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호 목사 목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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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호 2019-09-24 18:59:45, Hit : 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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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부흥 사경회 말씀자료
/부흥 사경회 말씀자료/

복음의 능력 안에 있는 삶(롬1:16-17)

믿음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고
기도가 있는 곳에 응답이 있고
감사가 있는 곳에 축복이 있고
찬송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기적이 있고
은혜가 있는 곳에 나눔이 있고
전도가 있는 곳에 천국의 기쁨이 있습니다.

낙타의 변명: 눈섭, 발가락이 둘,
등이 굽은 것, -
사막의 모래바람에 적응하기 위한 것.
그런데 우리는 왜 동물원에 있는 거야?

감동이라는 권력

*그리스도의 향기: 생명 있는 곳에 향기가 있다.
(샤넬 N.5의 예, 신학교 기숙사에서의 예,
솔로몬의 지혜-생화와 조화)

*목회스승 이야기

*김정준 박사의 예

일하는 천국
3대 터전(쉼터, 배움터, 일터)-천국은 일하는 곳이다.
보람있는 삶을 찾아

배데스다 못(38년된 병자)
창조적 파트너
영적 스폰서
폭풍의 언덕(13년 동안 주인의 무덤을 지킨 개 이야기)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은 일이 아니고 책임이나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고 헌신을 할 때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진정한 헌신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진리를 위해, 남을 위해 헌신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일에 분주합니다. 그렇게 살면 사는 보람도 없고 시간이 지나면 얻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분은 갈수록 풍요롭고 따뜻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갈수록 살기에 급급해 하며 삽니다.
어떤 분은 갈수록 기쁨을 주며 격려를 줍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갈수록 불평하고 투덜대기만 합니다.

어떤 분은 갈수록 깊이가 느껴지고 성숙해집니다.

그러나 어떤 분은 갈수록 천박해지고 완고해집니다.

어떤 분은 갈수록 은혜가 느껴지고 경건해지는데

어떤 분은 그저 나이만 먹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네비게이토 선교회 회장을 역임한 제리 화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차이는 헌신에 있다!"라고 말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서 헌신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사람이 그렇게 달라집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서 헌신을 한다면 그가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은 정말 막강하게 될 것입니다. 교육정도, 은사정도, 능력정도가 사람의 영향력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헌신의 정도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헌신해야 할까요?

1. 헌신을 결단하고 기꺼이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헌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절로 되지 않습니다. 의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단했으면 헌신의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2. 헌신의 적을 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헌신의 최대의 적은 무엇일까요?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입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려는 본능과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물질주의와 오늘날 유행하는 세속적 생각이 헌신의 적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분주함도 헌신의 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은 너무 바쁩니다. 무엇인기 이루기 위해서 정신없이 뛰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사는 것은 정말 소중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항상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로 게으름과 나태함은 더욱 헌신의 적입니다.

이런 헌신의 적을 물리쳐야 우리는 진정한 헌신을 할 수 있습니다.



3. 자신에 대해 헌신해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헌신이란 자기 훈련에 의한 영성개발을 말합니다.

경건 훈련으로 자신을 훈련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헌신자는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기도와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영적인 헌신은 여가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잘 나타납니다.

성인들은 보통 50시간 정도의 여가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쁜 사람도 자투리 시간을 모아 보면 상당한 여가 시간이 있습니다.

그 여가 시간을 영적으로 얼마나 잘 활용하느냐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4. 가정에 대해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은 교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가정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결혼은 헌신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헌신은 서로의 관계를 견고하게 해 주는 접착제입니다. 몸으로, 마음으로 헌신하고, 그리고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부모와 자녀 간에 서로 생각해 주며 헌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5. 사람들에 대해 헌신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나 자신을 제한하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시간을 원할 때 시간을 기꺼이 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도 개방하고, 다른 사람의 시간에 맞춰 줄 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헌신자는 남의 자유의 폭의 확대를 위해 나의 자유의 축소를 기꺼이 감당합니다.



6. 교회성장에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 헌신하는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저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거나,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에서 발을 빼버립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도 사라지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 조금 잘못된 일이 있으면 가차 없이 비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헌신의 결핍 때문입니다.

진정 교회를 위하는 사람은 이방인처럼 비난하는 것보다



은혜 받은 자는 빚진 자입니다. 교회는 은혜의 나눔터입니다. 은혜는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했습니다. "영국 사람이나 독일 사람이 없더라도 인류는 계속 생존한다. 러시아 사람이 없어도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는다. 과학이 없어도 문제가 없고 먹을 것이 없어도 괜찮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없다면 인간은 살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아무 할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모든 비밀이 여기 있다. 모든 역사가 여기 있다. 아름다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고 힘이 있어야 한다

복음에는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 승리의 소식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지만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예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지혜가 물론 포함되어야 합니다. 병든 것이 아름다운가요? 무지하고 악한 것이 아름다운가요? 진리와 함께 표현되어야 참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참되고 영원한 아름다움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만든다

믿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군대의 능력은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이 몇 명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도 몇 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내느냐에 달려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꾼을 파송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즘 들어서 발 마사지가 아주 유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 의하면, 이 발에 모든 건강이 다 있다는 겁니다. 발을 잘 마사지를 해 주면 몸 전체가 건강하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분명한 게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교회의 건강은 발에 달려 있습니다.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역사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교회의 아름다움은 발에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파송하느냐, 땅 끝까지 가서 주의 생명의 말씀을,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교회가 되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이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는 반드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서 세상 속으로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밤낮 모여서 찬송하고 즐기고 예배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힘이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왜 우리가 전도를 잘 하지 못합니까? 전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라고 하면 영혼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이기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만 구원받았으면 되었지 다른 사람이야 내가 뭐 그리 생각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적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름다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름다운 교회는 더욱 확실하게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 갑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현재에도 있지만 미래에 더욱 나타날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봅니다. 참된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마치 그리스도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이룩할 아름다운 교회에 비하면 현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쁨 속에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망으로 바라봅니다.



/받는 것과 누리는 것(딤전/ 6:17-21)


사람들 가운데 배운 것에 비해 유식한 사람, 아는 것에 비해 많은 것을 다양하게 표현을 잘 하는 사람, 책을 읽거나 영화를 감상한 다음 멋지고 즐겁게 재미있고 실감나게 표현을 잘 하는 사람, 처한 환경이나 여건에 비해 너무나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 평범한 배우자를 통해서도 너무나 행복해하는 사람, 아름다운 자연을 접할 대 풍성한 감정을 감동하면서 표현하는 사람, 대수롭지 않은 밥상을 대할 때 푸짐하게 먹는 사람, 가진 것에 비해 풍요롭게 나누며 베풀며 즐기는 사람, 말씀을 듣고 받은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감사하면서 감동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받는 것보다 누리는 은혜를 가지고 삶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욱더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커지는 반면에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움켜쥐고 확장하려는 마음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은 옛날보다도 경제적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지만 점점 더 나누고 베푸는 마음은 줄어들고 모두가 소유의 노예로 사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입니다. 이렇게 경쟁을 하듯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이웃과 담을 쌓고 지냅니다. 더군다나 이웃을 같이 살아가야 할 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기보다는 모두가 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내가 남을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남이 나를 밟고 일어선다고 하는 일종의 피해망상적인 생각이 이웃과의 간격을 더욱 깊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받는 은혜가 있고 두 번째는 누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받는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은혜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과 천국백성이 되는 것 그리고 성령으로 성화되는 것은 받는 것입니다. 또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하는 말씀처럼 구할 때 받는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았다거나, 사업에 실패했다가 회복하여 성공했다는 것은 받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받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과는 달리 또 다른 은혜가 있는데 그것은 누리는 은혜입니다. 받은 은혜를 가지고 잘 사용하여 즐기는 은혜입니다.



요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한 소년이 바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 명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 배고픈 오천 명이 먹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 오천 명 가운데 가장 기쁜 사람은 누구였겠습니까? 그 사람은 바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친 소년이었습니다. 그 작은 것, 한 사람의 식사 밖에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오천 명이 먹었으니 이 소년이야 말로 그 오천 명 가운데 가장 기쁘고, 감사하고, 즐거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작은 것 가지고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리는 은혜입니다.




결국 일은 주님께서 하셨지만 바치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 사람이 바로 누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부장의 하인이 병이 들어 백부장은 안타까워하며 그 이웃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께 좇아왔습니다. 그래서 백부장이 예수님께 하인의 병을 고쳐주기를 구하니 이웃사람들도 덩달아 백부장의 청을 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은 그 동네에 회당을 지어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이웃사람들이 예수님께 간곡히 부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권력을 가지면 대접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사람은 그 권력을 가지고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러니 칭찬받고, 인정받고, 높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백부장이 모두 다 높임을 받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만 특별히 주님의 칭찬과 사랑과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누리는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가지 은혜, 받는 은혜와 누리는 은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귀하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누리는 은혜에 대해서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주신 다음에는 누리게 하시는 은혜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 6:24“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규례를 지키라 명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항상 복을 누리게 하기 위하심이며 또 여호와께서 우리로 오늘날과 같이 생활하게 하려 하심이라”



막 4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시는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풍랑이 센지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 더 화가 난 것은 예수님이 주무시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신 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바람아, 파도야 잔잔하라”고 말씀하시니 다 잔잔해 졌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있는 것은 받은 은혜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못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분은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문제의 해결자이시며 인도자이십니다. 그분과 함께 있다는 것은 받은 은혜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이 함께 계심에도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받는 은혜는 있었지만 누리는 은혜는 없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이 함께 하시면 아무 일 없을 거야’ 주님이 함께 계시면 걱정할 필요가 뭐 있습니까? 주님께 의지하기만 하면, 맡기기만 하면, 내 힘과 노력을 의지하지 않아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기만 하면, 두려워 할 필요도 속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말씀을 들으시자마자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누리는 은혜가 없으니, 못 받았으니 두려워하고,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아낀다고 아무 것도 쓰지 않으면 결국 모두 다 죽을 수 있습니다. 없다고 하여 아무 것도 안하고 살면 결국은 죽게 되는 것이기에 있는 것을 가지고 서로 활용하여 돕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는 적지만 있는 것을 가지고 누리면서 잘 살아야 합니다. 받는 은혜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리는 은혜는 더 귀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받는 은혜는 있지만 누리는 은혜를 받지 못하면 이것은 엄청난 불행입니다.



전 6:2“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많이 벌었는데 누리는 은혜는 받지 못하여 그만 죽으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가끔 “버는 사람 따로 있고 쓰는 사람 따로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좋은 말입니까? 억울하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려보지 못하면 이것처럼 더 억울한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누리는 은혜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도 중요하지만 누리는 은혜도 받아야 합니다.



인류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자신의 것을 삼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받는 은혜는 있었지만 누리는 은혜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죄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 좋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땀을 흘리고 고생하고 죽음을 바라보고 사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지 못하니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뿐만 아니라 그 가문이 부끄러운 가문이 되고 말았습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알 수 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어려움이 닥쳐올 때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주님을 더욱 의지하는 성도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리는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려운 일 당할 때 원망하고, 불평하고 섭섭하여 주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누리는 은혜는 어려운 일 당할 때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고 섭섭해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은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은혜를 얼마만큼 받았든지 그 은혜를 가지고 누릴 줄 아는 은혜도 받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얘기합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으려면 누리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참 신앙인은 날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이며 누리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성도가 참 성도인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좋은 일이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17절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명령을 합니다. 하나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가진 것이나 갖고 싶은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많이 받는 것은 복입니다. 우리의 실생활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으면 얼마나 속상하고 힘이 듭니까? 재물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대로 하루하루 살면서 내일 또 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희소가치가 있어서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은 조금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누가 많이 가지면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은 조금밖에 가질 수 없기에 빈부가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빈부의 차가 생기면 상대적인 빈곤감에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싸움이 됩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더 많이 못 가지는 것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전쟁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소망을 두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다 보니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잘 살수 없습니다.



또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할 것은 재물은 우리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두려운 이유는 미래가 확실치 않아서입니다. 그러나 재물이 많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재물을 많이 쌓아 둔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잘 될 것이라고 하면 오산입니다.



또 하나의 두려움은 죽음입니다. 돈이 많다고 안 죽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모두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두려움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돈이 많으면 죽음의 위험이 훨씬 더 많습니다. 돈이 두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실패의 두려움도 있습니다. 돈이 있다고 실패하지 않습니까? 실패합니다. 돈이 있다고 가정을 살 수 있습니까? 돈이 있어서 침대는 살지는 몰라도 잠을 사지 못합니다. 돈 가지고 해결되는 것은 없습니다. 병은 또 어떻습니까? 돈으로 모든 병이 해결됩니까? 어느 정도는 해결될지는 모르지만 돈으로 해결될 수 없는 병이 더 많습니다. 돈에 소망을 두지 말라는 것은 돈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결정적이고, 위급한 상황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자녀들을 키우면서 느끼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있다고 해서 자녀들이 바르게 되고, 돈이 없어서 잘못되지는 않습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은 누리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에게 은혜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첫째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기쁨인지 모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할 뿐 아니라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이유는 누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은 계명대로 사는 모든 이들에게 누리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직분도 받았습니다. 남이 가지지 못한 직분을 받은 것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직분은 물론 가정에서의 직분, 자녀를 낳으면 부모의 직분, 결혼을 하면 남편과 아내의 직분이 바로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입니다. 이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엉뚱한 곳에 가서 행복 찾으려 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직분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내 아내, 내 남편, 내 교회, 내 자녀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누리는 은혜를 받으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고부간의 갈등 왜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그저 시집안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아들에게 아내를 주셔서 며느리를 얻게 하시니 감사합니다’‘하나님 제게 또 한 분의 어머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것이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받는 은혜보다 누리는 은혜가 더 귀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를 받았든지 이것을 가지고 귀하게 사용하고 높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참으로 클 줄 믿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누며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딤전 6:18-19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손님대접하기를 즐겨 하다가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딱 한번 손님을 대접해서 하나님의 천사들을 만난 것이 아니라 손님 대접하기를 즐겨 하다 보니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멸망당한다는 소식, 자신의 조카 롯과 그의 자녀들에게 좋은 삼촌이 되었습니다. 남을 대접하고 살아가는 것이 손해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하나님의 복이 예비 되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을 받으려면 남을 대접하며 살아야 합니다.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대접하지 않으니 복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이 위대한 것은 다른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 번도 원수 갚을 생각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해하고 손해를 끼칠 때 원수 갚으려고 하면 그것은 자신에게 독입니다.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하나님이 복 주실 줄 믿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섬기는 자가 되면서 살아갈 때에 그는 누리는 복도 얻게 됩니다.



사랑에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누면 나눌수록 커지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이 나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도 나누면 커지게 됩니다.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는 삼십대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사십대에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인 쉰셋에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쿠르트 한 병과 비스킷 두개로만 끼니를 채울 수밖에 없는 중한 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두 가지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돈 버는 일과 주일학교 교사를 충실히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을 주시다니..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제부터는 돈 버는 일보다는 돈 쓰는 일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 날로부터 돈 쓰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지은 교회가 있고, 그가 지은 많은 건물들, 그리고 수많은 자선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얼마나 살게 하셨는지 그는 98세까지 장수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는 자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누리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시고 복을 주시고 높이시는 것입니다.



나눔은 우리의 미래를 밝게 만든다  

우리는 보통 나눈다고 할 때 물질을 나누는 차원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눔의 사건은 오히려 물질보다는 더 광범위한 영역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생활 중의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우리는 베풀고 나누는 삶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남에게 용기를 주는 말 한마디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나눕니다. 병자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기도의 음성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나눕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발길 속에서 우리는 형제자매에 대한 관심을 나누게 됩니다. 아직 믿지 않는 형제자매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드린 선교 헌금이 고통 받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쓰여 지게 될 때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더욱 커지고 나눔을 통해서 국경을 넘는 사랑에 동참하는 것이며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드린 선교헌금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며, 또 소외된 농촌에서 말없이 교인들을 섬겨 가는 교역자들에게 도움을 줄 때 우리의 미래는 좀 더 밝아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 북녘에 있는 우리의 동포들을 위해서 교회나 나누는 운동에 앞장서게 될 때 이 민족의 미래가 밝아지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받는 은혜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은혜를 받았든지 이것을 잘 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 일수록 없다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 가지고 감사하게 여기고 기쁨으로 여기며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인생을 즐기려면 자신을 돌아보고 그동안 나에게서 즐거움을 빼앗아간 이기심, 분노, 두려움 세 가지 적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리고 슬프기 때문에 기뻐할 수 없다는 핑계를 '슬픔을 경험하지 않고는 기쁨을 경험할 수 없다'고 하며 고난을 즐기는 법을 가지며 살고 마음 밭을 가꾸고, 자족함을 배우고. 작은 일 가운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인생을 즐기고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 가진 것이 있고, 또한 갖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현재 자신에게 없는 것을 구비하려는 노력은 매우 소중합니다. 돈, 지식, 지혜, 건강, 의식 수준 등에 있어서, 더 나은 상태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여 자신이 성장해 갑니다. 그런데 이 때 꼭 유념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잘 활용하고 누리는 일입니다. 그럴 때 만족과 감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빠진 채, 없는 것을 채우려는 노력만으로 인생을 살게 되면, 그 인생은 매우 고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족과 감사가 없이, 늘 결핍감으로 허덕이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장을 위해 부족한 면을 채우려 노력하는가 하면, 한편 현재 있는 것을 잘 활용하고 누리는 것, 이 두 날개를 잘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곧 <없음>을 보충하는 날개와 <있음>을 누리는 날개, 이 두 날개로 인생을 비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없음>을 보충하는 일보다, <있음>을 활용하고 누리는 일이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니, 자신에게 현재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 현재 자신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혹은 현재 가진 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기도의 응답도 좋지만 그 보다도 기도 자체가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은 기도를 통해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누려왔고 앞으로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으로 끝난다면 그것이 영원한 누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을 누리는 누림의 은혜가 가장 귀합니다. 하늘의 영광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만드는가?(엡 2장19-22)  



하늘 에너지

자동차가 움직이려면 기름이 있어야 하듯 사람이 살아가려면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늘로부터 그 에너지를 공급받아 살게 되어 있었는데,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그 에너지의 통로가 끊겨버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치 타는 목마름으로 가뭄에 물을 찾아 헤매듯이 그렇게 끊겨버린 에너지를 찾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그 에너지가 있나 하여 타인을 못살게 굴기도 하고, 무슨 제도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과학을 발달시켜 최첨단 물건들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각종 사상과 이데올로기, 다양한 종교를 만들어 보지만 그 끝엔 언제나 허무함만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런데 끊어진 하늘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가 생겼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하늘 에너지를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 에너지를 공급받는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도 않은 에너지를 찾아 헛수고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늘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은 아침에 들판에 베어 놓은 꽃과 같다. 이슬이 있을 동안에는 싱싱한 것 같지만 해가 뜨면 곧 말라버릴 것이다”(시90:6)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최상급 표현으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의 죽음 이후에 부활 승천하신 후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사랑표현으로 이 땅에 교회를 허락하셨습니다. 이 땅에 우리 영암교회를 그 동안 지켜주시고 성장시켜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도 사람과 같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태어난 때가 있고, 어린아이 같은 시절이 있으며, 한 참 자라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때가 있고, 그렇지 못하고 약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나이와 관계없이 교회의 영적 상황에 따라 견고함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영암교회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되고 축복의 통로이며 구원의 방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일찍이 키엘 케고르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 그런데 교회는 더 엄청난 일을 했다. 포도주를 물로 바꾸었다."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린 교회를 책망했습니다. 이 말을 받아 어떤 신학자는 "현대교회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포도주를 담았던 항아리마저 깨버렸다. 그래서 그 깨어진 항아리 조각들로 서로를 찌르고 서로를 괴롭히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깨어진 항아리 조각에 집사도 평신도도 찔렸고 목사도 찔려 피를 흘렸습니다. 교회에 깨어진 항아리들 때문에 사회도 역사도 찔려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아이들보다 키도 많이 커졌고 몸무게도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체력검사를 해보면 힘과 끈기가 모자랍니다. 체력만 떨어진 게 아니라 허약 체질이어서 비만과 알레르기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나아가 심신이 약해졌습니다. 조금만 문제에 부딪혀도 금방 절망하고 낙심합니다. 한국교회 그 동안 성장은 해왔지만 역사를 이끌어갈 힘을 잃은 허약 체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성장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현대교회들은 교회성장이라는 말보다는 교회건강이 그들의 비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두통 있다고 모가지 자르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이 씻은 물이 더럽다고 물을 버릴 때 아이와 함께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이는 건져놓고 더러운 물만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가 많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복음도 예수도 함께 버릴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이아가라 폭포 곁에서 마실 물이 없어 갈증으로 죽은 사람이 있다고 나이야가라 폭포가 마른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허물이 아직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엔 풍성한 축복이 있고 복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역사를 이 끌어갈 힘이 있고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해 줄 사랑이 이 교회 안에 아직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교회요 하나님이 직접 만든 공동체가 교회인데 왜 교회는 아직도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연약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의 연약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거기에 연약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흠이 많고 부족이 드러나는 이유는 나와 너 우리 모두가 아직도 부족하고 허물이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이 연약성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고 부족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이 이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허물 많은 우리를 거룩하고 정결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의 능력이 이곳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성도들에게 행복한 신앙생활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성도는 성도다워지게 되는 것이고 예배는 예배다워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 모델을 발견하려면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신구약 성경의 가장 완벽한 교회로는 에베소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에베소를 서신 중에 여왕이라 부릅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 2장 19절 이하를 통하여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선언이 있습니다. "행복한 교회를 만들어 갈 책임이 너희에게 있다. 건강한 교회를 만 들어갈 책임이 바로 너희에게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영암교회에 분명한 비젼이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키우는 교회가 되고 싶은 것이 우리교회의 비젼입니다. “신앙생활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납니다.” 건강한 교회, 행복한 교회를 만들어 보는 것이 우리의 비젼입니다.



본문 말씀은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교회는 부름 받은 하나님의 권속(백성, 자녀)으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19).

교회를 신약 전문 용어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고 부릅니다. '에크'는 밖으로, '클레시아'는 불러낸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밖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되시며 믿음의 기초요 삶의 반석이 되신다(20).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건축물과 같습니다. 모든 건축물에 기초 공사가 중요하듯이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는 모든 성도가 유기체와 같이 서로 연결이 되어 큰 성전을 이루어 간다(21).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위치와 역할이 중요합니다. 각자의 직분과 임무는 하나님의 결정이므로 모든 성도가 주께 하듯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해 나갈 때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세상에 우리가 왜 태어났는가? 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야 되는 것인가? 출세하고 성공하고 돈 벌어 좀 더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이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전을 함께 지어가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우리가 어떻게 섬겼느냐? 이 교회를 얼마만큼 건강하게 만들었느냐. 이 교회를 통하여 우리가 얼마만큼 행복한 삶을 누리면서 살았느냐? 하는 것이 천국에 섰을 때에 심판의 바로메타가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건강한 교회를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 행복한 교회를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 구절 2장 12절에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오늘 본문은 그렇게 이어져 갑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라" 그랬습니다. 천국의 외국인이 아니라는 말은 여러분이 교회의 손님이 아니라 천국의 주인공이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교회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손님은 권리가 없고 책임도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관광객이나 천국의 구경꾼이 아닙니다.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고, 행복한 교회가 되는 것을 구경을 하는 구경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소유했습니다. 천국의 좋은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미국에 가있는 우리 교민들이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지 모르고 중국에 있는 동포들 가운데에 우리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대단한 권세였습니다. 온갖 희생을 하고서라도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로마 시민권을 얻기만 하면 대단한 권세를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자는 로마 제국 내에서만 보호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나라에 있습니다. 이 시민권을 가지 게 되면 금생과 내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천국의 시민권을 얻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막대한 돈을 바친 것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엄청난 공적을 쌓은 것도 아니고 태어날 때 천국 백성의 자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우리는 죄 중에 태어나 죄를 먹고 마시며 죄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내가 구원 받았고 천국의 시민이 되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뿐이겠습니까?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황제의 피를 받아서 이 땅에 태어나야 만이 황제의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우리는 아무 자격도 없고 공로도 없이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니라"(요1:12-13).



우리는 하나님과 한 식탁에 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천국 문에서 배외하다가 멀리 방관자로 서 있다가 영원한 지옥을 향하여 멸망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국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나 주워 먹을 수 있는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엡3:20) 우리 주님께서 모퉁이 돌이 되셔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천국의 일꾼이 되었다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선언 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신앙인이 행복한 교회를 이룬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께서 유대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방인 교회의 모퉁이 돌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한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천국의 시민이 된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너희들을 통하여 나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를 원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교회를 가장 아름다운 교회, 가장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일까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믿음의 체계가 건강할 때에 이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통하여 행복을 나누어 가질 때에 주님 전에 찾아 나올 때마다 행복을 사 가지고 돌아갈 때에 여러분이 가정에서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고 살아갈 때에 이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이 만나서 좋은 교회를 건설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 건강하고 나하나 행복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몸 된 교회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이 건강한 신앙인, 행복한 신앙인이 될 때에 우리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감독만 좋아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화배우만 좋아서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다. 촬영기사나 조명기사만 좋아서 되는 게 아니고 손에 손을 붙들고 마음이 모아지고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할 때에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부유한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고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많이 모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지역에 상처 난 사람들, 문제 많은 사람들이 우리교회 찾아 나올 때마다 치유 받는 교회가 좋은 교회인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구성되고 존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교회) 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차적인 존재이유는 "사람들"이며 존재의 궁극적 목적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심어주고 그 생명이 자라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헨드릭 크래머(Hendrick Kraemer)라는 신학자는 교회의 본질적 주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냉동된 자산"이 되어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정립하고 그들의 "냉동된 자산"을 일깨워 "활동하는 자산"으로 변화시킬 때 교회는 비로소 그 사회에 진리의 빛을 비추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존 러스키라는 사람의 책에 보면 교회 건축의 7가지 요소가 나옵니다. 철근, 시멘트, 나무, 흙, 기와, 벽돌이 아니고 교회를 건축하는 데는 진리가 있어야 되고 아름다움과 애정이 있어야 되고 희생과 순종이 있어야 되고 땀과 꿈이 있어야 됩니다. 설계자와 건축가의 인격이 합쳐져서 건축물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순종과 땀과 희생의 피를 섞어서 교회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믿음과 꿈을 담아서 이 교회를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건축은 그 시대의 역사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들이 조잡한 건축물이라면 그 시대에 조잡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부실한 공사가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면 그 시대의 가치관이나 정신체계가 부실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건축물이 진실하고 아름다웠다면 그 시대가 그만큼 진실하고 아름다웠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되었다고 한다면 여기 참석한 여러분 모두가 건강한 신앙인이 될 때에 이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행복한 교회가 되었다면 여기 있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때에 우리 교회는 행복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의 희생의 터 위에서 세워지고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난민들이 세운 교회는 언제나 부흥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천국이 아니요 병원입니다. 너에게도 아픔이 있고 나에게도 아픔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늘의 천사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성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은 여기에 치유의 역사가 지금 이 순간에 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짧은 시간 내에 치유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시간이 걸리는 중환자들도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교회는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 예수의 어머니 와 아버지는 예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을 붙들고, 저 사람을 붙들고 동분서주 해 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예수를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과학 물질문명에서 잃어버린 예수, 분주한 세상살이에서 잃어버린 예수, 신앙의 방황 속에서 잃어버린 예수, 인생의 방황 속에서 잃어버린 예수, 그 예수를 영암교회에 가면 찾을 수 있고 잃어버린 구원의 감격, 행복한 신앙생활, 삶의 기쁨과 환희를 영암교회에 가면 찾을 수 있고, 방황하는 사람들도 열린 교회에 가면 구원의 감격을 회복할 수 있고 인생의 환희를 회복할 수 있고 인생의 축제를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에서 건강한 교회의 모델, 행복한 교회의 모델을 발견할 수 있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열린 교회는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타성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영적인 해이와 적극성 부족을 극복하고 활성화시켜야 할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우리 영암교회는 지금까지 걸어왔던 문턱을 넘어서서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드러내기 위해 믿음의 힘을 한군데로 모으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하며,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신앙적인 열심과 열정, 그리고 적극성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강한 리더십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지도력이며 교회를 영적으로 새롭게 하여 신앙적 부흥을 이루고자 지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강한 리더십이란 항존직을 포함한 직분자들의 신앙적 책임감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강한 리더십이란 궁극적으로 개인의 믿음 성장과 합당한 헌신을 통해 교회 공동체가 발전하고 모두가 하늘나라에 가서 칭찬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적인 성장과 하늘의 상급, 그리고 희망과 미래, 성경적 섬김과 은혜의 회복이 있는 교회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 동역자 된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이것이 지도자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여러 교우들과 열린 교회를 위한 것이기에 주어진 책무를 다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목회자에게 교회를 맡겨 주신 거룩한 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 교회를 사랑하시고 우리 열린 교회 성도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암교회에 귀감이 되는 과거와 희망찬 미래를 주셨습니다. 여러분들과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름다운 교회(로마서10장8-15)  



아름다운 교회는 겉모양보다 믿음에 있다

가을의 정취를 가득 담은 우리나라의 산과 들과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형형색색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은 꽃이나 나무 등 자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고 교회도 아름다운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아름다운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외모를 볼 때에도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나 믿음의 내용으로 볼 때도 아름다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을 말할 때 외모보다는 그분의 믿음의 양태를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교회는 외모보다 믿음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겉모양의 아름다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솟아 나오는 참된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그리고 영원히 넘쳐나는 아름다움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일생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온 셈입니다. 참된 아름다움, 그 뿌리는 영원하고 그 힘은 참으로 진실 된 것, 그 아름다움은 사실상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러한 아름다움은 오로지 아름다움을 만드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고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것은 정말로 그림자놀이요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아름다움 속에는 천지의 오묘한 질서가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하늘의 수수께끼가 있고 땅의 비밀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백합과 장미의 아름다움이 나오고 그로부터 석양에 빛나는 붉은 파도가 나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 자체에 비하면 이 아름다움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차라리 설명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택한 자녀를 통해서 하나님처럼 숭엄하게 표현됩니다.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생명과 힘이 있어야 한다

복음에는 좋은 소식,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 승리의 소식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지만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뜻도 들어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예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에는 반드시 생명이 있고 힘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도 생명이 있는 동안에만 아름답고 아름다운 인물도 살아있을 때만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끊어진 모든 것은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지혜가 물론 포함되어야 합니다. 병든 것이 아름다운가요? 무지하고 악한 것이 아름다운가요? 진리와 함께 표현되어야 참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모든 인류가 추구하는 참되고 영원한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란 교회다운 교회/

그렇다면 아름다운 교회는 무엇일까요? 왜 아름다운 교회인가요?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되는 아름다움에 교회의 의미가 더해진 것입니다. 물론 교회 자체도 아름다워야만 합니다. 외형도 내면도 교회는 아름다워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다울 때 아름답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란 교회다운 교회를 말합니다. 이 세대에 정말로 교회다운 교회는 어떤 것인가요? 과연 우리가 그러한 교회가 되었는가요?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단 하나인데,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즉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죄에 대해 순진하고 예수님처럼 의롭습니다. 너무도 온유하고 겸손하지만 또한 너무도 지혜롭고 강합니다. 폭풍우가 멈추고 귀신이 떨고 죽은 이가 일어납니다. 그의 권능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는 아름답게 사랑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도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아름답게 살았습니다. 본래 세상은 아름다웠습니다. 거기에 그의 탄생은 더욱 아름다워 천사도 노래했습니다. 그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병을 고쳐줄 때 아름다웠습니다. 그분께서 고통 속에 죽어가는 것까지도 아름다웠습니다. 그의 부활과 승천은 눈이 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아름다움의 근원이요 그의 삶이 바로 아름다운 삶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그러려면 교인 각자가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먼저 아름다움 자체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으로 자신이 아름다움을 소유했음을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의 눈은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럴수록 그는 예수님처럼 변해가며 예수님의 모든 복을 자기 것으로 누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살기 때문에 삶의 모든 순간이 아름답게 변해갑니다. 자신도 삶이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하며 이 아름다움을 감격 속에 감상합니다.



어떤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과거의 기억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감각만을 믿습니다. 과거에 경험했고 지금 보는 내가 참된 나라고 생각합니다. 실패가 많은 나, 억울함 많고 우울한 나를 믿습니다. 과거에는 기뻤지만 지금은 별 볼 일없는 나, 그것이 나라고 그래서 습관 속에서 나를 보고 쉽게 말해 버립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약하다. 나는 우울하다. 나는 별 의욕이 없다. 나는 자신이 없다."



그리고 같은 눈으로 이웃을 봅니다. 어제부터 늘 보아 와서 지금도 동일하게 보는 당신이 참된 당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변화가 왔어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경험의 눈은 비판적입니다. 경험의 눈은 비관하기도 잘하고 낙담하기도 잘합니다. 경험의 눈으로 이웃을 보고 교인들을 보고 그리고 비판의 말을 나눈다면 서로 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창조의 수준으로 본다

신자들은 반드시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소망과 사랑이 따라 나옵니다.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창조의 수준으로 봅니다. 아직 없어도 아직 부족해도 소망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반드시 믿는 것을 만들어 내고야 맙니다. 믿음의 눈은 경험에서 생겨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의 눈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봅니다. 아름다운 교인들은 믿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봅니다.



있는 그대로를 감사하며 받아들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하며 누립니다. 나의 가족, 나의 직업, 나의 교회, 나의 이웃 아니 나의 삶 전체를 사랑합니다. 이들 모두 아름답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내게 주어진 것을 감사함으로 누립니다. 믿음의 눈은 거기서 빛나는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하나님의 미소를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고 맛보는 사람의 삶에 아름다움을 부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은 없어도 아직은 좀 부족해도 소망하고 사랑합니다. 믿음은 시궁창에서도 아름다움을 봅니다. 하물며 이처럼 아름다운 교회당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을까요? 우리는 믿음으로 현재의 아름다움을 즐깁니다. 그러나 더욱 우리는 미래의 아름다운 교회를 생각하며 더욱 감사하며 소망하고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 되십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고 아름답게 만든다

믿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는 믿음의 생각을 합니다. 믿음 속에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가집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을 합니다. 그의 말은 긍정적이고 살아서 힘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참으로 아름답고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믿음의 사람은 아름다운 삶을 삽니다. 그의 안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속에서 그리스도가 그를 통해서 삽니다. 그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우울해 하지 않고 그는 언제나 소망하고 언제나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속에서 뒷받침하고 있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삽니다. 그는 죄에 대해 무지합니다. 그러나 의 자체를 가졌습니다. 그는 언제나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무엇이 감당할 수 없는 강한 존재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지배합니다. 그는 폭풍우를 잠잠하게 하고 귀신을 추방합니다. 그는 이 땅에서 그리스도처럼 살며 그리스도처럼 사랑합니다. 그는 이 땅에 있는 그리스도로 그리스도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과 나눕니다.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의 눈물을 씻어줍니다. 그는 이웃에게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나눕니다. 그는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이웃에게 줍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웃의 영혼에 더욱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이웃을 그리스도에게 이끕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함께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며 희망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여러 행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아름답게 이루어온 신앙의 선배들의 삶은 교회를 아끼며 사랑하며 복음에 대해 열심히 섬겨온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믿습니다.



새들백교회의 릭 워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군대의 능력은 식당에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이 몇 명인가에 달려 있지 않고 총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도 몇 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보내느냐에 달려있다.”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일꾼을 파송했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 교회의 건강은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발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예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프로그램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전통이나 역사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교회의 아름다움은 발에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파송하느냐, 땅 끝까지 가서 주의 생명의 말씀을,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하는 아름다운 발을 가진 교회가 되느냐, 여기에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이 달려 있는 줄로 믿습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교회는 반드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여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나아가는 교회가 되어서 세상 속으로 파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끼리만 밤낮 모여서 찬송하고 즐기고 예배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힘이 없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반드시 나아가야 합니다.



찰스 알렌이라는 신학 박사가 미국 교인들을 대상으로 신앙생활의 상태를 조사했는데 그 조사에 의하면 자신이 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거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35%의 신자들은 성경을 읽지 않고, 40%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헌금을 하지 않으며, 75%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85%의 신자들은 한 명도 전도해 본 경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사람들도 자기가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비슷합니다.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한국 갤럽에 의뢰하여 설문 조사를 했는데 이 조사에 의하면 불교인이나 천주교인에 비해 우리 개신교 교인들은 전도를 조금 더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교인의 72%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전혀 전도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수치는 미국에 비해서는 좀 낳은 편이지만 역시 한국 교인들 대부분도 전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전도를 잘 하지 못합니까? 전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라고 하면 영혼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앙의 이기주의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나만 구원받았으면 되었지 다른 사람이야 내가 뭐 그리 생각할 필요가 있겠나"하는 것입니다. 다른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적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지 못합니다.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름다운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름다운 교회는 더욱 확실하게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해 갑니다. 우리의 아름다움은 현재에도 있지만 미래에 더욱 나타날 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봅니다. 참된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모든 구성원에게 마치 그리스도처럼 보여 집니다. 그러나 장차 우리가 이룩할 아름다운 교회에 비하면 현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쁨 속에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소망으로 바라봅니다.



신학자 에밀 부르너는 교회 존재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불이 타오름으로 존재하는 것같이 교회는 선교함으로써 존재한다." 불이 타지 아니하면 그것은 불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전도하지 않으면 교회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하지 않는 교회, 전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그 존재가 무가치한 것입니다. 교회는 전도에 대하여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보다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아름다운 교회로 성장시켜온 신앙의 선배들의 아름다운 헌신을 본받아 임직을 받게 되시는 항존직분자들과 제자훈련에 참여하여 제자의 도를 이행하시는 분들이 겸허하게 교회와 교인들을 아름답게 섬기시는 신앙의 지도자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헌신자들과 함께 앞으로 새로운 미래를 아름답게 펼쳐나가시는 열린 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눅15장11-24)




여자에게 용서받지 못할 남자들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나 용납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올 때까지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나요? 기억 속에 남아 도저히 잊혀지지 않고 용납되지 않는 그런 일은 없습니까? 또한 용서받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아직까지 용서받지 못한 일은 없습니까? 어느 글에서 본 것인데 여자에게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남자가 있다고 합니다. “눈이 단추만 해서 쌍꺼풀 수술을 한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노출이 심한 여자만 보면 눈이 당구공처럼 커지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과거있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어도 미래가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귀 뚫은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귀가 막힌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머리카락 없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머리에 든 것이 없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밥 많이 먹는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반찬 투정하는 남자는 용서할 수 없고, 외박을 하고 온 남자는 용서할 수 있지만 속 옷을 뒤집어 입고 온 남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합니다. 용서받을 수 있는 남자들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화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그림에 담기 위해서 찾아 나섰습니다. 한 군인을 만나서 '세상에서 어느 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황금 들녘으로 데리고 가면서 '평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전에는 이곳이 전쟁터였지만 평화로 이제는 황금 들녘이 되었기에 평화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가는 그것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래도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혼 부부를 만나서 어느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냐고 물었더니 '사랑'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름답다는 것을 그림에 담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방문을 열자 오랫동안 자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내, 그 아내의 가슴에 안겨져 만족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구나! 그러면서 그 엄마가 자기의 아이를 안고 있는 그 모습을 그렸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내용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모든 사랑을 다 붓는 모습입니다. 아무리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서 그 사랑을 다 쏟아도 자녀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름답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엄마의 젖을 물고 젖을 통해서 전해지는 엄마의 사랑을 다 받아들이며 만족해하며 너무나 편안하게 잠자고 있는 그 모습, 사랑의 관계가 완전히 형성된 그 모습이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간을 사랑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흘리게 하신 그 크신 사랑과 용서를 감사와 감격으로 받아드리며 사유의 은총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인간들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그 아름다움이 예배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시고 아름다운 것들을 늘 만들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것들은 아름다운 것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지 않는 것들은 아름답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일들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내가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들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해 주시는 가운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정말 아름다운 일과 형편없는 모습의 두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름답지 못한 장면을 볼 수가 있고, 반면에 같은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이지만 참 아름다운 모습을 또한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여기서 볼 수가 있습니다.



먼저 추한 모습을 한번 봅니다. 탕자의 아버지의 사랑은 처음이나 끝이나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낳고 키워주는 부모에게 감사하기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많았습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겠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탕자는 집과 아버지의 곁을 떠나면 아주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이 재물을 모아 가지고 떠납니다. 부모님보다 재물이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부모님이 진정 나의 행복이 아니라, 재물이 나의 행복인줄 착각하고 떠난 것입니다.



탕자는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자기의 힘으로 정말 행복하게 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 내리막길로 내려갔습니다. 더 이상 자기의 어떤 것을 드러낼 수 없는 형편까지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깨닫고 돌이킵니다. 돌이키고 보니까 아버지의 사랑이 보입니다. 돌이키고 보니까 부모님의 사랑이 보이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아버지는 저 먼 거리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봅니다. 불쌍히 여기시면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목을 안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들의 상태가 최고로 더러워진 상태에 있습니다. 이 더러운 돼지보다 더 더러운 아들을 껴안고 내 아들이 돌아왔노라고 입을 맞추고 있는 이 장면, 저는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돌아온 우리들을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돌아갔을 때 하나님과의 만남,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탕자는 부모 품에 안기자 마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입을 맞추고 목을 안고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잔치를 벌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아버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고 가정을 떠나면서 내리막길로 향하는 흉한 모습이었지만, 여기서 돌이켜서 다시 아버지의 집을 향해서 돌아갑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가 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아닙니다. 처음부터 아버지의 사랑이 있었지만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이 아버지의 사랑을 못본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자기가 없어진 이후에 이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발견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가 없습니다. 느낄 수가 없습니다.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도 자식도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추한 모습이 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지만 우리 가운데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어지지 않으면 예수를 잘못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동정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내적 확신의 외적 표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 하는 여부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가 아니하는가로 선언하는 셈이 됩니다. 남을 존중하고 소중히 하며 넉넉히 용서하는 마음, 타인의 미숙함을 관용하는 아량, 이러한 성격의 소유자는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과 능력이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앨버트 허버드는 “누구를 용서하거나 누구에게 용서를 받고 생기는, 사람의 입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그 기쁨이란 마치 하늘의 질투심마저도 뒤흔들어 놓을 만큼 큰 기분이다” 라고 말했으며, 마크 트웨인은 “용서는 제비꽃이 자기를 밟아 뭉갠 발꿈치에 남기는 향기이다” 라고 했고 스트라빈스키는 “죄는 취소될 수 없고 다만 용서될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슨 일이든지 얽어매지 말고 용서를 통해서 풀어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네 인생살이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가만있어도 얽히고 꼬이는 게 일인데 거기다가 스스로 더 끌어들여 얽어맬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얽히고 꼬인 문제들을 풀기 위해 오셨습니다. 죄에 얽힌 우리들, 원한으로 묶인 우리들, 원망과 시기, 질투로 매여 있는 우리들을 풀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모든 것을 풀어 주셨습니다.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 용서하지 못합니다. 힘이 있으면 보복하고 힘이 없으면 어디 두고 보자 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삽니다. 언젠가 기회가 오면 갚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기는 용서입니다. 가장 마음이 넓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라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용서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용서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용서란 교회를 이루는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교회가 용서를 말할 때 그 용서는 두가지 차원의 용서를 포함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부터 나온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용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이 용서 받은 감격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람의 용서입니다. 이 두 가지의 용서는 밀접한 관계 속에 놓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은 모든 사람에 대한 용서의 근원이며 뿌리라면, 사람간의 용서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실천입니다.



우리의 용서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큰 용서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었던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어떠한 노력으로도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는 죄악의 짐에 매여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운명은 이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빚을 탕감하여 주셨습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이 용서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용서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에 용서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 용서받은 감격과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 속에는 용서받은 감격이 더욱 풍성하여지고 교회 가운데는 형제가 하나되어 연합하는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십시오.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용서는 우리가 형제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새로운 삶 그 자체

하나님의 용서는 새로운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새로운 삶이 우리의 삶의 관계에서 새로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새로운 삶의 반대인 낡은 삶은 어떤 것입니까? 분열․미움․적대감․비방․닫혀짐입니다. 새로운 삶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방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없던 일로 한다든지, 잊어버린다든지, 원상태로 돌려놓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명히 손해가 있고 상처가 있고 아픔이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상대방을 그 실수, 그 아픔, 그 원한에, 묶어놓지 않고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그것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한 감정, 우리의 아픔, 우리의 선입견에 상대방을 묶어 놓습니다. 우리 자신도 역시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담을 쌓습니다. 결국 그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용서를 거절하는 행위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용서는 그러한 모든 것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그리고 용서한 그를 우리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드리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 소외의 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용서는 악의 확산을 방지하고, 진정시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반드시 전달되어야 할 새 생명의 흐름입니다. 이 세속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실성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가시적인 행위는 우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우리의 이웃에게 용서를 거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용서를 거절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용서받은 자인 그리스도인은 우리 이웃의 채무 탕감 요구를 거절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십자가 사랑의 최고 절정

용서는 십자가 사랑의 최고 절정이며,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유일한 반포입니다. 때문에 기독교는 죄 용서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를 구하고, 또 남을 용서해야 할 필연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 기독교이며 십자가 중심의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미덕과 감정이 있다면 첫째 감사, 둘째는 남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사유(赦宥)의 감정입니다. 따라서 원수에 대한 용서는 우리 기독교에서 제일 중요한 특징이며 기독교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아야 할 죄가 있기에,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길은 같은 형제의 과실을 용서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부터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용서함을 받은 뜨거운 감격과 감사가 자신에게 넘쳐야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남을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골3:13절에서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너희도 그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11:25)"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기도할 때 남의 허물을 용서해 줘야 응답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남을 용서할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강권적인 사랑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4:32)".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형제에게 용서를 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요일3:23-24). 예수님의 마음 깊은 데서 솟아나는 그 샘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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