.hwp (48.0 KB)   Download : 8
Subject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의 삶
/부활의 주님을 만난
자의 삶/(요20:19-31)/
인류의 소망이요 생명의
주인이신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영광의 아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은총이
2021년 첫 부활절
예배에 참석한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로 만물은
환희의 새 계절을 맞았고,
인류는 절망의 골짜기에서
소망을 얻었습니다.
온 누리에 광명이 넘치고
사랑의 힘찬 기운이
가득 합니다.
영원한 죽음 아래
있던무리가 새 생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멸망의 골짜기를 헤매던
영혼이 승리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죄악의
종 되었던무리가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어떤 시인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알지 못하노라.
어디로 그 섬들이
넓은종려나무 잎들을
공중에 날려 보내는지,
나는 아노라.
오직 그의 사랑과
보호의 범위를 지나서는
내가 표류치
못하리라는 것을.
--Whitter/
이 부활주일이야말로 인간은 다만 피와 살뿐이라는 유물주의적 견해에 대하여 인간은 불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가장 웅변적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생에 있어서 만남이라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모든 운명은 만남에서 결정된다고 볼 수 있는데, 부모를 잘 만나서 행복한 생이 되기도 하고 부모를 잘못 만나서 불행한 삶이 되기도 하며 부부간에 남녀가 만나는 것은 그들 일생의 행. 불행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기타 친구의 만남, 이웃의 만남, 지나가는 행인과의 만남까지도 자기 자신의 삶과 직결된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 어떤 만남의 계기를 통하여 새롭게 이룩되고 있을진대 오늘 우리들은 모든 사람의 생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입니다. 죽음의 어두운 장막이 걷히고 눈부신 생명의 새 아침을 맞이하였습니다. 부활 생명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레오나르도 보프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삼키우고 말았다. 삶은 죽음을 경험한다. 그러나 죽음에 삼키우지는 않는다. 그것은 죽음을 통하여 완성되고, 승리한다. 인간은 죽기 위하여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부활하기 위하여 죽는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삼키려 했던 죽음의 지배가 끝나고 우리에게 참 생명의 아침이 동트게 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죽음은 멸망한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알기 위하여 먼저 죽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폴 틸릭이란 신학자는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죽음이란, 단순히 우리의 생명의 실낱을 끊는 가위만은 아닙니다. 죽음은 오히려, 우리의 실존의 의장 속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짜 넣어진 실과도 같은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전 존재를 시시각각으로 조형(造形)하여 가는 세력입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은 그의 생명에 죽음이 현존(現存)하고 있다는 자국을, 즉 죽음에 대한 공포, 죽음에 대한 용기, 그리고 죽음에 대한 체념의 자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 때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의 삶 속에 짜 넣어진 것이어서 우리의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세력 아래서 태어나서 평생 죽음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이 바로 아담이 범죄 함으로 받은 형벌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은 본래 죽게끔 지음을 받았습니다. 죽음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모든 생물은 태어났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죽습니다.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로 태어났다가 자연스럽게 죽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원래는 죽지 않는 것인데 아담이 범죄 하였기 때문에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게 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담의 범죄 후에 찾아온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죄의 값이라 부르고, 또한 죄를 죽음의 쏘는 가시라고 부르는데 이 죄와 관계된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 이 죽음은 자연스러운 죽음과 어떻게 구별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으로부터 돌이켜 멀어지신 것입니다. 죽음은 육체적 생명의 정지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영적인 생명의 종말입니다. 생명의 근원이고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고, 생명을 유지시키는 생명의 주님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심으로써 죽음이 오는 것입니다."(김광식)

아담이 범죄 하기 전에는 죽음의 공포가 인간을 지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셨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한 이후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고 그들을 만나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부터 죽음은 인간을 지배하기 시작하였고, 죽음의 공포와 불안이 인간을 좀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인간을 이 죽음의 세력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을 죽음의 세계로 떨어트린 사탄의 세력을 꺾고 그 죽음의 철창문을 여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내신 것은, 그가 죽음의 세력을 꺾으실 수 있는 분임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제까지 우리를 지배하던 모든 죽음의 세력을 멸망케 하였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자리 잡았던 죽음의 공포가 완전히 빠져나간 것입니다. 우리를 불에도 엎어지게 하고 물에도 뛰어들게 하였던 죽음의 세력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서 완전히 빠져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온전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죄 값을 받으시고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꺾으셨기에 이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순간은 우리를 지배하여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죽음의 세력이 죽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막고 있던 죽음의 장벽이 철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 지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찢어진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죽음의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던 사망의 문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환히 비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구원의 역사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물러갔기 때문에 예수님은 부활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만의 부활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부활입니다. 죽음의 세력이 철거되었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주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가 우리를 다시 찾아오심을 뜻합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다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뜻합니다. 끊어졌던 전기가 다시 이어져 불이 들어오는 것처럼, 끊겼던 수도관이 이어지면서 물이 다시 나오는 것처럼, 단절되었던 생명의 줄이 다시 이어지므로 우리 속에 생명이 넘쳐흐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우리 속에 독소처럼 꽉 차 있던 죽음의 오물들이 생명의 공급을 통하여 서서히 빠져나가고 병들었던 우리의 삶은 다시 생기를 찾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부활은 예수님 재림 이후에만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이미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고 있는 현재적인 사건입니다. 죽음은 더 이상 우리의 전인적인 삶을 억압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부활된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물론 죽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지음을 받은 것이기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죽음이야말로 영생에 들어가는 관문이 되기 때문에 죽음은 오히려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이 땅에 살 때나 재림 이후 하나님 앞에 갔을 때나 언제나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생명 가운데 있게 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우리의 삶은 사실상 영생의 삶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만 죽음이라는 관문이 있을 뿐이지만 그것은 보다 완전한 영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일 뿐인 것입니다. 오늘 아무리 악이 성하여도, 또 죽음이 우리를 위협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미 그 죽음은 십자가에서 패배하였기에 그 이빨은 빠졌고, 그 세력은 꺾였습니다. 겨울의 세력이 봄기운에 물러나듯이, 생명의 기운 앞에 죽음의 세력은 기를 쓰지 못하고 물러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의 쏘는 가시인 죄가 소멸되었고, 죽음의 권세를 휘두르던 사탄이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였기에 죽음의 겨울은 더 이상 이 세계를 지배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의 계절만이 이 세계를 생명으로 이끌며, 생명문화를 꽃피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활의 아침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쏟아지는 생명의 빛을 향하여 얼굴을 드십시오. 훈훈하게 불어오는 부활의 기운을 호흡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죽음의 잔재들을 말끔히 씻어 내십시오. 여러분 속에 있는 죽음의 독소인 불안과 걱정과 근심들을 모두 쫓아내십시오. 생명의 주이시며 역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이 이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부활의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다시는 죽음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의 세력에 이끌려 다니며 불의와 거짓에 참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생명의 역사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이 땅에 평화를 이루어 가는 역군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제는 죽음의 위협 앞에 굴복하지 맙시다. 우리는 부활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믿음 이 소망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시며 더욱 열심을 내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가는 평화의 역군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 속에 장사된 후에 주를 향한 그녀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그의 현존을 갈망하다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밤새도록 엎치락 뒤치락 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흘째 되는 날, 새벽 미명 어둡고 두려운 길이었으나 주님의 시체에 향유라고 바르기 위하여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이르러 보니 무덤 문은 굴러내려 갔으며 주님의 시체는 보이지를 아니하였습니다. 그녀는 무덤 문 밖에 서서 하염없이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이미 부활하셔서 그의 뒤에 오셔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슬픔의 벽이 너무도 두꺼워서 예수의 서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신 줄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 인줄로만 알았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평소에 부르시던 인자하신 음성으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을 때, 마리아는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돌이켜 "랍오니여! 하며 맨 처음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녀는 감출 수가 없는 환희를 안고 주님의 분부를 따라 제자들에게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갈릴리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헤매이고 있는 미로 안개가 짙게 깔려 있는 것처럼 사방으로 덮여 있었으나 구하는 자에게 얻게 하시고,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배후에 있었음이 사실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던 슬픔과 절망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대신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 이 그녀의 마음속을 채웠습니다. 눈이 뜨인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입니다. 마리아의 영적 세계는 예수님께서 그 이름을 불러 주시기 전까지는 닫혀진 채로 있었습니다. 이제 그녀에게는 옛 삶의 구조는 사라지고 부활의 새날이 열리 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우선 제자들에게 자기가 다신 사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과 멀지 않아 곧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게 될 것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정으로 선포한 인간의 첫 음성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되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가까이 하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시34:18). 드디어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요20:15) 내가 부활하였는데 왜 알지 못하고 울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무덤 속에서 다시 살아난 내가 지금 네 앞에 서 있는데 누구를 찾고 있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우리의 슬픔을 진정시키며, 흐르는 눈물을 저지시킬 뿐 아니라, 눈물의 근원까지도 말릴 수 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에 나와 앉아 있어도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바로 알지 못하는 한 우리의 눈물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슬픔이 끝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눈물의 근원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를 알아야 절망의 함정에서 구출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인생의 비극이 끝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야 참 기쁨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만날 수 있을 때에만이 우리들의 생은 새 역사가 창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도 슬퍼하며 실망하고 있는 그녀에게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 부르심 속에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알아보지 못하느냐? 너와 나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낯설게 되었느냐고 하심입니다. 이때에 마리아는 아가서에 기록된 대로 가로막힌 산을 넘어오는 사랑하는 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가 2:8). 그리하여 눈을 크게 뜨고 돌이켜 예수 앞에 허리를 굽히며 입을 열어 랍오니여 하고 대답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이와 같은 순간적인 반응은 예수께서 그의 영혼을 향하여 사랑의 종을 쳤을 때 슬픔의 꿈에서 깨어나게 된 것과도 같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영혼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랑의 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별들의 수를 말씀하시고 그 모든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고 계십니다(시 147:4).
그리고 천상에는 수 없는 천군 천사를 두시고 그들을 그 이름을 따라 부르시며 부리고 계시며 천하 만상을 창조하셨고 또한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는 크고 강한 분이십니다(사 40:26).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양된 우리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시며 인도하시고 그의 눈길을 각 사람들에게 돌리시며 그들을 그의 마음속에 하나 하나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문이 되심으로 우리가 그에게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요 10:9).

예수님께서는 수시로 그의 모습을 변장하는 배우가 아니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실 뿐 아니라(히 13:8)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십니다 (약 1:17). 다만 주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잘못 되고 주님을 향하여 듣는 우리들의 영적 청각이 고장났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랍오니여"하고 주님을 바라보며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동작을 취하기전에 이미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그의 삶 전체가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리들은 우리를 향하여 부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붙잡혀 살기 위하여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집착을 떠나야 하겠습니다. 그 어느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들 사이에 끼어 들지 못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다 몰아내야 하겠습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 위치한 웨스턴 스프링즈 주민들은 17년에 한 번씩 여름만 되면 매미로 인하여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매미는 17년 동안 땅 속에 애벌레로 있다가 5월만 되면 밖으로 모습을 나타나는데 17년에 한 번씩 나타나는 매미는 17년이 지난 5월 25~27일만 되면 나타난다고 합니다. 애벌레는 풀밭 밑에서 17년 동안 기다리다가 밤에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데, 밖으로 나와 나 무를 찾아 올라가서 성충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성충이 되기 전에 태양이 떠오르면 미처 성장하지 못한 애벌레들은 죽고 맙니다. 애벌레들은 땅 속에서 나오자마자 온갖 힘을 다 기울여서 나무로 기어갑니다. 몇 십만 마리의 애벌레들이 나무를 향해 기어가지만 살아남는 애벌레는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간신히 나무로 올라가지만 알루미늄 호일로 인하여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 애벌레들도 있습니다. 애벌레는 나무에 붙어서 껍질을 깨고 날개와 하얀 몸을 내보내는데 그 시간이 3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날개가 나오면 시간이 흐르면서 체액이 들어가고 날개로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매미로서 활동하려면 체온을 높여야 합니다. 따라서 날이 밝고 태양이 뜨면 매미는 태양 가까이 가게 되지만 성충이 되지 못한 애벌레들은 태양을 맞이하면서 죽어갑니다.
10평방미터에 약 4만 마리의 애벌레들이 성장하는 스프링즈에서는 하룻밤 사이에 몇 천만 마리가 매미가 되려고 하지만 매미로 성장하는 애벌레는 5%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5%는 죽어서 동네 고양이나, 쥐, 두더지, 새들의 먹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하게 성장하지 못하면 사탄의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음을 가진 성도들의 신앙을 값진 신앙, 용기 있는 신앙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부활을 믿는 믿음입니다. 초대 교회 수많은 순교자들이 맹수의 밥이 되면서도 죽음을 찬송으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알아들었을 때 돌이킬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빈 무덤을 향하여 시체의 향방을 찾으면서 울어야 할 필요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돌이키는 순간 기쁨과 평안은 강물처럼 흘러 넘쳤습니다. 만일 지금까지의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생이었다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이 새 봄에 우리들의 삶은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으로써 우리의 생이 감격 속에 갈릴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형제들에게 힘 있게 기쁜 소식을 안고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태양이 솟아오르면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싸늘하게 얼었던 대지 위에 훈훈한 봄바람이 불면 얼었던 땅이 녹고 새 생명의 싹은 피어오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진리가 불의 앞에 짓밟힐 수 없고, 정의가 불의 앞에 말살될 수 없으며, 사랑이 미움 앞에 무릎을 끓을 수 없고, 참 생명과 영생을 죽음이 가둘 수 없습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보여준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종교는 인간의 소원으로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기독교만이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만이 죽음을 격파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부활을 통해 죄를 청산하시고 삶의 의미를 확립하시고 영생에 대한 소망으로 채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제 절망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소망밖에 없습니다. 죄와 무의미가 사라졌습니다. 죽음도 사라졌습니다. 천국과 영생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쁨과 소망, 또 소망 가운데서 매일매일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가 창조한 세상 속에 어둠이 들어와 바꿔놓은 세상을 다시 바꿔놓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여기에 오신 것입니다. 죄 있는 곳에 가서는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미움이 있는 곳에는 서로 손잡고 아끼는 사랑의 관계로 바꿔놓고 대립과 분쟁이 있는 곳에 들어가서는 평화와 화해를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설교만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으로 직접 실천을 하셨습니다. 자기의 몸을 말할 수 없는 많은 고난과 악의 영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지막 가서 자기 자신을 피 흘리고 죽는 십자가의 죽음까지 가지셨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이 예수 안에 와 있었는데 예수 자신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파괴된 세 상속에 나타났을 때에 여기에서 죄는 사죄로 변하게 되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대립은 평화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비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 부활은 하나님 안에 있는 참 해방이 죽음을 정복해버렸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부활절을 지키기 위해서 나온 우리들이 알아야 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기독교는 거듭남이 생명입니다. 거듭나지 않고 행하는 어떤 종교적 행위도 이방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거듭남의 분명한 증거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새 천년 처음으로 맞는 부활절이 갖는 의미가 자못 큽니다. 세상은 급속도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급변하고 있습니다.생명이 없는 세상과 그에 속한 기관들도 새로운 시대에 거듭나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는데 가장 변하지 않고 제자리 걸음하는 곳이 교회와 정치라고 하며, 구시대적 발상으로 시대의 변화에 가장 둔감하여 새로운 세계의 장애물이라고 세상은 교회를 혹평하기도 합니다. 새 천년의 처음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진정한 부활이 될 수 있도록 새롭게 거듭나는 자아와 교회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패자가 아니라
승자가 되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디아스포라 유태 경전에는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승자는 행동으로 말을 증명하고
패자는 말로 행위를 변명한다.
승자는 책임지는 태도로
살며 패자는 약속을 남발한다.
승자는 실수했을 때.. “
내가 잘못했다” 고 말하는데
패자는 “너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고 원망한다.
승자는 입에 솔직이 가득하고
패자는 핑계가 가득하다.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고
패자는 노인에게도 고개를 못 숙인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나
앞을 보고 패자는 일어나 뒤를 본다.
승자는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고 열심히 쉰다.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패자는 시간에 끌려 산다.
승자는 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나
패자는 이기는 것도 은근히 염려한다.
승자는 과정을 위해 살고
패자는 결과를 위해 산다.
승자는 넘어지면
일어서는 쾌감을 알며
패자는 넘어지면 재수를 한탄한다.
승자는 눈을 밟아 길을 만들고
패자는 눈 녹기를 기다린다.
승자는 무대 위로 올라가고
패자는 관객석으로 내려간다.
승자는 돈을 다스리고
패자는 돈에 지배된다.
승자는 차라리 용감한 죄인이 되고
패자는 차라리 비겁한 선인이 된다.
승자는 새벽을 깨우고
패자는 새벽을 기다린다.
“부활의 아침을 위하여...”
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떠나가신
언덕너머에도
노랗고 붉은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고 있겠지요.
그 황량했던 언덕에
다시 꽃들이 뒤덮일 때면
주님의 고귀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부활을 묵상합니다.
삶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은 이들을 위하여,
세상이 위로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형체도 알 수 없는
초라하고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고난의 언덕을 넘으면
영광스런 부활의
아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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