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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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1-04-02 06:57:39, Hit : 239
File #1    성금요일_설교자료_모음.hwp (111.5 KB)   Download : 10
Subject   성금요일 설교자료 모음
/성금요일 설교자료 모음/
1.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십시오.
출애굽기 15:22-27
2.사망에서 생명의 길로
요한일서 3:13-16
3. 죽음에서 사는 길  
요한복음 3:1-15
4.  하나님의 일  
요한복음 6:28-33
5.  고난 중에
드리는 감사  
시편 119:67-71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십시오
(출애굽기 15:22-27)
그냥 그만 천국 가고 싶네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노래를 부르고 또 춤을 추고
싶어 질 때가 있습니다.
소위 우리 인생이 잘 나갈 때,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때,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때,
성공이 우리를
부르고 손짓 할 때,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들의
노래가 지속되지 못하는
내 인생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갑자기 한순간 우리의 노래를
그치게 만들고 춤을 추든
우리의 동작이 손을 들어
가슴을 치게 만드는
가슴 아픈 고통이
한순간 기대하지 않게
우리의 삶의 장에 엄습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배경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경험이였다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되어있는 출애굽기15장1절을 보시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15장1절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노래로 시작하죠? 네, 노래로 시작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로 이 출애굽기15장이 시작합니다.
한번 20절을 보세요. 출애굽기15장20절입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아 지금 노래하고 춤추고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춤이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출애굽기 15장 24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뭐 한다고 그랬어요? 원망하며, 한순간 노래를 그치고 그 속에서 탄식과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지도자를 원망합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고통이 찾아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22절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구절에 보시면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며 그들이 나와서 수르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얼마를 행하였다고요? ??사흘 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더라?? 자, 홍해바다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간 후에 꼭 사흘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지 사흘만에 상황이 지금 역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을 얻지 못했어요. 광야에서 사막에서 물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물을 얻지 못하고 목이 타는 갈증이 그들을 지금 괴롭히고 있습니다.

자, 그들이 마라라는 장소에 도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지나서 하루에  20킬로를 행군했다면 사흘을 지났으니까 약 60킬로를 걸었겠죠? 지금 성지순례를 하시는 분들은 KAL기를 타고 이집트의 카이로에 내려서 이제 스에즈 운하를 버스로 건너갑니다. 스에즈 운하를 지나가면 30분쯤 정도 버스 타고 가면 마라 라는 장소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지금 물을 얻지 못한 것이에요. 지금도 거기 모세의 우물 ??아이윤 무세?? 라고 불리는 모세의 우물이라는 장소가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도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가면. 자,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목 타는 갈증 때문에 물을 마셨지만 쓴 물 이여서 그들은 그 물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서 원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 조금 전까지 노래하고 춤추면서 기뻐했든 이 백성들이 불과 사흘만에 지금 탄식하고 고통하고 신음하면서 원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생의 그림이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의 노래를 빼앗아 가는 이런 신음과 고통을 경험할 때 우리의 춤동작을 멈추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드는 이런 고통이 우리의 삶에 다가올 때,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을 당했을 때 고통 그 자체보다도 우리를 더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하는 줄을 몰라요.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은 훨씬 더 깊이 우리를 괴롭힐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아무리 고통이 심해도 내가 고통의 의미를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이 고통 속에서 견딜 것입니다. 버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통을 극복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 이것처럼 우리가 고통이 우리의 삶의 장에 찾아올 때 중요한 과제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개인도 공동체도 더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내야할지 모릅니다.

아니 하나님은 이 고통의 레슨을 깨우치기 위해서 아직도 레슨을 깨닫지 못한 우리들에게 한동안 더 이 고통의 행군을 계속하도록 허용하실 지 모릅니다. 아니, 우리 앞에 또 다른 마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며칠 전에 3.1절을 기념했습니다. 우리가 일제의 치하에서 당한 수모, 이것은 우리 민족사의 가장 수치스러운 고통의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3.1절은 이 고통을 극복하고자 하는 아름다운 우리민족의 일어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저와 여러분은, 우리민족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고통 속에서 고통의 레슨을 충분히 배우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고통의 레슨을 제대로 배웠다면 사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고통은 별로 두려워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물어야 할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고통의 의미,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고통이 다가올까요? 이 고통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본문은 가르치기를 이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가르칩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입니다. 한번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시험이다?? 아니, 하나님의 시험이라니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이런 반문을 하실 분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내가 보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시험을 말하십니까? 이것은 성경 조금 알아야 이런 질문 할 수가 있겠지요?

야고보서 1장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사람들을 시험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서 시험이라는 단어는 영어성경으로 그 단어를 읽어보면 Tempt라는 단어가 쓰여져요. 명사로 Temptation , Tempt. 유혹한다 이런 낱말로 번역될 수도 있지마는 본래 이것은 파괴적 의미의 시험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파괴적 의도를 가지고는 우리를 결코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의도로 우리를 시험할 수가 있어요. 교육적인 의도로는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든지 시험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시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Temptation, 파괴적 의도의 시험은 아니지만 이것은 교육적인 의도의 시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내어주는 과제와 꼭 같습니다. 여러분, 공부하든 시절에, 아직 여러분 가운데는 공부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과거에 공부하든 시절에 시험날짜가 다가오면 어쩐지 나는 가슴이 설레고 시험이 기다려진다. 내 인생에서 시험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다. 이렇게 느끼신 분 혹시 계십니까? 한번 손들어보세요. 네, 그런 분 없으시겠지요. 그렇지만 시험이란 필요 없다 시험 없애자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네 아무도 시험을 엔조이 할 수는 없지마는 시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학생은 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객관적인 내 실력을 평가하고 점검을 받습니다. 거기서 나는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할 때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성숙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의 비슷한 의도로 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시험을 허용하신다고 생각해요. 본문의 시험은 그런 의미의 시험입니다.

자, 본문의25절을 한번 다시 읽어보시면 25절 우리 다시 한번 읽습니다. 다같이 시작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이 이 사건을 통해서 법도와 율례를 정하십니다. 무슨 의도여요? 너희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 붙들고 말씀 그대로 살아가는 내 백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의도로 시험을 하셨다 는 말입니다. 여기 시험하실새, 그 단어가 바로 오늘 이 본문의 이 단어가 영어성경에 보시면 그 단어가 테스트라는 단어로 되어있어요. 혹은 어떤 번역에 보면은 Proof라는 단어로 되어있습니다. Proof, 이렇게 증명한다 점검한다 테스트한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교육적 의미의 그런 시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오늘 본문의 사건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시험하셨을까요? 자, 오늘 출애굽기 15장1절이 어떻게 시작했어요? 무엇으로 시작했습니까? 노래로, 춤으로, 왜 노래로 시작했습니까? 자 15장전에 몇 장이 있습니까? 네? 대답이 어렵습니까 14장이죠. 14장에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네, 홍해바다가 갈라졌어요. 자, 홍해바다 앞에서 죽을 줄 알았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홍해바다를 갈라주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갔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것입니다. 어찌 춤추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죽음 가운데서 살아났고 원수들이 물 속에 장사 지내고 하나님의 기적을 보았든 이 백성들이 지금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흘 후에 하나님은 상황을 바꾸십니다. 자, 목이 타는 갈증 속에서 가까스로 물을 마셨지만 토해낼 수밖에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왜 이런 상황을 허용하셨을까요? 저는 거기에 하나님의 이런 의도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너 사흘 전에 너희들 내 기적을 보고 찬양했지? 그리고 감사했지? 그런데 내가 시험하고 싶다 그것이 뭐냐 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도 너 찬양 할 수 있니? 너는 내가 너희들에게 베푼 축복 때문에 찬양했고 감사했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지? 그러나 이 축복이 계속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적이 계속되지 않는 이 어두움과 메마름의 상황 속에서도 너는 아직도 여전히 나를 찬양하고 나에게 감사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니?

유명한 중세기 신학자 가운데 타마스 아카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 이렇게 공부하셨죠? 토마스 아퀴나스, 그런 신학자가 자주하든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 가운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내가 축복을 경험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을 가진 것이 나에게 유리하고 나에게 훨씬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아니 대부분 우리의 신앙생활의 출발은 어쩌면 이런 동기로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가 강조하고 싶어했든 것은 이것입니다. 그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할 지 모르지만 내가 그 하나님을 경험했더니 그 하나님과 관계했더니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들어갔더니 그 하나님이 너무 좋은 거여요 그래서 나중에는 하나님 지금은 제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해요. 조건 없이 사랑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좋은 거여요. 그래서 찬양하는 겁니다.

자, 우리가 부부로 남편과 아내가,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났을 때 조건이 없을 수는 없죠? 조건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저 남자를 만나면 저 여자를 만나면 내 인생이 훨씬 더 행복해지겠다 라는 어떤 판단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을 내 배우자로 선택하고 우리는 결혼에 골인해서 부부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살아보니까 거기서 조건이 없는 인격적인 사랑이 싹터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어느 한 순간에 도달하면 이럴 수가 있어요. 여보, 난 당신이 그냥 좋아, 너무너무 좋아, 밥 안 해주어도 난 좋은 거야 너무 너무 사랑해! 저는 날마다 그렇거든요?

이것은 조건을 뛰어넘은 사랑이에요. 조건을 뛰어넘은 것이에요. 그 한 인격체에 대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런 사랑을 지금 시험하고 있는 것이에요. 너 내 축복 때문에 사흘 전에 춤추고 노래했는데 내 기적 때문에 그렇게 찬양했는데 그 기적이 계속되지 않아도 오늘 이 메마른 광야 가운데서도 나는 너희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너 오늘도 찬양할 수 있니? 이 사막에서도 찬양할 수 있니? 이 광야에서도 찬양할 수 있니? 그리고 메마를 광야에서도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나를 향한 사랑을 고백할 수 있니? 이것이 테스트여요. 이것이 테스트. 그러므로 고통이 올 때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테스트라는 것을,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알아차린 성도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 나 합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여러분과 저가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은 무엇일까요?

둘째로 고통의 의미,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아니 아무리 고통이 소중한 어떤 레슨을 준다고 그래서 고통 그 자체가 목사님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고통 그 자체가 어떻게 축복일 수가 있단 말입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래요 두 가지 이유,

첫째 이유는 뭐냐하면 대부분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를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성도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고통은 결코 고통 그 자체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을 기억하세요. 우리가 제대로 이 고통 앞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반응한다면 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아요.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자, 본문에서 어떤 사건을 볼 수가 있죠? 자 지금 마라의 쓴 물을 경험하고 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부르짖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기적이 일어났습니까? 그 쓴 물이 변하여 어떻게 되었어요? 단물이 되었어요. 거기 나무 가지 하나를 던졌더니 그 쓴 물이 변하여 단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자, 그 단물이 얼마나 대단한 맛이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단물을 계속 맛보았더라면 그 단물이 얼마큼 실감나는 단물 이였을까요? 그러나 조금 전에 쓴 물을 맛보았기 때문에 마실 수 없고 토해 냈기 때문에 그래서 맛본 그 단물은 얼마나 더 감격적인 단물이였을까요?

여러분 인생의 그 쓰디씀의 요소가 없다면 우리는 인생의 그 진정한 달콤함을 우리는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슬픔이 없이 기쁨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까요? 고통이 없이 환희의 의미를 알 수가 있을까요? 이별의 그 쓰라림이 없이 우리는 만남과 해후의 그 감격을 알 수가 있을까요? 상실의 고통 잃어버리는 고통이 없이 소유하고 있는 행복을 우리가 알 수가 있을까요?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얘기인데요 불란서의 그 루불 박물관에 그 유명한 모나리자 상이 일시적으로 도난 맞은 때가 있었다고 그랬지요? 그때 어떤 사건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가장 많은 숫자의 관광객이 루불 박물관을 찾았다는 거여요. 왜 그랬을까요? 그 도난 맞은 그 자리를 구경하려고 왔어요. 없어진 그 자리 구경하려고, 우리는 없어지고 나서 우리는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고통 때문에 이 고난 때문에 우리에게 축복은 비로소 축복으로 다가올 수가 있는 것, 그래서 고통은 또 다른 축복을, 그리고 또 다른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인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고통 그 자체는 아픔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 앞에서 감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고통, 나는 알아 이 고통은 축복이야!

이 고통이 축복일 수가 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제가 고통은 고통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고 강조했죠? 고통 저 건너편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자리까지는 결코 멀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고통을 넘어서면 그리고 고통을 견디고 나가면 축복은 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교훈입니다.

자,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끝나는 줄 아십니까? 마지막 구절 우리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출애굽기 15장 27절입니다. 다 같이 읽습니다. 시작,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 마라라는 장소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11km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여요. 그러니까 뭐 금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여요. 11km정도, 네, 아주 가까운 거리죠. 네, 마라에서 조금 지나가서 이 엘림에 도달했더니 엘림에 뭐가 있어요? 우선 뭐가 있다고요?

물샘이 열두 개, 여러분 사막에서 단 하나의 샘물도 소중한데 그 샘물이 무려 열두 개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가 몇 개가 있어요? 7그루가, 이것은 얼마나 황홀한 오아시스일까요? 얼마나 풍성한 오아시스여요? 자, 이 마라 바로 저 건너편에 멀지 않은 곳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그 엘림, 이 풍성한 오아시스, 그런데 지금 마라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고 있습니까? 왜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해요 엘림이 보이지 않아서 그래요. 엘림이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존재합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아요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앞길이 보이지 않아요 끝없는 고통이 그대로 인생을 자폭해 버릴 것 같은 이 끝없는 고통의 터널이 오늘 나를 붙잡고 나를 괴롭힙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엘림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존재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의 비젼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엘림을 준비하셨어요. 할렐루야! 엘림을 준비하셨어요.

옆에 있는 사람 한번 얼굴 쳐다보시면서 특별히 인상 쓰는, 옆에 사람 쳐다보시면서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한번 해 보세요.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그래도 계속 인상 쓰는 사람은 인생의 희망이 없습니다. 네,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엘림이 멀지 않았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고통은 축복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만약 고통 앞에 제대로 반응하면 심지어 오늘 민족이 당하고있는 우리 민족적인 고통의 경험도 이것이 우리민족이 경험할 수 있는 위대한 엘림의 친구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만하면 잘 통과할 수 있다는, 저는 우리 민족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또 우리역사가 이 고단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의 엘림의 비전과 계획을 붙잡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통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고통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고통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따라서 하세요 ??고통은 하나님의 계시다?? 그게 무슨 뜻일까요 고통이 하나님의 계시라니, 그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 고통이라는 장에서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해 주신다는 말이에요. 스스로를 보여주신다는 거여요. 그러니까 우리편에서는 내가 고통의 장에서 그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요. 고통의 장보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삶의 장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26절의 말씀이 그 대답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지 않습니까? 26절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하나님이 어떤 약속을 하고 있어요?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들에게 내리지 않겠다. 그 앞에 전제가 있어요. 만약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고 살면, 너희들이 질병을 넘어선다 극복한다 치유될 것이다. 또 오늘의 고통도 치유될 수 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마지막에 자신을 어떤 말씀으로 계시하셨습니까? 내가 누구라고 그랬습니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따라서 하세요.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고 부릅니까? 여호와 라파 이렇게 말합니다. 다같이 ??여호와 라파?? 다른 말로 야훼 라파, 그 말의 뜻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Healing God ,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질병의 자리입니까? 질병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질병 때문에 그 아픔 때문에 부르짖어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고치셨다 나는 새롭게 경험하는 거여요. 어떤 하나님을? 아! 하나님은 분명해, 사람들이 들려준, 목사가 말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정말 내가 경험해 보니까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야! 저는 여러분이 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치유의 하나님은 우리의 병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환경도 치료하십니다.

자, 마라의 쓴 물, 그 쓴 물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더니 하나님이 간섭하셨더니 그 마라의 쓴 물이 바뀌어서 무슨 물이 되었다고요? 단물이 되었어요. 환경을 치유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우리의 병든 가정, 오늘 고통 당하고있는 가정, 오늘 갈등 속에 딜레마 속에 빠져있는 우리의 가정도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료받을 수 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을 치료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사회를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고단한 역사, 우리의 민족도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남북의 갈라져 있는 이 고통도 치료할 수 있는 하나님,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러니까 고통은 그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야훼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경험의 계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욥기를 많이 읽죠? 욥기의 가장 중요한 교훈이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욥기를 대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
자 욥이 지독한 고난을, 고통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버티고 견디었더니, 마지막 장에 보니까 욥기 제일 마지막 장에 보니까 마침내 욥이 축복을 갑절로 더불로 받았다 재산도 더블로 늘어나고 자식들도 갑절로 늘어나고 마누라도 더블이 되었다 그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과연 축복일까요? 나와 함께 삶을 그렇게 정겹게 나누었든 내 마누라가 죽고 그리고 다른 마누라 얻어서 더블로 축복 받았다 그게 축복일까요? 일찍 가신 마누라는 얼마나 가슴을 칠 일입니까?

저는 그것이 축복이 아니고 저는 욥기의 가장 중요한 결론이 있다면, 교훈이 있다면 욥기 마지막 장에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욥기 42장5절에 욥이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이 고통 후에 회개하고 엎드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무어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에 대해서 귀로만 들었사옵더니 이제는 눈으로 뵈옵나이다. 무슨 얘기입니까? 저가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냥 귓결에 들었어요. 목사님을 통해서 설교자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더라, 제가 하나님을 귀로 들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지금 저는 하나님에 대해서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눈으로 뵙고 있어요 하나님을 만난 겁니다. 고통 속에서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고통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그 하나님을 실존적으로 그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 거여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계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 속에서 만난 그 하나님이 사랑이시더라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만 확인하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고 아무리 나를 짓누르고 아무리 고통이 와도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 우리는 다시 일어 설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기 그 모세가 이 쓴 물을 치료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나무 가지를 하나 탁 던졌어요. 그랬더니 물이 변했습니다. 좀 지나친 감도 있지만 이 말씀을 묵상하든 알프핑크 라는 성서 주해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 나무 가지에서 십자가를 본다. 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나무를 본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치유하시는 방법중의 하나,
우리 베드로전서 2장24절에 보시면 십자가라고 그러지 않고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인류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 뭔 줄 아세요?
우리가 고통 당할 때 고통의 의미를 물어도 사실은 제가 설교하지만 속 시원하게 그 의미를 다 해결하거나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면 한가지 분명한 대답을 얻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아!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같이 고통 하신다. 고통 속에 있는 나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찾아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오신 하나님, 그 십자가에서 그분도 애매하게 자신의 죄와 상관없이 그 고통 그 아픔을 당하신 그 주님, 그리고 내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씀하시며 내게 다가오시는 그 주님, 그분을 믿었더니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 이 고통 속에 나를 그대로 버려 두지 아니하고 내 삶의 현장에 찾아오기 위해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내게 찾아오신 그 예수그리스도를 경험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난해한 고통의 한복판 속에서도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파요 힘들어요 그렇지만 제가 알아요 주님이 저를 사랑하는 줄을 저가 믿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 일어나요 다시 일어날수 있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따뜻함을 안겨다 주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읽는 그 책 가운데 세계적으로 치킨 스프 스토리 (Chicken soup for the soul)가 있죠? 그 중에 한 이런 아름다운 얘기를 제가 기억합니다.

미국의 중부 시골마을에 마샤 에븐스라는 틴에이저 소녀 하나가 살았습니다. 12살에서 13살이 되면서 틴에이저로 들어서면서 수술을 받게 되었어요. 입 근처에 신경조직이 잘못되어서 수술을 받는데 수술도중에 그 신경하나를 건드려서 이 마샤 라는 어린 소녀의 입이 삐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틴에이저 소녀가 입이 삐뚤어지니까 보통 그것이 자화상의 상처를 받는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친구 만나기 싫어하고, 학교 가기 싫어하고, 가기는 가도 말도 하지 않고, 친구들을 떠나게 되고, 집에 와서도 말하지 않고 엄마하고도 심지어는 대화를 끊었습니다. 우울한 소녀가 되어갔습니다.

그런데 13살, 그 해가 끝나 갈 무렵 자기의 생일날, 뜻밖의 그 생일날 이 소녀 앞에 그 선물소포하나가 배달이 되었는데 꽃이었어요. 치자 꽃 한 송이, 아주 아름다운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치자 꽃이 뭔 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런 꽃이 있다고 그러더라구요 있죠? 전 모르지만 있데요 하여튼 치자 꽃, 굉장히 아름다운, 하여튼 나는 무슨 꽃인지 잘 모르지만 하여튼 치자 꽃 하나가 배달이 되었답니다, 한 송이가. 그런데 누가 보냈는지 몰라요. 익명으로 배달이 되었어요. 단지 한마디 ??마샤! I love you so much??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치자 꽃을 보고 가만히 마샤가 있다가 처음으로 몇 달만에 엄마하고 대화를 열었습니다.

엄마한테 한다는 소리가, 엄마 이게 누가 보냈을까 도대체 이게 누굴까? 글쎄 말이야 누굴까? 아마 너를 좋아하는 남학생이겠지. 에이 누가 나를 좋아해 나 같은 사람을, 그래도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야. 그럼 이름 쓰지. 수줍어서 아마 남자들도 뜻밖에 수줍어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얘, 아마 그런 사람이 보냈겠지. 그럴까?.

녜, 아무것도 아닌 치자 한 송이 꽃 때문에 마샤는 말을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기 시작했어요. 그 다음에도 생일날 어김없이 치자 꽃 한 송이가 배달이 됩니다. 그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마샤는 밝아졌고 정상적인 삶을 살았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때까지도 계속 배달이 되었어요. 궁금했던 것이 결혼 후에도 이 꽃이 배달될까? 그런데 자기가 시집가고 결혼하자말자 결혼 직후에 불행하게도 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치자 한 송이는 더 이상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샤는 알았습니다. 누가 그 꽃을 보냈는지, 꽃이 마샤의 인생을 바꾼 것이 아니죠. 엄마의 사랑이 바꾼 거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고백가운데 많은 고백은 이것입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고, 십자가가 우리를 변화시킨 것일까요? 십자가라는 나무가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가 우리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 하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지금 고통 속에 있지만 고통의 의미를 풀지 못하지만 그러나 이 고통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이 한가지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면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나를 창조하신 나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그 하나님 만나고 그 사랑을 확인하고 그 하나님 한번 붙들 수가 있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이 고통의 세월을 극복할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라에서 벌떡 일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또다시 찬양을 부르며 춤추며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걸어갈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하나님의 고통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치유가 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의 길로(요한일서 3:13-16)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고 핍박받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핍박을 받는 것은 먼저 예수께서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에 핍박을 하는 자들은 무리하게 핍박하지만 핍박받는 자세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앞서 핍박받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중에 스데반 집사라는 믿음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거 한다는 이유로 예수가 구원자가 아니라고 핍박하는 세상에 속한 자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늘에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주여! 저들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보라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선 것을 보노라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감사 할 수 있는 신앙의 자세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스데반 집사의 순교가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믿음의 행위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내게 오는 핍박과 그리스도로 인해 내게 오는 어려움을 불평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주께서 걸어간 그 길을 걸어가는 자세가 신앙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주신 것을 깊이 생각해 봅시다. ??너희가 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 이유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 속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은 연고 없는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연고 없는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고 없이 핍박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이러한 연고 없는 핍박이 옵니다.

연고 없는 핍박이 우리에게 모욕적인 것, 그러한 상황적인 것으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연고 없는 핍박은 영적으로 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의롭고 하나님의 역사에 기여하기 위해서 내가 기도하고 애쓰면 애쓸수록 영적으로 우리에게 막아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막아지는 것은 인간은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내 육체적 환경적 상황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어려움을 갖다 줍니다.

그러나 그 어려움을 사람의 생각으로 풀려면 안 됩니다. 오직 그 어려움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풀려고 하는 신앙으로 나아갈 때에 우리 앞에 산적했던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 앞에는 그 문제가 굴복되게 되고 오직 성령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역사해서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고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의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 에서 형제가 누구일까?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을 하면서 그 사랑의 대상을 모르고 사랑을 한다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사랑하기 이전에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 한 형제가 과연 누구일까? 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 때에 우리는 그 형제를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아름다운 것이며 고귀한 것입니다. 사랑에는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에는 무례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가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을 먼저 우리는 깨닫고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대로 그 형제를 사랑하십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증거 할 때에 복음의 시초가 산상수훈 혹은 산상보훈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으로부터 예수님은 당신이 오신 구원자이며 메시아임을 증거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말씀한 말씀은 모여 있는 회중들과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는 말씀이 영적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말씀이 아니라 오직 그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처럼 그들에게 영적인 말씀을 가르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한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기를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들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 그리한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을 알고 깨우치기 원해서 말씀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까요? 우리에게 윤리나 도덕적 행동반경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원수가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사랑해야 될 그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면 될 터인데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했을까요? 그 이유는 이미 주께서 과거도 아시고 현재도 아시고 미래도 아시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당신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원수로 몰려 죽일 것을 알았기 때문에 너희 원수를 사랑해라. 그리한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은혜가 우리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 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곧 그리스도인 당신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에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을 찾았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분명히 알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우리에게 설명하는 형제의 사랑은 나의 혈통이나 나의 교우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형제가 아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로 비유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형제로 비유했을까요? 이것까지 그 이유를 깨달을 때에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셔서 사역하실 때에는 아들로서 역사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를 비유해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하는 사랑의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소속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 줄 아십니까?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자라. 아브라함의 씨라 일컬으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누구입니까?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아무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 속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에서 산 자란 우리가 알고 있는 목숨이 붙어 있을 때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가 허락한 성령으로 죄 사함 받아 마지막에 부활에 이를 때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렀을 때만이 그에게만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은 만인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에게 오직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살인죄인 줄 압니다. 그러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살인하는 자는 결코 심판을 받고 맙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키지 아니하는 것은 곧 죄를 짓는 것이라는 말씀을 살인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문제를 짚고 넘어 가야 되겠습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가지고 의롭다고 하고 정죄하고 윤리와 도덕적인 것만 가지고 우리는 구실을 삼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죄요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죄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한 문제를 올바로 알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 대인 관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올바로 서 있느냐? 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 때에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요 신앙 생활하는 기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은 하나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영적 문제는 고민하지 않고 육적 문제만 고민하는 일들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죄를 어떻게 짓고 있습니까?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뜨겁게 들어야 됩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오늘 우리가 사랑해야 될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말 마음에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마음에 사랑함이 없다면 우리는 이 말씀에 걸리는 것입니다. 오직 살인하는 자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 주신 말씀을 내가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주여! 나는 부족하고 나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주여! 나의 길을 인도해 주옵소서! 나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나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바로 알게 하시고 나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는 삶으로 만족하게 말게 하시고 오직 약속하신 성령을 내게 주어서 주님과 교류하는 삶으로 나의 낙이 되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신앙의 마음을 가질 때에 이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의 계명들을 지켜야 됩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짐을 졌습니까? 주께서 말씀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의 삶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죄의 짐을 우리는 지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풀 수 없는 짐! 칼로도 도려낼 수 없고 물로도 씻을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 씻을 수 없는 것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의 멍에 줄을 끊어주시고 우리를 죄 없게 하시고 의롭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하시겠다고 주님은 이 시간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 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시거든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예수님과 먼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사람의 눈으로 평가하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주님 말씀한 말씀을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말씀을 볼 때에 주님과 여러분의 관계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주님은 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말씀한 여러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만 본문 말씀에 이렇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알았습니까? 우리는 사랑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택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온갖 멸시천대 모든 것을 주님이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무능해 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 죄와 허물을 인해서 우리를 죄에서 자유 하게 해주시기 위해서 그분은 엄청난 대가를 우리에게 치르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조용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사랑의 확증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먼저 예수님 우리에게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제 진정한 신앙인은 스데반 집사나 바울사도나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한결 같이 복음을 위해서 그들은 생을 다 바쳤던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고 예수 안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사랑하십시다. 어떻게 얼마만큼 사랑해야 될까요? 죽기까지 사랑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한 다음에 부활하셔서 다 떠나가 버린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그들을 불러서 당신의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허락한 성령을 기다리라.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 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한 연후에 개인적으로 주님은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 사람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을 때에 베드로는 주여! 그러하외이다. 라고 분명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랑의 약속을 받습니다. 두 번째 꼭 같은 말을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을 때에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두 번째 똑 같은 말씀으로 대답합니다. 세 번째도 똑 같은 말씀으로 묻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언약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젊어서는 네 임의대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띠를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에 가서 두 팔을 벌리게 되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랑의 확약을 요구한 다음에 예수님은 오직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를 져 달라는 주문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 속에도 진정한 사랑이 있으면 못 이룰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갖는다면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서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수님과 약속한 약속의 말씀을 복음을 증거 하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순교해서 진정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몸소 나타내 보였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의 핵심이 그렇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자! 예수를 사랑하면 핍박이 와도 고난이 와도 어떤 상황이 온다할지라도 변치 아니하는 것이 진정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먼저 안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사랑하십시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부르는 찬송 102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는 그 찬송을 부를 때에 우리 심령에서 주께 우리 신앙고백이 되는 그러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음에서 사는 길 -십자가와 부활-(요한복음 3:1-15)
예수께 찾아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한 밤에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유대의 랍비(선생)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관원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나타내시는 여러 역사(役事)들이야말로 하늘로부터 온 표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하늘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본 니고데모는 육으로 난 육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6).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깨달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지 아니하면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거듭남의 진리였습니다.

결국 사람이 거듭나는 일은 하늘로부터 오는 초자연적 역사의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일어나고, 그 믿음의 결과는 구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구원의 요체는 예수 자신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영광이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들림을 당하실 예수 자신으로 말미암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더 확실히 풀이하면 사람이 죽음(육)에서 사는 길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1. 죄의 삯인 사망의 현장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와 나누던 거듭남의 대화 중에 갑자기 구약 광야교회에서 일어났던 역사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4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이 말씀은 바로 민수기 21장 4-9절의 사건의 내용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던 광야 노중에서 생긴 사건이었습니다. 저들은 모세가 길을 둘러 가는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왜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었느냐? 어찌하여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이 광야의 박한 식물과 물이 없는 일로 인해 우리는 죽게 되었다."는 원망입니다(민 21:4-5).

실로 무서운 반신이요, 배신이요, 불신이요, 배은망덕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진노하시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그곳 광야에 서식하던 불뱀들을 명하여 그 백성들을 모두 물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불뱀의 독 때문에 갑자기 죽음을 만난 자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뱀에게 물린 자마다 그 독소 때문에 온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진노였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심판은 저 에덴동산에서 마귀(뱀)에게 물려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생각나게 합니다(창 2:16-17, 3:1-19).

광야에서 범죄 했던 사람을 물었던 뱀은 영적으로 마귀(사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뱀에게 물린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모든 죄인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예외가 없이 사탄에게 물려 그 사망의 독소 때문에 사망을 이루고 있는 현장이 바로 인류역사의 현장입니다. 예수께서 보신 유대의 랍비 니고데모도 바로 그러한 죄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뱀에게 물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육으로 난 육이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의 은사인 구원의 계시를 보게 됩니다.
뱀에게 물려 죽었고, 또 죽어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지은 죄를 회개하며 모세에게 간청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뱀들로 하여금 자기들에게서 떠나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물린 뱀의 독소에서 살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민 21:7).

바로 그때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놋으로 뱀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장대 위에 달라고 하였습니다.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광야의 모든 백성이 볼 수 있도록 높이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지체 없이 이 일을 실행하였습니다(민 21:8-9).

그때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자마다 장대 위에 높이 달린 그 놋뱀을 쳐다보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을 쳐다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21장 9절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죽음을 만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사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죽음에서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계시였습니다. 뱀에게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 다시 사는 길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말미암아 계시해주신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이것이었습니다. 물론 장대 위에 달려 있는 놋으로 만든 놋뱀 자체는 생명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뱀에게 물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어떤 약의 효소가 놋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그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라고 하신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쳐다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장대 위의 놋뱀은 사람들의 마음(생각)과 행동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지시하는 표식이요 상징이며, 지침이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하는 한 수단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 자신께서 저들을 즉시 살려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께서 뱀의 독으로 죽을 사람(죄인)들에게 베푸신 은총이요 용서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께서 나타내신 능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들이 죽음에서 사는 길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계시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장대 위에 높이 들린 구리로 만든 뱀을 쳐다보게 한 이것만이 죽음에서 사는 길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죄인에게 베푸신 은사일 뿐입니다(롬 6:23). 저들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구원의 계시대로 그 장대 위에 구리 뱀을 쳐다본즉, 바로 그 시간에 살았습니다.

3. 들림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살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나눈 대화의 중심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지난날의 먼 역사, 이스라엘의 광야교회 역사가 아닌 현재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본문 요한복음 3장 14-15절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저 구약 광야교회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로 인하여 만난 죽음에서 사는 길이 모세가 장대 위에 높이 달아놓은 그 놋뱀을 쳐다보는 것(바라봄)이었듯이, 이제 니고데모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들림을 당할 인자 곧 예수를 쳐다봄으로 죽음에서 살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 이것은 예수 자신께서 인류의 죗값을 대신 담당하기 위하여 저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당하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내신 장대 위의 구리뱀의 구원계시는 바로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알려주는 예언적 구속계시였다는 사실입니다.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요 3:14). 여기 '들려야 한다'는 말은 '들어올리다'(lift up)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게 두 가지 경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경우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실 사실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습니다.
요한복음 8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2절에도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경우는 예수님의 부활승천의 영광을 가리킬 때 사용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33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라고 한 경우입니다. 사도행전 5장 30-31절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고 한 경우입니다. 빌립보서 2장 9절에는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그를 '오른손으로 높였다', '지극히 높였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아들 예수를 무덤에서 부활시키시고 하늘로 승천시킨 영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롬 1:4).

그렇다면 옛날 광야교회에서 저들의 죄로 죽음을 만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계시하신 구리뱀을 쳐다봄만이 죽음에서의 살길이듯이, 이제 니고데모도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를 쳐다봄(믿음)으로만이 살길이 있다는 예수님의 주장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높이 들리심은 대속 수난의 들림이고, 그가 부활 승천하심은 영광의 들리심입니다.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성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통과해야만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 수난이 없이는 부활과 승천의 영광스러운 면류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죽음을 만난 인생(죄인)들의 살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사실상 아찔함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이라고 하였습니다(요 3:12). 여기 '땅의 일'이란 니고데모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니고데모는 주께서 들려주신 거듭남의 진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요 3:4).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요 3:12). 여기 '하늘 일'이란 바로 예수 십자가의 들리심, 곧 대속의 죽음과 영광의 부활 승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니고데모가 알고 있는 광야의 놋뱀 사건을 가지고 자신이 당해야 할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니고데모가 사는 길을 말하고 게십니다. 주님이 보신 니고데모! 그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뱀(사탄)에게 물려 그 독소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는 죄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는 선민의 혈통이나, 바리새인이라고 하는 정통교파나, 선생이라고 하는 사회적 신분이나, 관원이라고 하는 세상 적인 명예를 가지고는 뱀에게 물린 사망의 독소에서 살아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육으로 난 육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이 거듭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를 믿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장대 위의 놋뱀을 쳐다 본 자는 죽음에서 살았습니다. 십자가의 장대 위에 높이 달려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그를 높여 부활하시고, 하늘에 높이 오르신 예수를 믿어야 산다고 하였습니다. 영생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죄인들의 살길은 그 생각을 바꾸고 십자가에 높이 들림을 받으신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의 삯인 사망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대한 주님의 요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쳐다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떤 때에는 사람의 이성까지도 무시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M. Luther)는 사람의 이성을 짐승으로 비유한 때도 있습니다.

※ 죽음에서 사는 길은 주 예수를 믿는 일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행 4:12). 예수만이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4:6).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행 16:31).

현재보다 1,000배나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만 약속된 축복입니다. 예수를 믿는 바로 그 순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버립니다(요 5:24). 바로 그 사람이 1,000배나 더하는 축복의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그는 땅의 일도, 하늘의 일도 다 아는 행복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요한복음 6:28-33 )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들을 때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르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먼저 깨달아야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손을 가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물론 현대에는 미용이라고 하는 표면적으로 다듬는 이러한 것들이 성행되는 시대이기 때문에 손과 손톱을 잘 소제하고 화장품을 발라서 피부를 보호하는 다듬어진 손도 아름다운 손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손이 어떤 손인가 하면 일을 많이 해서 손가락이 굶어져 있고 손의 피부는 거칠거칠해진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대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남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룰 때 악수를 합니다. 악수를 할 때에 만져보면 손이 두툼하면서 손바닥에는 약간 딱딱함을 느끼는 사람들의 손을 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손이 실상은 아름다운 손입니다. 왜 아름다운 손일까요? 많은 노동을 통해서 타인들에게 봉사한 손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손인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악기를 연주합니다. 물론 그들의 손도 아름다운 손입니다. 아름다운 손이란 일을 많이 한 손이 아름다운 손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주의 일을 해야 되겠는데 어떤 일이 주의 일인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십시다. 전도하는 것, 교회 봉사하는 것, 찬양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주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주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 당하시고 삼일만에 살아나 부활 승천하시어서 성령으로 오시어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 하는 그 분을 온전히 믿는 것이 큰 주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바탕에 세워지지 아니한 일이란 어떤 것도 주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가져야 되느냐?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믿음이 있고 내가 아무리 성경을 잘 알고 내가 아무리 찬양을 잘 한다 할지라도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어떠한 행함이 따라야 되겠느냐?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을 듣고 마음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을 가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를 만나러 갔습니다. 예수를 만나러 가서 그는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혈루가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그 믿음대로 행동으로 옮겨서 혈루병을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그 여인을 향하여 말씀하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으면 온전히 주님께 나아가는 나의 행위가 있어야 됩니다. 이 행위는 육신으로부터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믿어질 때에 행위로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지 않고 가고 싶은 곳에 오지 말라고 해도 가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움직여 행동하는 믿음은 먼저 마음에서 믿어질 때에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보내신 그분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말씀하신 그대로 우리는 따라가는 것이 주의 일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어떤 사람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데 장정만 약 오천의 숫자가 모였습니다. 모인 그들을 그리스도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서 오천 명을 먹이고 남는 놀라운 능력을 행해 그들에게 영혼 구원자이며 생명의 양식을 주는 그리스도임을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능력 행하는 것을 보고 저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임금 삼기를 원했습니다. 영적인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인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셔서 나왔을 때에 예수를 찾던 무리들이 랍비여 언제 여기에 오셨습니까? 라고 하는 물음을 물을 때에 예수님은 예수를 찾아다닌 그들에게 말씀하신 말씀이 오늘 내용의 일부분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일은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고 교회의 일은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기독교와 사회와의 관계를 갈라놓아 버리는 편협 된 사고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한 말씀을 사회와 교회를 단절시키기 위해 말씀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느 것을 위해서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썩는 양식을 위해 다시 말해서 육신적인 축복을 바라보는 믿음의 생활은 불행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육신의 축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수고하는 일은 믿음의 생활인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하는 사람은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그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며 믿음의 사람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당대의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묻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명료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는 믿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믿음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온전히 갖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들을 보십시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가룟유다 외에는 모두 다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변화의 과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 다닐 때에 그들에게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회복되게 되면 자신들에게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예수를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고 이미 무덤에 장사지내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이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왜 이렇게 저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까? 그 이유는 단순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바라고 요망하는 메시아가 이미 죽어버렸으므로 자신들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 때문에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합니까? 예수를 바로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자기중심적으로만 알고 믿은 결과는 다 부정했던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긍정적으로 믿은 사람이 없던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관계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찾아봅시다. 뿔뿔이 흩어진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다음에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여 주면서 깨닫지 못할 때에는 십자가에 고난 당한 모습으로 저들에게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저들에게 설명하셨고 또한 많은 말씀으로 그들에게 부탁도 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께서 허락한 그 성령이 올 터인즉 그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어서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어 달라.?? 는 말씀과 부탁뿐만 아니라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절대적인 약속을 주시면서 까지 말씀으로 저들을 설득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에 주님 말씀한 대로 성령이 저들 위에 임했던 것을 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나니까 지금까지 알고 있던 예수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바꾸어지는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을 받기 전에 예수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은 육신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알고 있던 이들은 그분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영원한 구원자임을 올바로 깨닫는 역사가 저들 심령 위에 이루어질 때에 우리는 이렇게 있을 수 없다. ??놀랍고 놀라운 이 사실을 나아가서 증거 해야 되겠다!?? 라는 마음으로 그들은 예루살렘 길거리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또한 성령으로 오시어 지금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많은 외국인들이 모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올바로 증거 할 때에 성령의 역사 하심을 통해서 각 나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듣게 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베풀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와 행동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믿음의 사람의 행위인 것입니다. 만약에 저들이 성령의 은혜를 입고도 전하지 아니했던들 오늘 우리 기독교의 복음사역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까?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까? 전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으며 또한 들음이 없으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늘 말씀한 말씀의 의미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직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보내신 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 속의 노예 생활 속에서 출애굽을 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과정 속에서 광야생활이 시작됩니다. 이 광야생활 속에서는 농사하지 않았습니다. 길쌈하지 않았습니다. 농사하지 않고 길쌈하지 않아도 저들은 먹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셔서 먹고 또한 메추라기를 주셔서 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했던 것이 그들의 신앙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수를 믿게만 하신 것이 아니라 또한 은혜의 말씀으로 계속해서 우리는 양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양육을 받으면서도 말씀이 내게 은혜의 말씀이요, 내게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묵상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왔을 때에 설교 시간에는 듣고 교회 문 앞에 나가면서 그 말씀을 다 잊어버리고 가고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신 만나라고 생각하지 아니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도리어 조금만 어려운 상황이 되면 불평불만만 했던 것이 그들의 삶이었던 것을 우리는 거울삼아 보면서 우리는 결코 불평하는 삶이 아니고 감사하는 삶, 불신앙인의 삶이 아니고 신앙인의 삶, 오직 주의 거룩한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삶, 이런 삶이 진정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삶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 고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이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셨노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오직 그분이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상황에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절대로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 사도바울을 보십시다. 많은 핍박과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서 나를 끊을 수 있으랴! 기근이랴, 핍박이랴,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사랑의 줄, 생명의 줄을 맺은 것은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다고 증거 한 것을 봅니다. 뿐입니까?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기를 말씀합니다.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결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서 이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사람인 것입니다. 믿음은 나 혼자만 외롭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성령이 함께 역사하사 그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인간으로 행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이루게 하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함께 해 준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시고 제시한 것을 봅니다.

성경 중에서 유대인이 아닌 수로노니게 여인이 등장됩니다. 이 여자는 자기의 딸이 귀신들려서 많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는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간구 합니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주님을 찾아 부르짖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주님! 제발 저 여인에게 말씀을 하셔서 가라고 하시던지 보내십시오.?? 라고 하는 이러한 말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는 말씀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지 아니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자녀의 떡이라는 자녀는 유대인을 자녀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은 유대인에서 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여인은 ??옳소이다만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여인의 믿음은 오직 구원자는 유대인에게만 구원자가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구원자가 되실 수 있지 않습니까? 라는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믿음을 바라보시고 ??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지어다.?? 라고 할 때에 그 여인의 딸이 그 시에 사단에 매여 있던 질병에서 나음을 얻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던 것을 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내가 단순하게 주여! 주여! 하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 가운데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계시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함께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곧 그 말씀을 내가 믿는 것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의 일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져서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종이 되게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여러분이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귀한 은혜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감사(시편 119:67-71)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친 그 부르짖음이 여러분 영혼 속에서도 날마다 있어진다면 주님께서는 늘 여러분을 향해주시고 여러분의 영의 눈을 밝게 하실 뿐 아니라 여러분의 모든 생활의 진로를 하나님께서 광명의 세계, 축복의 세계로 인도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온갖 죄악에서 구원해주시고, 질병과 가난, 근심과 불안 공포 속에서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천하를 소유한 사람이고, 천국을 소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시요, 우리의 축복이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때로 기쁜 일, 슬픈 일을 맛보며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 감사를 드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좋을 때, 기쁠 때, 부유할 때, 건강할 때, 성공했을 때, 합격했을 때, 칭찬 받을 때, 높여줄 때 감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감사는 고난 중에 드리는 감사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받았다
고 해서 애굽에서 바로
가나안 땅으로 옮겨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의 시련과 역경,
환난 풍파를 통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시편 기자는 어
떻게 해서고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첫째, 고난을 통해서 바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67절)
사람들이 좋을 때 인간이
되어지는 것보다도 고난이
있을 때에 사람이 되어집니다.
인격자가 되어집니다.
위대한 통치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출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정상에 올라가도
능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그러한 모든 훈련이
고난 중에서 이루어지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다 그릇 행하기
쉽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정로(正路)를 걷다가도
U턴을 할 때도 있고,
좌회전할 때도 있고,
우회전할 때도 있으며,
때로는 주저앉고
좌절할 때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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