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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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21-03-01 06:37:23, Hit : 316
File #1    고난주간_묵상자료집_(2).hwp (513.5 KB)   Download : 8
Subject    세 개의 십자가(2)

  세 개의 십자가(2)
(누가복음 23 장 39-43절)
< 서 론 >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중앙에는 예수의 십자가,
양쪽에는 강도의 십자가입니다.
왼쪽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는 흉악범입니다.
그는 공기밥 속의 돌과 같은
놈이어서 법은 그를 십자가
처형으로 걸러내 버리려 합니다.
하나님은 흉악범에게도
최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십자가에 달려있을
너무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사실, 왼쪽의 강도가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된 것은
훌륭한 스승을 만나서
좋은 교훈과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마지막 가는 길목이기는 해도,
인간 역사에 가장 위대했던
스승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과거의 삶을 뉘우칠 수 있는
얼마나 좋은 챤스이며
구원받을 수 있는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은총입니까?
그러나 왼쪽의 강도는 끝까지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조차 타인에
대한 조그마한 동정도 없었고,
말 한 마디 따뜻하게 해주어도
피차가 힘이 되어
죽어갈 수 있을 텐데
끝까지 욕하다 일생을
마치고 버림받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왼쪽의 강도에게서
내 내면 속에 숨겨져 있는
어두운 모습, 매정한 모습,
가까운 사람들을 헐뜯는
나의 강도와 같은 모습들을
발견해 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른쪽 편의 강도를 관찰해봅시다.
1. 오른쪽 강도는 로마법에
기준한 강도입니다.
십자가의 형틀은 페르사에서 기원됩니다.
페르사 사람들은 `올무즈'
라는 신(神)을 섬겼습니다.
땅은 올무즈 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것입니다.
범죄인은 땅에 발을
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신성한 땅을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범죄인들이 신성한
땅을 더럽히지 못하도록
높이 들어올리려 한데서
기인되고 있습니다.
로마가 페르사를 정복했을 때
이 잔인무도한 처형을 보게됩니다.
잔인성보다는 그 경고성,
엄포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십
자가에서 죽어가는 죄수보다는
그 모양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여차여차한 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죽이겠다라는 그 경고성 때문에
로마로 수입(?)하게 됩니다.
로마는 이 형벌을 반란자,
도주한 노예들, 가장 극악한
범죄자들에게 적용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에게
이 형벌을 과하는 것은
불법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살인자? 사기죄? 폭행범?
흉악범들을 위한 형틀입니까?
아닙니다. 순전히 로마정부에
반역하거나 저항한 죄입니다.
모든 죄에 관대한 로마인들이지만
반역죄에는 동정도 용서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한 처형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해서 무조건 흉악범이다,
악랄하다는 것은 로마인들의
잔인성을 정당화해주는
구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보다 더 큰 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독신죄
(瀆神罪)가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황제에 대한
반역을 중죄로 여겼습니다.
여기 강도는 로마인들이 정해놓은
법률에 근거하여 달려있습니다.
두 강도가 비록 십자가에 달려있다 해도
로마인들의 눈에는 반역자요
도주자일지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
는 그는 애국자요 독립투사
였는 지도 모릅니다.
오른쪽 강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흉악범이 아닐런지도 모릅니다.
단지 그 당시의 법률에 근거하여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범법자라는 게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범법할 수 있는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가 좋은 부모들을 만나고 좋은 환경에서
살면 범법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없어지는 것이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 성장했다면
범법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법자들을
바라보며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형틀에서 죄인의 개념에
새로운 인식을 해야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들! 로마인들의
눈에는 강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에는 독립투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누가 죄인입니까?
살인하고 사기친 사람들!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사람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등을 돌려도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설 때 죄인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들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그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 죄인입니다.
불신(不信)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십자가에는
소위 젊잖았던 사람들,
그럼에도 하나님을 영접하지 않았던
불신자들이 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죄인 1호입니다.
억울하게 느껴질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죄의 개념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잣대로 사람을 처단합니다.
그래서 착한 사람들의 우리의 잣대로
십자가에서 모욕당하는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유형의
범법자들을 보며 지나치게
비난하기 쉽습니다. 도둑질을 했다,
살인을 했다, 사기쳤다...
이런 죄목으로 체포, 투옥하기도 하고
처형하기도 합니다.
청문회에 불러 들여
온갖 모욕을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잣대는 법의 잣대입니다.
하나님의 잣대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양심의 잣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법의 잣대에 걸리지 않았다
하여 혼자 정의로운 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에는 전혀 엉뚱한
사람들이 걸린다는 사실을 오른쪽의
십자가에서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2. 오른쪽 강도는 죄의
대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오른쪽 강도는 옆에 달려있는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마27:44).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우리들도 구원해 보아라! 그러면 믿겠노라!"
처음에는 오른쪽의 강도도 함께 따라했습니다.
그러나 강도는 덩달아 따라하면서도
나름대로 판단력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의깊게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용서, 효도, 사랑,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고통을 감수하시는 모습,
독신(瀆神)이라는 죄명으로 달려있기는
해도 하나님을 향한 경건,
이 모든 것들 보면서 강도는 감화를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깊은 후회와
예수님에 대한 인정을 하게됩니다.
지금까지는 옆의 강도와 함께
욕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 옆 강도의 조롱이 귀에 거슬렸고
마음 속에 의분을 일으켰습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나? 그만하면 되었지?'
그는 참다못해 다른 강도를 꾸짖습니다.
41절, "우리는 우리의 죄로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이분은 왜 죽는가?
이 분은 참으로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그의 입술에서 나오는 그 말 한마디는
오랫동안 그의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죄의 대열에서, 무정한 대열에서,
남에 대한 비난의 대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아직도 법의 십자가에는
달려있지만 죄악의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른쪽 강도에게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뜻합니다.
그는 이제 예수라는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42절,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당신이 천국에 올라갈 때
나를 동행시켜 주시오!"
감히 그런 구원을 요청하지는 못합니다.
천국이라면 자신처럼 살아온
사람이 가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뭔가 선한 삶을 살고
이웃을 사랑하고 남에게 자선을
베푸는 생활이 있어야 하는 데
자신에게는 어두운 과거 밖에 없습니다.
자신은 십자가에 달려 마땅하고
내세가 있다면 당연히 지옥감입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니 그게 아닙니다.
사람이 죽게되면 지푸라기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처럼,
죽음 앞에서 그는 예수님에게
매달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드리는 기도를 들었습니다.
34절,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지금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지 알지 못합니다"
그 기도는 그가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용서의 기도입니다
. 빌라도조차 석방해주려고
했던 죄없는 사람,
그를 십자가에 매다는 아래의 사람들,
그들을 위해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들려올 때
강도는 가슴이 뜨끔했을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해 달라니?
이런 살벌한 분위기에서!
저 예수라는 이는 정말 사람인가?'
로마에 반역했거나 중한 죄를
저질러 십자가에 달려있는 한쪽 강도,
그에게 용서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에게는 보복만 있고 폭력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엄청난 용서를 하고 가는 사람을 만납니다.
저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메시아일 것입니다.
그는 천국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와 함께 죽음의 길에 동행했으니
천국까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천국에 들어갈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다는 말이
"나를 생각하소서!"입니다.
그는 염치를 알았고
송그스러움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염치없는 삶을 살아왔을 것입니다.
뻔뻔하고 무정하고 누구에게도
용서를 구해보지 않은 사람,
이제 그는 예수 앞에 굴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와 처분을 구합니다.
누구나 죄의 대열에 설 수 있습니다.
남에게 매정하고 남을 비난하고
함께 헐뜯고,그러나 우리는
분별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섰다가도
바른 분별력으로
그 일이 내 양심의 청결을 흐리고
인격을 스스로 허무는 일이라면
즉시 그 대열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로 붙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회가 있습니다.

교회에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부정적이고 자기 식이 아니라고
꼭 한마디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은 자기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합니다.
비록 처음에는 멋모르고
따라하고 짝짝꿍해주지만
나중에라도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그 대열에서 빠져나오는
사람들은 기회가 있고 행복한
대열로 자리를 이동하게 됩니다.
이제 주님에게 요청하십시오.
"주님! 나를 생각해 주소서!'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3. 오른쪽 강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오른쪽 강도, 무슨 짓을
저지르다 여기까지 왔을까요?
그것도 모자라서 조금전까지만 해도
십자가 위에서조차 남을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태도가 돌변합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을 알아봅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 대열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과 한편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른쪽 강도의 태도가 변한 것은
단순히 그의 의지가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의 인격에 감화받기에는
그의 교실은 너무 살벌합니다.
수업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왜,
무엇때문이었을까요?
그의 행동과 품행을 고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동원되었을까요?
그들 부모들은 아들의 행위에
얼마나 애타했을까요?
그래도 고치지 못하고
여기에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가장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 그는 변화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는 아무런 사실로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변화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 그의 생애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은 독신죄로 매달았고
땅은 어둠 속에 갇히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모습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창과 못자국에 찍혀 방울되어
떨어지는 그의 핏방울,
세미한 신음에도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 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 그들은 아래의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용서해 달라고 하는 사람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강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도의 마음 속에 감화력,
회개의 영을 내려주셨습니다.
그것은 강도가 저항할래야 저항할
수 없는 강한 은헤입니다.
그 강력한 은혜가 덮쳤을 때
강도는 마음 속에 깊은 감동을
느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할
수 있었고 구원을 요청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어떤
수업보다 강렬합니다.
하나님의 은헤를 받는 순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고치고
다른 쪽으로 이동합니다.
오른쪽 강도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
자의(自意)로 구원받을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흔히 왼쪽의 강도는 구원을 못받았고
오른쪽 강도는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행위는 비슷합니다.
그저 말한마디 한 것에 불과합니다.
오십보 백보입니다. 그
들의 구원의 유무(有無)가 결정된
것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곳에는
구원이 일어났고
은혜가 없는 곳에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밀고
나갔다가 지옥으로 떨어졌습니다.
대도(大盜) 조세형을 변호해서
석방시킨 엄상익 변호사와
동석할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인즉슨, 조세형은
`성광'(聖光)이라는 작은 기독교
월간지 과월호를 읽다가
예수님을 알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다는 글을 읽고
나는 내 죄로 감옥 왔지만 그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저런 희생을 치루시는가,
라고 생각할 때에 그의 마음 속에
감동이 일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영접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천국과 구원은 선한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믿고 그의 피로
용서받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의 말 한 마디가 은
혜를 잃어버립니다.
은혜를 쫓아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도록
말이라도 좋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 결 론 >
고재봉씨의 이야기를
전도용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탄식처럼
그가 한 말은 이것입니다.
"아! 내가 일찍 예수를 알았더라면
여기에 오지 않았을 것을!"
구원받은 강도에게서도
아쉬움은 많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구원은 받았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의 삶이 없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물 한 잔
남에게 떠주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에게 피해당한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세요"
라는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가 일찍 그의 그릇된
삶의 대열에서 빠져나왔더면
그는 이렇게 겨우 구원받는
생애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좀 더 아름다운 생애를 살았을 것입니다.
이제 이동하십시오.
남을 욕하던 자리에서
남을 변호하는 자리로.
구원과 은총의 자리로.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기회입니다.
자신들이 서 있는 자리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은혜받을
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로 그 행운아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그리고 그 다음은?  
(요19장30-37)

/십자가는 교리가 아닌 삶/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날씨가 추운데 꽃은 피더라".
우리는 춥다고 아직 움츠리고
있는데 꽃은 피어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움추리고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행위이고
꽃을 피우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작품인 것입니다.
봄입니다. 그래서 볼 것이 많습니다.
겨우내 간직하였던 꿈들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수선화는 이미 피어서 오래도록
그 노란 꿈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얀 꿈의 목련은 만발하여
봄에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개나리도 꽃잎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진달래도 이산 저산에 피어
산을 붉게 물들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세상이 환해졌다. 정말 좋은 날씨다.
볼 것이 많아졌다.
참 화려한 세상이 되었다. 봄
바람이 날 것 같다” 고 합니다.
어떻게 해서 이 봄에 이렇게
꽃이 피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해서 칙칙하던 겨울이
이렇게 환한 세상으로 바뀌어 갈까요?
어떻게 해서 작년에 피던 그 꽃을
다시 피우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자연은 끊임없이
이런 변화가 올까요?
겨울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자신들이 가졌던 모든 열매를
다 떨어뜨리고
자신들이 입고 있던 모든
잎파리들을 다 날려버리고 죽었기에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성취한 그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열매도 잎도 다 버렸습니다.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리고
잎이 그렇게 푸르르게 덮여 있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들을 여름에 아니면
가을에 다 날려 버렸습니다.
그것이 강제로 그랬던지 아니면
스스로 그랬던지 그들을 다 버렸기에
이 봄을 맞이할 수 있었고
부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자연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배웁니다.
우리 기독교가 보여주는
십자가와 부활은
교리가 아닌 삶이고 실제입니다.
우리가 행동해야 하는
실제의 삶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죽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냥 죽는
죽음이 아닙니다.
하나씩 죽는 죽음입니다.
다 죽어야 죽는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들은 그러했습니다.
고통을 다하고 아픔을 다하고
피가 다 흐르고 땀이 다 흐르고
나중에는 물까지 다 흘러야 죽었습니다.
그것이 하루가 되었든
이틀이 되었든 일주일이 되었든
다 내어 놓아야 죽었습니다.
오늘 두 말씀을 연결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과 19장 3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1.다 이루신 예수
우리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하시고 그 영혼이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이룬다는 말에는 일단의 요한복음 17장 4절의 예수님의 기도를 연상케합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임무를 다 성취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셔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의 임무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십자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에서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많이 드러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이 땅에 왔습니다. 그는 완전히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나’ 라고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있다면 보내신 그분 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도로 드러난 곳이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나님만이 드러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힘입어 어떻게 생명을 얻고 살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삶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보내어서 하나님이 이루려 한 그 영생의 삶으로 가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다 버리심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버리셨습니다. 이 세상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길을 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벌겨 벗겨진 채 이 땅에 마리아의 몸으로 오실 때처럼 벗은 채 그렇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을 그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낼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 땅에 명예, 영광, 사랑, 수치, 기쁨 모두 다 버리셨습니다. 자기 몸 안에 있는 피와 물까지 다 버리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다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만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이룬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이루었다고 고백하시겠습니까? 지금까지 사신 삶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제 여러분들이 다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남을 살리는 대속의 제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밥이 우리 몸에 들어와 자신이 깨어지고 부서짐으로 우리를 살리듯이 우리의 삶도 남을 살리는 밥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2.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요한복음 19:34을 보면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한은 이 말을 증거하면서 35절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피는 요한복음 6장 54-55절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요6:54-55)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영생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물은 요한복음의 7장 38절을 상기시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의 물을 주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배속에서 영생의 강이 흐르게 하는 분입니다.

이 물은 물론 성령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힘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생명을 얻도록 하는 수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에서 달린 몸에서 피가 나온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죽음이 속죄의 제사였음을 말합니다. 새언약을 새우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이 제사는 우리의 죄를 씻는 것이고 십자가의 제사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 새 언약의 관계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게 합니다. 의의 열매는 생명입니다. 죄, 하나님과의 단절이 시간과 물질의 세계에서 고난과 죽음의 세계에 처하게 하듯이 하나님과 연합하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 속에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물들은 다 성령을 상징합니다. 성령이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고 하나님을 계시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볼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연합하여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예수의 영광받음과 동시에 주어집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령은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계시활동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십자가와 성령,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울리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죽음 없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릴 수 없고 죽음 없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죽지 않는한 성령은 우리에게 역사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은 다음에 물과 피를 흘리신 것 그냥 써 놓은 말이 아닙니다. 예수의 죽음이 곧 성령이 오는 통로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내가 죽지 않는 한, 내 뜻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내 욕심을 내려놓지 않는 한, 내 기대를 버리지 않는 한, 성령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 인간에게 세가지 숨이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목숨이 있고 말숨이 있고 우숨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숨은 짐승도 쉬는 숨을 말합니다. 곧 코로 쉬는 숨입니다. 말숨은 들어야 가능한 곧 귀로 쉬는 숨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의 숨, 깨어나는 숨입니다. 우숨은 자기의 근원을, 자기 존재를 쉬는 숨 곧 가슴으로 쉬는 숨입니다. 하나님과 연합되어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사는 숨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태어 났으면 우숨을 한번 웃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생활은 변화되는 것/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먹고 살다가 죽는 것입니까? 그저 조금 무엇가를 듣고 조금 깨닫고 그냥 끝나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변화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저 잘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 무엇인가를 알고 느끼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리까지 가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는 우리게 이 땅에서 완성이 없을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해 가다보면 죽는 순간에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하지 않으면 이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종종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루함을 느끼게 될 때는 없나요? 인간관계가 때로는 지루하게 생각될 때가 있나요? 왜 그럴까요? 변화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연을 보면서 지루함을 느끼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를 합니다. 어제의 자연이 오늘의 자연과는 다릅니다. 우리도 변화된다면 내가 죽고 성령의 인도함따라 변화된다면 우리의 삶은 늘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이 지루할 수 없습니다. 늘 새로운데 언제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는 날 웃는 것입니다. 아 내가 우숨을 쉬고 있구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슴판이
될 때 영성의 문이 열린다/

미국 LA 북부에 "윌 로저스 공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넓이가 약 140만평이나 되는 이 공원은, "윌 로저스"라는 미국의 코미디언이 기부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전 미국인들에게 웃음의 상징이었던 사람인데, 한편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하루는 그가 LA에 있는 어느 재활원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곳은 소아마비 환자, 척추 환자와 그밖의 신체 장애자를 치료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로저스는 모든 사람들을 웃겼고, 환자들은 로저스의 코미디에 잠시나마 아픔을 잊었습니다. 그런데 로저스가 갑자기 무대를 떠나 휴게실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동료 한 사람이 땀을 닦으려는 줄 알고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려고 뒤따라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로저스는 벽에 기대어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고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몸으로 웃음을 선사하는 자신에게,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픔이 그대로 밀려와 통곡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시 후 로저스는 눈물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는, 방금 전처럼 익살스런 얼굴로 다시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혼신의 힘을 다해 어두운 그늘에 웃음의 빛을 선사했습니다.

세상에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삶으로 굳어진 머리판의 사람이 있습니다. 매사에 머리를 사용하는데 뛰어난 사람이기에 무슨 일을 해도 이익이나 셈에 밝고 항상 이익을 남기려고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상실했거나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의 아픔이나 기쁨에 공감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일, 그리고 잔머리를 굴리는 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머리판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로저스는 머리판이 아닌 가슴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통곡으로 공감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며,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을 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머리판의 사람입니까, 아니면 가슴판의 사람입니까? 앞으로 우리교회에서는 머리판에서 가슴판으로 바꾸는 훈련을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슴판이 될 때, 이제 영성의 문이 열립니다. 그 때 하나님을 자유롭게 만나게 됩니다.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하여 봅니다. 첫째 유형은 관계의 무게중심이 나와 하나님이 맺는 관계에 두어지는 사람입니다. 둘째 유형은 관계의 무게중심이 나와 다른 사람이 맺는 관계에 두어지는 사람입니다.

첫째 유형과 같이 관계의 무게중심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두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은혜요 감사일 뿐입니다. 그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니, 다만 너그럽고 따스합니다. 아픈 사람을 보면 함께 아파합니다. 기쁜 사람을 보면 함께 기뻐합니다. 뿌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요 감사니, 그 위에 피어나는 모든 것들이 그에 걸맞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둘째 유형과 같이 관계의 무게중심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에 두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거기 공로의식, 비교의식이 자리잡게 됩니다. 상대방을 판단하게 됩니다. 늘 비교하여 보게 됩니다. 우월감, 열등감으로 살게 됩니다. 시기, 질투, 미움에 자주 사로잡힙니다. 머리판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머리로 하는 사랑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계의 무게중심이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두어질 때, 그 전제 위에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그 때 우리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이 갖는 귀한 가치입니다.

신앙적인 교훈이 되는
좋은 시 한 편을 소개합니다.

새힘을 내야지요
언젠가 분주함에 지쳐
하루하루의 삶을 버거워하며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을
두려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가고 싶었고
내 포기하고픈 마음 간절히
내 가슴에 파도를 일으키던 어느날,
문득 초록잎새를 보았습니다
아침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연초록 잎새의 가느다란 떨림을
성장을 위한 작은 몸부림을 보며
햇살이 내리 꽂기 전
벌써 광합성을 준비하는
작은 생명체의 분주함을 보며
다시금 힘을 얻게 되고
창조의 섭리 안에 내게 예비된
내일을맞이하고 기대는 기쁨
그리고 성취를 위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그리고 성취를 위해
걸음을 내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성장을 위한 작은 몸부림을
할 수 있는 새출발을 가능케합니다.
십자가 그 다음은 부활을 위한
새생명으로의 새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성만찬을 거행하려고 합니다.
성례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와 성찬식입니다.
그 중에 세례는 씻음을 받음과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며,
성만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이나 설교와 마찬가지로 성례전은
복음을 눈에 보이고, 볼 수 있도록
구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말씀이 성경이라면 육신을 입고
오신 말씀이 예수님이고,
성례전은 곧 우리 눈에
보이는 말씀입니다.
우리 눈으로 직접 뵙는 말씀입니다.
세례가 성도의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성만찬은 성도의 생활의
지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은혜의 최고의 방편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며
이를 통해서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기념하라”고
까지 강조하신 거룩한 예식입니다.
이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령한 은혜를
성도들에게 더하여 주시려고 자신의 살과
피를 떡과 포도즙으로 지정하여 이것을
먹고 마시도록 제정하신 성례입니다.
성만찬에서 떡을 떼는 것은 우리를 위하여
주님의 몸이 희생됨을 의미하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서로 교통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 포도즙을 마시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기 위하여
보혈을 흘리신 것을 인식시켜 주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주님이 오실때까지 계속해서
거행해야 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러면 이제 성만찬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뜨거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속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하신 구속의 사랑을 뜨거운 감격과 감사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의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의 예전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만찬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로의 인침이라면, 성만찬은 그 인침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아 먹고 마실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만찬을 받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통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내대신 죽음을 당하시고 피를 흘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희생의 주님의 몸에 내가 연합하는 신비의 체험입니다.

“떡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신자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는 갈보리의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나 무덤에 누우신 예수가 아니라 하늘 나라의 잔치를 준비하며 당신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식탁을 열어주시는 부활하신 승리의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주님의 죽음과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과 앞으로 있게 될 하나님나라의 메시야적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즐거운 축제”인 것입니다.

다른 때 보다도 오늘 이 시간의 성만찬은
새로운 의미의 성만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성만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받은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오늘 나에게 다시 살아 역사하시며
나를 변화시키는
성만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성만찬을 통해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
쳐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주님의 인격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이 거하심을 믿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날까지
주님의 분신으로 항상
승리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첨부 파일/고난 주간 묵상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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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 희망이 없어”라는
말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 없음이
기초가 되어
터져 나온 말입니다.
서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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